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잠시 후, 걸화가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있는 모든 거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여인을 향한 걸화의 얼굴이 거북하게 변했다.
눈 뜨고 봐주기 힘들게 추접스러운 거지에게도 보이지 않던 표정이었다.
걸화는 백화루 주인인 은월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연천과 얼굴을 마주하고 속삭여 대던 그 여인을 어찌 잊겠는가.
벌써 수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은월은 늙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여인으로서 한껏 무르익어 더욱 농염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들어오시오.”
걸화가 떠름한 얼굴로 말하고는 먼저 방으로 들었다.
‘이제 와서 저 하오문 기녀가 왜 찾아온 게지?’
방으로 들어 은월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도, 걸화는 그녀가 자신을 찾은 이유에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영영 가족에게 원래 쓰던 자신의 방을 내어준 터라 침상과 탁자뿐인 걸화의 방은 작았지만, 미령이 매일 청소를 하는 덕분에 깔끔했다.
걸화와 은월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미령이 손님 접대하느라, 약초 달인 물을 가져와 은월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은월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눈앞의 여인을 본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은월의 눈썰미만큼은 무엇보다 확실했다.
특히, 여인을 보는 눈은 유난히 매서웠다.
덕분에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더럽고 지저분 무리 속에서 기녀로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여인을 잘도 골라냈다.
‘으흠… 지저분한… 더러운 아이……?’
골똘이 생각하던 은월은 걸화를 다시 쳐다보았다.
‘세상에…….’
은월은 걸화가 누구인지 겨우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연천의 얼굴도 같이 떠올랐다.
그를 유혹하는 은월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지켜주겠노라던, 천진하고 유순한 눈을 가진 사내의 얼굴이 말이다.
은월은 수년 전에 남장한 걸화가 여인인 것을 알았었다.
그리고, 연천이 자신을 취하지 않은 게 그 작은 아이 때문은 아닌가 의심했었다.
그 지저분하고 작던 아이는 이제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기지 못하는 여인이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그분과……?’
은월은 앉은 채, 방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사내의 흔적은 없었다. 연천과 연을 맺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늙은이같이 말하고 아이처럼 웃으며 사람을 편안하게 하던 그 사람, 백연천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심장이 이상하게 뛰어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걸화가 은월의 생각을 깨고 물었다.
“제가 누구인지 아시는군요.”
은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기억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서요.”
걸화는 여전히 은월을 경계하며 답했다.
“그분은 안녕하십니까?”
은월이 그녀답지 않게 사내의 안부부터 묻고 있었다.
“아마도?”
걸화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같이 있지 않으십니까?”
은월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걸화는 더 대꾸하기 싫다는 듯이 짧게 답했다.
“…….”
은월이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걸화가 어이없는 얼굴로 은월을 쳐다보았다.
“하오문도가 그리 표정이 드러나서야 어찌 장사를 합니까?”
“으흠…….”
은월이 목을 가다듬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스스로도 놀라는 은월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걸화가 다시 물었다.
“거지촌 의원님을 뵈러 왔습니다.”
은월이 일할 때 짓는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무슨 일로…?”
“그건 의원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뵈어야 해서요. 의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걸화가 씨익 웃었다.
“그 의원이 나요.”
“네에?”
은월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거지들이 버글대는 거지촌에 자리 잡은 의원.
‘성질이 고약하고 술을 좋아하며, 화가 나면 작대기로 거지들을 두들겨 패는 그 의원이 이 젊은 여인이라고?’
“음! 다른 의원은 없습니까?”
은월이 표정을 다잡고 물었다.
“이곳 거지촌의 의원은 나뿐이오.”
“으흠…….”
미인계로 의원을 유혹해서 영단을 만들어달라고 할 작정이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다.
은월이 난감한 얼굴로 걸화를 쳐다보았다.
다른 계획이 필요했기에, 찬찬히 의원을 살폈다.
은월이 볼 때, 지금 눈앞에 있는 거지촌 의원은 뒷배가 없었다.
신의에게 쫓겨났다고 했으니 신의와 관계가 안 좋을 가능성이 더 컸다.
거지촌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형편도 그리 넉넉하지 못하고, 힘 있고 돈 있는 이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랬기에 사파에서 접선을 해볼 엄두라도 내어본 것이긴 하지…….’
은월은 미인계가 안 통한다면 의원을 잡아다가 가두어두고 영단을 만들어 내라고 할 작정이었다.
한데, 이 의원에게는 자신이 은혜를 입은 적도 있고, 무엇보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그 사내와 가까운 사이였다.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은월은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영단을 받아내지 못하면 녹림의 호령이 나설 것이다. 그건 하오문과 자신에게도, 이 의원에게도 좋지 못한 일이 될 게다.
“의원님!”
은월이 한참 만에 묵직한 목소리로 걸화를 불렀다.
“네.”
