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의원 백공은 투덜거리며 걸었다.
‘그놈의 빚이 뭔지.’
멀쩡한 자기 진료소를 닫아놓고 거지촌에 가서 의원 노릇을 하라니 귀찮고 짜증 나고 싫었다.
‘그 망할 놈한테 사기만 안 당했어도 이런 일은 없는데.’
‘그래, 그리 번듯하고 목 좋은 진료소 자리가 그 가격이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뵈는 게 없었다.
‘에잇… 촌구석에 돈 안 되는 진료소는 접고 그럴듯한 곳에서 제대로 의원 짓 해보려고, 빚을 내서 진료소 자리라고 샀건만 그게 사기일 줄이야.’
빚을 진 곳이 하필이면 하오문 지부였다.
중원 천지에 하오문을 피해 어디로 도망을 간단 말인가.
꼼짝없이 빚을 끌어안은 채, 촌 동네에서 의원 노릇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돈을 빌린 하오문에서 거지촌 진료소를 봐주면 하루에 한 달 치 이자를 빼준다고 하는데 안 갈 수도 없고… 가자니 짜증이 났다.
대체 어떤 정신 빠진 의원이 거지촌에 진료소를 차려가지고 이리 이상한 일을 벌이냐는 말이다.
“에잇…….”
백공은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를 세게 걷어찼다.
돈 많이 벌어서, 예쁜 색시 얻어 장가도 가고 자식도 줄줄이 낳고 살겠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건만, 현실은 하오문에 빚이나 갚아가며 촌구석에서 노총각 의원으로 홀로 늙어가고 있었다.
“하아… 좋다!”
백공은 넓은 동정호를 바라보며 긴 숨을 내뱉었다. 내내 답답했던 속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와보는 동정호 주변은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번듯하게 차려입고 유람이나 다니는 치들도 있었고, 칼 한 자루씩을 옆에 차고 다니는 무인들도 있었다.
백공은 그 많은 사람들과 번듯한 번화가를 지나서 계속 걸었다.
“어휴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에서 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동정호를 지나 거지촌과 가까워질수록 눈에 뵈는 것은 거지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쾌한 기분이 더욱 더러워지고 있었다.
앞으로 저런 놈들이나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빚으로 인해 깜깜한 앞날이 더 새까매지는 것 같았다.
“허!! 정말로 진료소가 있네.”
인가도 없고, 객잔도 없는 거지촌 옆에 말이다.
백공은 구시렁대며, 진료소로 들어섰다.
진료소 마당을 가득 메운 거지들의 꼬락서니를 바라보자니 빚이고 뭐고, 확 다 집어던지고 돌아가고 싶었다.
‘으이그! 이놈의 구질구질한 팔자는 의원이 돼서도 변하는 게 없구나!! 아이구! 내 팔자야!!’
백공은 뚱한 얼굴로 진료소 마당에 멀뚱히 서 있었다.
거지들 틈에 있던 쬐끄만한 여자아이 하나가 촐랑거리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
백공은 멀끔하게 차려입은 여자아이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뭐가 좋은지 생글거리며 백공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의원님이 안 계셔서 진료는 할 수 없어요. 조금 있으면 식사를 내어올 겁니다.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세요.”
영영은 자신의 어미 미령이 거지들에게 하던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
진료소에 의원이 없는 건 알고 있었다.
의원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자신이 진료소를 맡아보기로 했으니 말이다.
한데 처음 진료소에 드는 사람에게 굳이 식사 시간까지 알려주는 건 뭔가?
백공은 귀엽게 생긴 아이를 신기하게 쳐다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대신 온 의원이라고 알려야 하는데…….’
어디서 묵으면 되는지, 환자들은 어디에 있으며 상태는 어떤지, 약재는 어떤 게 준비되어 있는지 물어볼 것이 천지인데 주변에는 거지들밖에 없었다.
‘아! 곱게 차려입고 의원이 없다는 것과 밥 시간을 알려주는 여자아이도 있기는 했지.’
“에휴우…….”
다리도 아프고 피곤한 백공은 평상 한편, 거지들과 떨어진 모서리에 적당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뭘 하라는 건지…….’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자는 생각뿐이었다.
‘하루에 자그마치 한 달 치 이자를 쳐준다고 하니 싫어도 버텨야지.’
“식사 준비됐습니다.”
백공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여인네가 나와서 거지들에게 외치는 소리였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거지들은 어디선가 상을 가지고 와서 평상이며 마당에 깔린 거적 위에 폈다.
그리고, 여인이 들어간 곳으로 따라 들어가서 음식을 내어와 차렸다.
얼추 상 위에 음식들이 차려지자 둘러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백공은 눈앞의 음식을 보며, 군침을 꼴깍 삼켰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고, 무엇보다 몹시 시장했다.
상에 차려진 음식은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제법 맛깔스러워 보였다.
‘에잇!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보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던가.’
백공은 거지들 틈에 끼여서 차려진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소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은 거지들에게만 먹이기 아까울 정도로 맛이 좋았다.
‘너무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별거 없는 음식들이 이상하리만치 입에 쫙쫙 붙었다.
