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두침에게 만들어 준 환단은 그다지 좋은 재료로 만든 것도 아니고, 조제가 까다로운 것도 아니었다.
재료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뭔가 엄청난 영단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신의께서 주신 영단의 비급이 쓰인 서책까지 가지고 왔다.
‘어차피 당분간은 이곳에 있어야 할 터인데…….’
걸화는 이번 기회에 초심으로 돌아가서 영단에 대해 다시 연구해 보기로 마음먹으며 정말 원하는 것을 몽땅 다 써넣었다.
“시일이 조금 걸릴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은월이 걸화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구하기 어려우면 못 구해도 어쩔 수 없구요.”
걸화는 자신이 쓴 재료 모두를 은월이 구해줄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정말 평생 가도 구경하기 힘든 약재의 이름도 써 놓았기에.
“구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은월은 빽빽하게 재료가 쓰인 종이를 들고 안가를 나섰다.
‘바라는 것이 정말 그 별 볼 일 없는 환단 뿐인가?’
걸화는 멀어져 가는 은월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에잇!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아주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걸화는 신이 났다.
독립하기 전에는 뭘 해도 스승님의 눈치를 봐야 했고, 독립한 후에는 밀려드는 거지들 때문에 자신만의 시간이 없었다.
걸화는 생전 처음으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영단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음껏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 * *
며칠 후, 은월은 걸화가 써준 대부분의 재료를 챙겨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은월이 내려놓은 약재를 보는 걸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야― 이거는 진짜 귀한 건데 어찌 구했어요? 우와― 이건 기대도 안 하고 써본 건데… 와아!”
걸화는 은월이 가지고 온 약재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나머지 재료는 구하는데 시일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은월이 재료를 살피는 걸화에게 말했다.
“에? 더 구해 주려구요? 안 그래도 되는데… 뭐 구할 수 있으면 좋고. 되는대로 해 주세요.”
지금 은월이 가져다 준 재료만 해도 엄청 귀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더 귀하고 좋은 것까지 바라지 않았는데… 구해준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만드시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은월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달포…오가 아니고, 두… 석 달! 석 달요. 석 달이 필요해요.”
걸화가 생각하며 말했다.
은월이 말하는 환단은 반나절이면 백 개도 만들 수 있었지만, 걸화는 이 좋은 기회를 마음껏 이용해 볼 작정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좋은 약재를 잔뜩 가지고, 스승님께서 주신 영단에 대한 서책까지 있는 이 상황을 말이다.
“제가 종종 찾아오겠습니다.”
은월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오!! 영단 만드는 데 집중이 흐트러지면 좋지 않아요. 자주 오지 마세요. 호위들도 머얼리 계시라고 해주세요.”
걸화가 딱 잘라 말했다.
은월이 원하는 환단이 아닌 다른 것을 만들고 있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최대한 오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럼 보름 뒤에 오겠습니다. 그때쯤이면 나머지 약재도 구해질 것 같고, 식량도 걱정이 되고…….”
“보름? 안 돼요!! 하, 한 달! 한 달 뒤에나 오세요. 그전에는 절대 오면 안 돼요. 나 집중 못 해서 영단이 잘못 만들어지면 큰일이잖아요.”
걸화가 은월에게 엄포를 놓았다.
“의원님!”
은월이 자세를 고쳐잡은 후 정색을 하곤 걸화를 불렀다.
“왜, 왜요?”
걸화는 혹시 딴짓하려는 것이 들킨 게 아닌가 싶어 움찔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하시던 일도 못 하게 예까지 모시고 와서…….”
은월이 진심으로 말했다.
갑자기 찾아가서 영단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 잡아두고 약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그 부탁을 들어준 걸화에게 고마웠다.
“뭐… 뭘…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 정도 가지고… 하. 하. 하.”
걸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은월의 진심이 담긴 사과와 감사의 말에, 양심이 무진장 찔리는 걸화였다.
