199화
걸화는 신의에게 받은 서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흥미롭게 변했다.
“아하! 이렇게 하면 간단한 것을 내가 그리 쓸데없이 애를 썼구나…….”
“이야… 이게 이런 효능도 있어? 오호…….”
걸화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서책과 약재를 가지고 영단을 만드는 데만 푹 빠져 있었다.
며칠 밥을 굶어도 배가 고픈 줄 몰랐고,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았다.
그저 한시가 아깝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매 순간이 즐거웠다.
“어? 이건 뭐지? 이 자리가 혈도가 아닌데? 왜 이래? 이래도 되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책의 마지막 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을 뒤집어도 보고 거꾸로도 보고 여러 방법으로 읽고 또 읽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며칠 밤낮을 새워 영단에만 집중한 걸화의 얼굴은 해골처럼 삐쩍 곯아, 눈빛만 번들거렸다.
광채 어린 그녀의 눈동자에 콩알만큼 작고, 괴괴한 색의 알약 하나가 비치었다.
손에 든 작은 영단을 향한 집념이 가득한 얼굴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볼이 쏙 들어가고 눈이 푹 꺼진 걸화가 눈앞의 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아야…….”
며칠 동안 뭘 제대로 먹지도 못한 입술이 갈라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그래도 좋았다.
“이히히히… 크흐흐흐…….”
눈 밑이 시커멓고, 입술이 터져도 계속 웃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 * *
“의원님…….”
오랜만에 안가를 찾은 은월이 나지막하게 걸화를 불렀다.
초췌하고 낯빛이 파리해진 걸화를 대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혹여 자신 때문에 지금껏 만든 영단이 잘못될까 염려도 되었다.
“오셨어요?”
은월이 알 리가 없지만 찔리는 게 많은 걸화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먹을 것을 좀 챙겨왔습니다. 건 식량도 많이 준비했어요. 힘드시지요?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은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힘 안 들어요. 전혀 힘 안 들어요.”
걸화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힘들어 보여 그만하라고 할까 봐 불안했다.
이리도 좋은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영단은 어찌 되어 갑니까?”
재촉하는 것 같아 미안한 은월이 걸화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 그것요? 음… 약속한 시일에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많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걸화는 은월이 원하는 기력을 보하는 환단 따위 얼마든지 만들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좋은 재료를 제공해 주는 그녀에게 말이다.
“시일이 촉박하면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되고,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원님의 진료소를 대신 보는 의원이 잘하고 있다고 하니 걱정 마시고 천천히 하십시오.”
자신을 염려하는 은월의 말에 걸화는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하나도 무리 안 해요.”
걸화가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제가 한동안만이라도 식사도 챙겨 드리면서 이곳에 있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방해되지 않게 조심할게요.”
은월의 말에 걸화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요, 아니요.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시고 한 달 뒤에 오십시오. 정말 정말 괜찮습니다.”
“얼굴이 너무 상했습니다.”
“제가 집중하면 밥을 잘 못 먹어서… 괜찮아요. 어서 가십시오. 어서! 어서!!”
걸화는 자신을 걱정하는 은월의 등을 떠밀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말씀하신 일자보다 늦어져도 괜찮으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은월의 말에 걸화가 웃었다.
“날짜가 부족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부족할 리가 없었지만, 다른 것을 하는 데는 시일이 부족할 수도 있었기에.
은월은 걸화를 보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안가를 내려갔다.
걸화는 멀어져가는 은월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다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 * *
얼마 후, 몸을 좀 추스른 걸화는 새롭게 만든 영단을 바라보았다.
귀한 재료를 한가득 넣어서 만든 콩알만 한 영단은 색이 푸르뎅뎅한 것이 뭔가 엄청 찝찝하게 생겼다.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특별한 향은 나지 않았다.
‘예전에 훔쳐 먹었던 걸부형의 영단은 엄청 향긋한 냄새가 났는데… 잘못 만들었나?’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잇!”
잠시 고민하던 걸화는 손에 든 것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음…….”
자신이 만든 영단을 복용한 걸화는 눈을 껌뻑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 식경 뒤.
작은 약을 삼키고,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상하다, 다른 약은 먹으면 뭔가 반응이 오던데…….’
다시금 한 식경이 지나갔다.
콧구멍을 후비적거리고, 목덜미를 긁으며 계속 기다렸다.
“뒷간을 가볼까? 나도 모르게 머리에 꽃을 꽂은 건 아니겠지?”
걸화는 뱃속에서 뭔가 신호가 오는 것은 아닌지, 머리에 뭘 꽂은 건 아닌지 손으로 더듬어 보아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저, 아무도 없는 산속의 고요함 뿐이었다.
시간은 더 흘렀다.
“에이… 엄청 비싼 재료로 만든 건데… 아깝, 이거 뭐…?! 윽… 으으으윽……. ”
순간, 엄청난 기운이 단전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이 휘몰아치는 힘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여기서 정신 줄을 놓으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엄습했다.
걸화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텼지만,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며 흰자위는 핏발이 터져 새빨갛게 변하고 온몸이 덜덜덜 떨리며 핏줄이 시퍼렇게 일어났다.
몸도 정신도 갑작스럽고 거대한 힘에 휘말려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중에 얼마 전에 보았던 서책의 마지막 장이 떠올랐다.
혈도가 이상하게 그려진 그것.
걸화는 길게 생각할 틈도 없이, 그것을 되뇌었다.
그러자, 거대한 기운이 빠르게 몸속을 돌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폭풍처럼 치달리던 기운이 잦아들며 걸화는 천천히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의 흐름도 주변의 공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몸속을 흐르는 기운에만 집중했다.