그는 밥상에 코를 박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입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같은 상에 앉은 거지들이 그를 가엽게 바라보며 알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든지, 음식 접시를 자신에게 밀어주는 것과 같은 작은 배려 따위는 인식하지 못했다.
짭짤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죽순 볶음은 유난히 맛이 좋았다.
젓가락을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백공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천천히 많이 드세요.”
미령이 죽순 볶음 접시를 채워 주며 말했다.
그녀는 백공이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온 새로운 거지라고 생각했다.
미령뿐이 아니라 백공 주위의 다른 거지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먼 길을 오느라 먼지와 때가 묻은 의복이며, 객잔에 드는 돈이 아까워 대충 길가에서 쪽잠을 자느라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과 걸신들린 듯 먹는 꼴이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백공은 여인의 차분한 목소리와 그녀에게서 풍기는 좋은 향기에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여인에게서는 짭짤하고 달큼한 간장 냄새와 구수한 죽순의 향, 햇볕에 잘 말린 의복의 까슬까슬한 향기가 뒤섞여 온유하고 따뜻한 향취가 흘렀다.
백공은 앉은 채로 옆에 선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꾀죄죄한 거지들 사이에 선 그녀는 깨끗하고 맑고, 기품이 넘치며 아름다웠고 아무튼, 이 세상의 모두 좋은 단어를 다 갖다 대도 부족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백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저리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뭐… 더 드릴까요?”
미령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백공에게 물었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백공이 눈을 끔뻑였다.
“아… 아닙니다, 잘 먹었습니다. 거… 감사합니다. 저는 그… 이곳에 의원을 대신해서 하오문의 의뢰를 받고 온 의원 백공이라고 합니다.”
백공이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점잖게 말했다.
“어머! 새로 오신다던 의원님이셨군요. 미리 알았으면 상을 따로 봐 드릴 것을 그랬습니다.”
미령이 놀람과 미안함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잘 먹었습니다.”
백공이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곧 교준 대협께서 오실 겁니다.”
별것도 아닌 미령의 말에 백공의 얼굴이 붉어졌다.
늙은 노총각의 가슴이 괜스레 울렁거렸다.
* * *
백공이 진료소를 맡아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찾아오는 이들의 수가 많아서 그렇지, 잔병이 대부분인 거지들을 진료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백공은 성소와 영영을 양쪽 무릎에 각각 앉혀 놓고, 장에서 사 온 당과를 먹이며 생각에 빠졌다.
부지런히 주전부리를 사다주며 성소에게 알아낸 이야기를 취합해 보면…….
미령은 영영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별한 모양이었다.
그 후, 아이들과 친정에서 지내다 친정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그녀와 아이들은 이 거지촌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듯했다.
‘어린 성소가 제법 글도 읽는 것으로 보아, 친정이 몹시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일단 과부라는 말이지……?’
거지들의 밥상에 푸짐하게 음식을 올려주며 미소 짓는 미령을 떠올리다, 백공은 혼자 헤실헤실 웃었다.
이상하게 그녀를 떠올리기만 하면 뱃속이 근질근질한 것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 * *
은월의 마차는 며칠을 달려, 인적 드문 산길 앞에서 멈추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걸화가 마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처음에는 그저 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할수록 미심쩍었다.
돈도 주고 약재도 주고, 조용한 장소도 제공해주고… 자기 대신 진료소를 봐줄 의원까지 보내주면서 영단을 만들어 달라는 건 은월이 너무 손해인 것 같았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내게 영단을 만들어 달라는 게지?’
아무도 걸화의 영단이나 탕약을 원하지 않았던 보은장에서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서 그런지 걸화는 은월이 자신에게 영단을 청하는 것이 영 수상했다.
더 나아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적한 장소를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됩니다.”
은월이 좋은 말로 걸화를 달랬다.
“…….”
걸화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따랐다.
은월이 걸화를 데려간 곳은 산중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곳은 하오문의 안가입니다. 주변은 호위와 결계가 처져있어 다른 이들이 함부로 오지 못할 것입니다. 기본적인 약재는 미리 구비해 두었습니다.”
“여기서 만들라고요? 대체 어떤 영단을 만들어달라는 겁니까?”
분에 넘치게 좋은 대우에 얼마나 대단한 영단을 원하는지 겁이 날 정도였다.
“멧돼지에 받힌 거지에게 지어준 영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은월은 회의에서 사파 수장들이 원했던 영단을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그것을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면, 걸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영단이라도 만들게 할 생각이었다.
“그거요오?”
‘난 또 뭐 대단한 걸 만들어 달라는 줄 알았네… 무인들이 먹을 거 아닌가? 그 환단을 어디다 쓰려고… 누가 아프나?’
걸화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걸화가 멧돼지에게 받힌 거지, 두침에게 만들어준 것은 영단이라기보다는 보약에 가까운 환단이었다.
기운 없는 두침의 기력과 정력을 보하는 약이었다.
걸화는 은월이 뭔가 더 대단한 영단을 원하는 줄 알고 예까지 따라왔다. 겨우 그런 환단이라면 진료소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은월은 가타부타 답하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는 걸화에게 말했다.
“무엇이든지요?”
되묻는 걸화의 목소리가 높았다.
“네.”
“헤헤…….”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던 걸화가 진지하게 필요한 재료를 써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