‘부탁한 환단을 많이 만들어주면 되지, 뭐…….’
“그럼 한 달 뒤에 오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은월이 고개 숙여 곱게 인사했다.
“걱정 마시고, 조심히 가세요!”
걸화가 돌아서는 은월을 보며, 혼자 씨익 웃었다.
‘드디어 혼자다!’
스승님도 없고 환자도 없고, 귀한 영단 재료와 스승님이 주신 영단의 비급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을 먹어봐 줄 사람이 없었다.
스승님의 눈치를 볼 것도 없으니 직접 먹어보고 영단의 효능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할 계획이었다.
* * *
거의 1년 동안 영단을 만드는 데 신경을 쓰지 못했던 걸화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다.
얼마 뒤.
“으아아아악―”
걸화가 비명을 내지르며 달렸다.
더이상 빠를 수 없을 만큼,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내어… 뒷간으로 달렸다.
“으악!!”
그리고 재빨리 뒷간으로 들었다.
한참 뒤.
“으으으… 다리야…….”
걸화가 어정쩡한 자세로 뒷간에서 나왔다.
그녀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으억… 으…….”
세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다시 몸을 돌려 뒷간으로 향했다.
해 질 무렵, 걸화는 뒷간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나왔다.
오늘 하루 만에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들었다.
벽을 잡고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그녀의 다리는 심하게 쩔뚝거렸고, 얼굴은 하루 사이 핼쑥해져 있었다.
“아휴… 으으… 대체 이건 뭐가 잘못된 거야……?”
제일 처음 만들었던 영단을 직접 복용한 걸화는 하루 종일 뒷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밤이 되어서야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 수 있었다.
‘교준 대협… 미안해요.’
그 영단을 먹였던 교준에게 마음속으로 사죄를 하며,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얼마 뒤, 새로운 영단을 복용한 걸화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입을 활짝 벌리고 크게 웃으며, 안가 주변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마당의 한 편에 있는 돌을 보고 쪼르르 달려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돌아! 넌 참 단단하구나!”
걸화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돌을 바라보며,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한참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일어서서 팔을 너풀거리며 뛰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되는대로 돌과 나무와 담을 손으로 훑으며 뛰었다.
한참을 뛰다 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는 곳에 쪼그리고 앉았다.
“꽃아! 넌 정말 아름답구나! 나와 함께 하자!!”
말을 마친 걸화는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양팔을 펄럭이며 또 뛰었다.
“아하하하하, 새들아! 노래를 불러주렴. 어머! 너도 아름답구나!”
걸화는 안가 주위의 산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혀,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하!”
그녀의 머리에 꽂힌 꽃잎이 나풀거렸다.
“…님… 원…님…….”
걸화의 몸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이히히히.”
누군가가 몸을 간지럽히는 것도 같았다.
“…원님… 의원님… 의원니임!!”
“큭… 으하하하!”
정신이 아득한 중에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쫘악!! 쫙! 짜악!! 짝―!!
걸화의 눈앞에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양 볼이 얼얼해지면서 까마득한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으헉!”
걸화가 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화들짝 눈을 떴다.
눈앞에 은월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우… 머리야…….”
정신이 들자, 지독한 두통이 함께 몰려왔다.
머리를 문지르던 걸화는 자신에 머리에 집히는 것을 떼어냈다.
“이건 뭐야?”
시들시들한 꽃잎이었다.
머리에 꽂힌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이참…….”
자신의 머리에 꽂힌 시든 꽃잎을 떼어내다 포기하고, 대충 머리를 비벼 꽃잎을 털어냈다.
“의원님 괜찮으세요?”
은월이 걸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아구… 아구 등이야… 팔도… 다리도 어디 안 아픈 곳이 없네…….”
걸화가 끙끙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은월이 와서 자신을 과격하게 깨우기 전까지 산속의 꽃밭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저를 잡으세요.”
