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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92화 (192/230)

192화

“으억……!”

밖으로 나온 당시월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걸음을 멈추고,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자신이 누워있던 방문 밖에 그 더러운 악마 같은 놈들이 버글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결국 그놈들에게 잡혀 왔구나…….’

넓은 마당을 가득 메운 놈들을 바라보는 그의 몸은 굳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 할아버지 나오셨어요?”

놈들 틈에 쪼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나타나 당시월에게 말을 걸었다.

“……?”

당시월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여자아이와 놈들을 번갈아 보았다.

“뭐 필요하세요? 저한테 말씀하세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앞치마를 맨 여인이 다가와서 말했다.

“……?”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은 당시월은 최대한 놈들이 없는 방향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얇은 옷만 걸치고 맨발로 꽁꽁 언 바닥을 밟아나갔지만, 추위 따위는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저 저놈들에게서 도망을 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 어어?”

뒤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고 마당에 있던 놈들이 우르르 자신을 쫓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시월은 놈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달렸다.

“헉…….”

그놈들이 사는 마을인지, 그 집 밖 곳곳에 구질구질한 놈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저 몸으로 어딜 가려구, 잡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마을 여기저기 있던 놈들이 우르르 달려와 당시월의 앞을 막아섰다.

도망갈 틈을 찾아 앞뒤로 시선을 돌리는 당시월은 또다시 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습관적으로 소매를 뒤지던 당시월은 당황했다. 갈아 입혀진 옷에는 소매고 앞섶이고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독이며 비수가 하나도 없었다.

놈들을 노려보며 출수할 자세를 잡고 내공을 돌리려던 당시월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 자신의 단전을 인식하며 절망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앞에서 한 무리의 녀석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곧 뒤에서도 그를 덮쳐왔다.

워낙 많은 놈들이 한꺼번에 에워싸는 통에 금방 잡힌 당시월은, 잡혀서도 발버둥을 쳐댔다.

그저 힘으로 버둥거리고 있던 당시월에게 누군가가 혈 자리를 눌러 잠재웠다.

의식이 사라져가는 당시월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얼마나 지났을까?

따뜻한 방에서 다시 눈을 뜬 당시월은 옆에 자리한 걸화와 교준을 보고 화들짝 놀라, 그들이 있는 반대편 벽으로 물러나며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어르신, 진정하세요.”

걸화가 양 손바닥을 펼쳐 당시월 쪽으로 내밀어 보이며 그의 감정을 가라앉히려 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당시월이 경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는 진료소이고 저는 이곳 의원입니다.”

걸화가 적대감을 보이는 당시월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흥! 이 문 밖에 있는 놈들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거짓이냐!”

당시월이 매섭게 말했다.

“문밖에? 밖에? 거지들요? 그분들이 마음에 안 드세요? 그분들이 약초 캐러 갔다가 어르신을 구해온 건데 그러시면 안 되죠…….”

침착하게 답하던 걸화가 말끝을 흐렸다.

“거지? 진료소라더니 그 많은 거지들은 어찌 설명할 게냐!”

“여기는 거지촌에 있는 진료소이고, 그분들은 저희 가족입니다.”

걸화의 말에도 당시월은 여전히 걸화와 그녀가 걱정되어 따라 들어온 교준을 노려보았다.

“여기는 안전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자꾸 그렇게 흥분하시면 안 돼요. 손상된 장기가 한둘이 아닌데.”

걸화의 말에 당시월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단전을 내려다보았다.

쓰러지기 전, 내공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다시 내공을 움직여보려던 당시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르신! 어르신! 진정하세요. 자꾸 그렇게 억지로 움직이면 상태가 더 나빠집니다.”

걸화가 내공을 써보려는 당시월을 말리며 말했다.

‘평생 모은 내공이…….’

벽에 붙어서 서 있던 당시월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내공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고, 아랫배는 뭔가를 덧대어 깨끗한 천으로 싸여있었다.

밖에 버글대는 것들이 그 악귀 같은 놈들이건, 거지들이건 자신은 그들을 피해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걸화와 교준을 한껏 경계하던 당시월의 표정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이 변했다.

“…약 드세요.”

걸화가 조심스럽게 진한 갈색의 탕약이 담긴 약사발을 내밀었다.

당시월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걸화를 한번 흘겨보고는 체념한 듯 그것을 받아 들이켰다. 그리고 이부자리가 깔린 곳에 드러누웠다.

걸화와 교준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당시월은 무겁게 눈을 내리감았다.

* * *

며칠째 뿌연 잿빛을 띠던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꽃은 제 길을 잃고 담벼락과 건물 벽에 부딪혀 얼어갔다.

진료소 마당 담 옆으로 지어놓은 커다란 움막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한가운데 바닥을 파내고 작게 불을 피우고 있는 움막에는 제법 훈기가 일었다.

처음에는 며칠씩 굶은 거지들이 밥이나 얻어먹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작은 움막조차 가질 형편도 안 되는 거지들이 진료소에 눌러앉더니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지금 있는 진료소 초가집은 이들 모두를 수용하기에 턱없이 작았다.

교준과 몇몇 거지들은 움막 한쪽에 모여 날이 풀린 후 지을 별채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너덜너덜하게 헤어지고 구멍 난 옷에 천을 덧대어 누덕누덕 기웠다.

또 한곳에서는 짚으로 새끼줄을 꼬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새끼줄은 움막을 보수하고 거적을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였기에 언제나 필요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약초를 다듬고 있었다.