자신을 감싸는 힘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깨끗하고 정순한 기운은,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처럼 걸화의 주변을 회오리쳤다.
걸화의 기에 동조해서 자연의 기운이 빨려들 듯이 그녀를 감싸며 서서히 흡수되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세고,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운이 걸화의 몸 구석구석을 작은 틈도 주지 않고 어루만지며 그녀에게로 스며들었다.
걸화는 깊고 깊은 산 어딘가에서 흐르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며, 더욱 깊이 자신 속으로 빠져들었다.
며칠 후.
가부좌를 틀고 있는 걸화에게만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환하고 따뜻한 공기가 그녀만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굳은 것처럼 표정도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눈을 가볍게 내리감고 있는 걸화의 엉덩이는 바닥에서 한 장쯤 떠올라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자신이 공중에 뜬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안하기만 했다.
하루가 꼬박 지나도, 걸화의 모습은 그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단지, 그녀를 휘감으며 들끓어대던 기운이 봄바람처럼 가볍게 변했고, 그녀의 살결이 유난히 하얗고 깨끗하게 빛이 났을 뿐이었다.
공중에 뜬 걸화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걸화가 느긋하게 눈을 떴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유난히 새까맸고, 흰자위는 깨끗하게 반짝이며 형형한 안광을 발했다.
마음이 푸근하고, 조용히 지저귀는 새소리도 유난히 명료하게 들렸다.
안가 주위를 뛰어다니는 작은 짐승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손에 잡히는 것처럼 분명하게 느껴졌다.
걸화는 그 생소하고 뚜렷한 감각들이 싫지 않았다.
걸화의 눈에 저 멀리, 산 밑에서 올라오는 은월이 보였다.
꽤나 먼 거리인데도 하늘을 향해 곱게 휜 그녀의 속눈썹이며, 붉은빛의 연지를 바른 고운 입술 선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걸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좋아졌나?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해서 멀리서도 다 보이는 겐가?’
잠시 생각하던 걸화는 툴툴 털고 일어나서 은월에게 줄 환단을 챙겼다.
은월은 얼마 사이에 낯빛이 확 바뀐 걸화를 보며 의아해했다.
‘의원이라 그런 것인가?’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하얗고 맑았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만 해가 드는 것처럼 깨끗하고 환했다.
혈액순환이 잘되는 것인지, 입술은 붉고 눈동자는 까맸다.
곱게 변한 외관 외에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이전의 것과는 달랐다.
뭔가 묵직하고 단단한 것이 그녀의 주위를 둘러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딱히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에 뭐라 표현하기 힘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은월이 생각하는 중에, 걸화가 제법 큰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은월은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은은한 약재 향을 풍기는 환단이 빽빽하게 들이차 있었다.
“이리도 많이 만드셨습니까? 고생이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은월이 상자에 가득 찬 환단을 보고 말했다.
“제가 감사합니다. 귀한 재료까지 다 구해주셔서.”
걸화가 씨익 웃었다.
그녀의 미소가 세상을 초월한 것 같다고 느낀 것은 은월만의 착각일까?
걸화가 개운한 얼굴로 일어났다.
* * *
은월이 가지고 온 환단을 보는 사파 문주들의 눈이 반들반들했다.
걸화가 워낙 많이 만들어준 덕분에 환단의 수는 문주들 모두가 여남은 개씩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다.
사마경은 눈을 내리깔고 있는 은월을 바라보았다.
짙고 풍성한 속눈썹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그녀는 은근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은월이 이번 일을 아주 잘 처리하였군요. 역시 대단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마경이 사파의 우두머리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부분만 취하고, 실리에 맞지 않으면 이깟 모임 따위 빠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파의 문주들은 사마경이 그러든지 말든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사마경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과찬입니다.”
하오문의 문주 곽영이 묵묵하게 답했다.
녹림의 호령은 뚱한 얼굴이었다.
거지촌 의원이 저리 많은 영단을 만들어줬으니, 은월이 중간에서 몇 개 슬쩍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였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기에.
“은월의 미인계에 안 넘어갈 놈이 중원 천지에 어디 있겠소? 이야― 어지간히도 좋았나 보구만. 저리도 많이 만들어준 것을 보면…….”
흑촌의 원찬이 은월과 영단을 번갈아 보며, 헤벌쭉 웃었다.
“그것이 다 능력이지요. 은월 덕분에 일이 잘되었습니다.”
혈륜궁의 등정이 말했다.
“저 많은 것을 어찌 나눌 것이오?”
호령이 은월을 칭찬하는 문주들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는 무조건 많이 가지고 싶었다.
‘내가 대신 갔으면, 중간에서 슬쩍 빼돌리는 것인데…….’
호령은 못내 아쉬웠다.
“으흠…….”
사마경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자신이 이 모임을 만들었고 실제로 이끌고도 있으니, 자신이 영단을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문파에 서너 개씩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하면 또 주면 될 것이라고.
“일단 각 문파에 세 개씩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요? 겨우 세 개?”
흑촌 원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거지촌의 의원에 대해서 아무도 몰랐을 것이고, 영단 같은 건 구해올 생각도 못 했을 테니.
“우선 조금 섭취해 보고 다시 의논하자는 것이지요. 혹여 영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마경이 묵직한 목소리로 원찬을 나무라듯 말했다.
‘저… 저… 욕심만 많은 놈 같으니라고… 쯧!’
사마경은 어떻게든 자신이 영단을 관리할 방법을 생각했다.
호령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사마경을 바라보았다.
원찬도, 등정도 자리에 모인 모두의 마음속에 영단에 대한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회의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