걸화는 은월의 팔을 잡고 겨우 꽃밭에서 일어났다.
“아우… 머리야… 삭신이 쑤셔… 배고파…….”
걸화는 구시렁거리며 은월의 부축을 받아 안가로 향했다.
은월은 안가에 머물며 걸화를 보살펴주었다.
걸화는 3일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을 걱정하는 은월의 등을 떠밀며 그만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영단을 만드는 데 방해된다고 공갈까지 치면서.
아직 만들어 보고 싶은 영단이 있었고, 걸화에게는 시일이 많지 않았다.
얼른 은월을 보내고, 다시 시도해 보고 싶었다.
* * *
무림맹주의 호출을 받아 그의 방으로 드는 운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와 반대로 맹주의 표정은 느긋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
맹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는 운문은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원래 운문은 맹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화산이 봉문을 한 이후에는 화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계속 무림맹을 위해 일해 달라는 맹주의 요청에 못 이기는 척 맹에 머물렀다.
그것은 봉문을 하기로 한 장문인의 결정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고, 언젠가 봉문을 풀 화산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출세에 대한 욕심도 섞여 있었다.
모두를 위해 좋은 결정이라 생각하며, 화산으로 돌아오라는 장문인을 명을 무시했다.
“생각보다 시일이 늦어지는군요. 그 일에 대해서 화산의 장문인과 이야기를 해보셨습니까?”
맹주 여송의 말에 운문이 그를 바라보았다.
“…장문인께서는 봉문을 하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운문이 맹주와 타문파 수장들의 의견을 써서 보낸 서찰에 대한 장문인의 답은 단호했다.
“그렇겠지요. 봉문을 하겠다고 맹의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간 지 얼마가 되었다고 쉬이 그 말을 거두어들이겠습니까? 내 장문인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여송이 이해심 가득한 표정으로, 봉문을 결심한 화산의 장문인을 조롱하고 있었다.
“…….”
운문은 여송의 말이 불편했지만, 나서서 뭐라고 할 입장이 못되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에 속한 우리들은 모두 정도를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까? 처음에야 수일검의 일에 화가 났지만, 지금은 모두 화산과 함께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있어요. 그것은 장로께서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운문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무림맹과 다른 문파들은 화산을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화산을 끌어들여 정마대전의 화살받이로 쓰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운문은 수많은 화산 제자들의 규탄을 묵묵히 받으며, 봉문을 추진한 장문인의 마음이 절실히 이해가 되었다.
봉문을 하고 화산으로 돌아오라는 장문인의 명을 무시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손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몰아넣게 생겼으니.
“장문인께서 쉽게 말을 바꾸기 힘드실 겝니다. 내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지금이 아니라 10년 뒤, 20년 뒤의 화산을 생각해야지요. 언제까지 화산 속에 숨어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정마대전에서 공을 세워 영웅의 문파가 될 기회입니다.”
여송이 ‘영웅의 문파’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말이 운문의 목을 옥죄이는 것 같았다.
“…….”
“수일검의 일이 있음에도 다른 문파에서 큰 아량을 베풀어 화산과 함께하고자 하는데 더 망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송이 운문의 동조를 구했다.
“…….”
운문은 답하지 않았다.
“내 말을 이해했다면 장로께서는 맹의 일은 잠시 놓아두고 화산으로 가서 장문인을 설득해 보십시오.”
“으흠…….”
운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화산으로 가서 다시 맹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러면 욕을 먹겠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지킬 수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청연이와 제자들은 내가 심부름을 좀 보냈으니, 혼자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여송의 말에 운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맹에 함께 나와 있는 자신의 제자들을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소리였다.
“…….”
“우리 다 함께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 중원의 정의를 바로 세우도록 합시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맹주가 힘없는 운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
적당히 대꾸한 운문은 터덜터덜 맹주의 방에서 나왔다. 맹주의 집요함에 치가 떨렸다.
화산의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지 속이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