“혹여 만들어놓은 영단이 있으면 제게 파십시오. 값은 넉넉히 쳐 드리겠습니다.”
은월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돈을 충분히 주고 영단을 구입해서, 사파의 문주들에게 돈을 더 받고 건네면 은월의 일은 끝나는 것이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이 의원에게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일 듯싶었다.
“네에?”
걸화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은월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보은장에 있을 때에는 몇 달에 하나씩 영단을 뚝딱뚝딱 만들어 냈다.
신경의 대부분이 영단에 쏠려 있었기에 틈만 나면 서책을 공부하고, 귀한 약재를 꿍쳐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지촌에 든 후로 영단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환자를 상대하는 것도 바쁜데, 만들어놓은 영단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 거 없습니다.”
걸화의 대답에 은월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으흠… 그럼 지금부터라도 만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걸화가 은월을 쳐다보았다.
영단이 필요하다는 이에게 못 만들어 줄 것도 없었다.
1년 전만 해도 영단을 만들어달라는 자가 있으면 걸화가 더 기뻐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거지촌 진료소에서는 무리였다.
보은장에서야 영단에 필요한 귀한 약재가 많았지만, 이곳에서는 영단의 재료도 없고 무엇보다 영단을 만드는 것은 섬세한 작업이었다.
조용히 집중할 시간이 필요한데, 이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거지촌 진료소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에는 재료도 없고, 영단을 만들려면 그곳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허구한 날 환자가 밀려드니 만들 시간도 없습니다.”
걸화가 솔직하게 말했다.
“…….”
은월이 걸화의 얼굴을 빤히 보며 생각했다.
‘저 의원은 여건만 된다면 영단을 만들어 줄 생각이 있다.’
그럼 상황만 만들어주면 된다.
그러면 호령이 의원에게 손을 뻗을 일도 없고, 자신은 맡겨진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고 수고비와 영단도 챙길 수 있으리라.
“…….”
걸화는 은월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하고 기다렸다.
생각을 끝낸 은월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재료도 준비해 드리고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할 터이니 영단 몇 개만 만들어 주십시오.”
은월은 걸화를 한적한 곳으로 옮겨 그곳에서 영단을 만들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곳에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기 힘듭니다.”
은월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영단을 만드는 데는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 가까운 곳으로 왕진가는 것도 아니고, 비록 소소한 환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의원이 진료소를 그리 오래 비워둘 수는 없었다.
“그럼… 제가 의원님이 안 계시는 동안 이곳을 맡아볼 만한 의원을 모셔오겠습니다. 사례도 넉넉히 하겠습니다.”
은월은 어떻게 해서든 걸화에게 영단을 받아내야 했다.
그렇지 못했다가 사파 전체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자신과 하오문의 위신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에잉? 사례? 영단? 의원?’
은월의 말을 되새기는 걸화의 눈이 반짝였다.
거지촌 진료소의 일이 이래저래 바쁘기는 했지만, 걸화는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다.
절대 진료소 문을 닫을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간의 휴식이라면 대환영이었다.
거기다 사례금도 주고 영단을 만들 수 있는 준비까지 해 준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은 그럭저럭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이 비슷해져서 다행이었지만, 가지고 있던 돈이 간당간당하던 차였다.
잘만하면 스승님께 받은 영단 제조 비급을 공부하고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자신을 대신할 의원까지 모셔오겠다니.
돈도 주고 영단을 만들 장소와 시간도 마련해주고, 재료까지 준비해 준다는데 암만 생각해도 이렇게 좋은 기회는 없을 듯싶었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한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수일 내로 모시러 올 것이니 준비해 주십시오.”
걸화가 거절하면 그다음은 어찌 하는 게 좋을지 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은월은 겉으로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유지한 채 답했다.
“네―”
걸화가 씨익 웃었다.
며칠 뒤, 은월이 걸화를 데리러 다시 찾아왔다.
교준은 며칠째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걸화를 혼자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교준 대협! 걱정 마세요. 은월 소저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그렇지요. 소저? 그러니 대협이 같이 갈 필요가 없잖아요! 그쵸?”
걸화가 은월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물론 오래전에 잠시 본 것이 고작이지만, 그때부터 알고 있는 건 맞는 얘기지 뭐… 그러니 얼른 그렇다고 대답해요. 얼른!!’
눈치도 빠르고 분위기 파악에도 능한 은월이 천연스럽게 말했다.
“의원님과 저는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습니다. 호위라면 제게도 많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인들끼리 회포를 풀 시간이 필요하니 이해해 주십시오.”
은월이 교준을 달래듯 말했다.
“으흠…….”
교준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걸화도 은월도 저렇게 말하는데 계속 함께 가겠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의원은 수일 내로 당도할 겁니다.”
은월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교준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미령과 거지들은 혹시라도 걸화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영과 성소는 웃으며 걸화를 배웅했다.
걸화는 기대에 찬 얼굴로 은월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