따뜻한 불가에 앉은 당시월이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허! 그게 아니라니깐, 합환피는 줄기의 껍질이 약이야. 그걸 그리 깎아내면 쓰나! 살살 흙만 털어내게.”

“그것은 뿌리에 독이 있으니 완전히 잘라내야 해! 그렇지, 그렇지.”

당시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초를 다듬고 있는 거지들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에헤헤헤, 할아버지!”

움막 한쪽에서 놀던 영영이 당시월에게 다가와 익숙하게 그의 무릎에 앉았다.

“에이그… 머리가 이게 무어냐? 빗! 빗을 가지고 오너라.”

당시월이 제멋대로 뒤엉킨 영영의 머리카락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침마다 어머니인 미령이 곱게 빗겨주어도 아무렇게나 뛰어놀다 보면 곧 흐트러져버렸다.

“네에!”

영영은 움막을 나가 미령과 오라비와 같은 쓰는 방에서 빗을 가지고 와 당시월에게 내밀었다.

성격 꼼꼼한 당시월은 영영의 머리를 다시금 깨끗하게 빗어 내렸다.

당시월이 거지촌 진료소에 든 지 달포가 넘어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거지촌 진료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커다란 움막에 바글바글한 거지들과 함께 말이다.

몸이 좋아지니 위급한 다른 환자를 위해 방을 비워줘야 했기에, 진료소에서 밥 축내는 거지들 틈에서 밥 먹고 잠자며 약초도 다듬고 있었다.

다행히 진료소 의원과 교준은 물론이고, 거지들도 당시월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존중해 주었다.

거기다 당시월은 독초뿐 아니라 약초의 종류와 효능, 손질법까지 꿰고 있었기에 진료소에서 제법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고 추워라…….”

커다란 움막의 입구는 이중으로 되어있었다. 그것을 들추고 들어온 거지 도치가 양손을 비비며 불가로 다가왔다.

“약초… 또 팔러 가려고? 이것도 제법 쏠쏠하지이?”

도치가 약초를 다듬는 거지들을 보며 말했다.

“진료소에 쓸 것 쓰고 남으면 파는 거고…….”

마강이 적당히 대꾸했다.

“이런 거 말고 내가 엄청난 돈벌이를 하나 들었단 말이야.”

도치가 은근한 목소리를 내며 약초를 다듬는 거지들 틈에 비집고 앉았다.

마강과 다른 거지들은 그 녀석이 여기저기 쏘다니며 이 소문 저 소문을 주워듣고 다니는 것에 익숙한 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게… 당가 알지? 당가? 그 독으로 사람 다 죽여버린다는 그 당가! 그 당가에 총관이 저기 두무산 너머 어디서 죽었대.”

영영의 조그만한 뒤통수를 쓰다듬던 당시월의 눈매가 순간, 매섭게 변했다.

당시월은 영영의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모든 신경은 말을 하는 도치에게 쏠렸다.

“근데 그 시신을 아직 못 찾았대, 시신만 찾아주면 돈을 엄청 준다더라. 다음에 약초 캐러 갈 때는 두무산 너머로 가자! 약초도 캐고 시신도 찾고 그 머시냐… 가재도 잡고… 그… 암튼 엄청 좋은 거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또 어디서 들었데?”

마강이 일 도울 생각은 안 하고 흰소리나 해대는 녀석의 말에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말 안되는 소리 아니라니깐. 내가 아는 개방 형님한테 들은 확실한 거야.”

“어이그. 그런 소리 듣고 다닐 시간 있으면 너도 약초나 좀 다듬어라.”

“에헤이! 내가 시신 찾아서 돈 많이 받으면 한턱낼게.”

도치는 말을 하며 한쪽 구석에 벌렁 드러누웠다.

당시월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할아버지! 머리 빗겨주세요~!”

영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빗을 들고 당시월 앞에 앉았다.

“아이쿠… 아가씨가 머리가 이게 뭐야.”

당시월은 조그마한 영영의 뒤통수를 쓰다듬고는 섬세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영감님! 이건 처음 보는 것이라 뽑아왔는데 이 풀도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거지 하나가 풀 한 뿌리를 당시월에게 내보이며 물었다.

약초와 산속의 풀에 대해서만큼은 바쁜 의원 대신 당시월에게 물어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만년청은 잘 쓰면 약이지만, 조금만 잘못 써도 오심이나 구토, 설사를 일으키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풀이야. 득보다 실이 많으니 멀리 갖다 버리게.”

“영감님! 약방 주인장이 이런 종이를 주던데 뭐라고 쓰여 있는 겁니까?”

마강이 약방에 약초를 팔고 받은 종이를 당시월에게 내밀었다.

“으흠…….”

당시월이 종이를 받아 눈으로 읽어 내렸다.

거기에는 어떤 약초를 얼마의 가격에 몇 뿌리를 구매했는지가 적혀있었지만, 까막눈인 마강에게는 그저 하얗고 까만 종이 쪼가리일 뿐이었다.

마강에게 영수증에 쓰인 내용을 알려준 당시월은 조용히 진료소를 나섰다.

상처 입은 장기들은 치료가 되었지만, 평생 모은 내공을 모두 잃었다.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무공을 쓸 수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은 당가의 사람이었다. 언제까지 거지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당시월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게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당가로 돌아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도치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이제는 확인을 해보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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