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걸화가 두침에게 준 환단은 영단이라고 하기보다는 몸속의 원기를 북돋아 기력과 정력을 강하게 만드는 일종의 보약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복용한 두침의 입을 거치며 대단한 영단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영단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먼. 나는 네가 조만간 초상 치를 거라고 해서 죽기 전에 얼굴이나 보러왔지. 솔직히 이리 생생할 줄은 몰랐구먼.”
“이놈의 시끼!! 멀쩡히 살아있는 나를 어디 황천으로 보내려고!! 허긴… 그 의원님이 아니면 꼼짝없이 저승사자를 따라갈 뻔했지.”
두침이 마송의 말에 버럭하다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리 대단한 의원이 왜 이런 거지촌에서 의원 노릇을 하는 게지?”
동정호 구석에서 거지들 몇을 거느리며, 나름 패거리를 가지고 있는 마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말이야, 내가 아는 거지 중에 그 의원을 아는 이가 있어.”
발이 넓다고 꽤나 자부하는 거지 초웅이었다.
초웅의 은근한 목소리에 두침과 마송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게… 내가 아는 형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이거 절대 비밀이다.”
잔뜩 뜸을 들이던 초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의원이 사실은 신의의 제자였데.”
“뭐? 어쩐지! 그러니 그게 예사 의술이 아니지!”
두침이 의술에 대해 아는 척하며, 걸화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왜 거지촌으로 왔다냐?”
마송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초웅이 얼굴을 두침과 마송에게 바짝 붙여 더욱 깊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신의에게 쫓겨났대.”
“정말? 그렇게 실력이 좋은데 어쩌다가?”
걸화를 걱정하는 두침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속이 탔다.
“그 의원이 그렇게 성질이 더럽고 술을 좋아한대. 술 먹고 하도 주정을 해대는 통에 쫓겨났다지 뭐야.”
초웅의 은근한 목소리에, 마송은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두침은 그 의원이 술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성질이 더럽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두들겨 맞은 거지들에 대한 소문은 동정호 인근 거지들 사이에서 파다했다.
그 괴팍한 성질에 동정호 거지들의 두수인 방천조차 손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두침은 초웅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웅의 말에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 의원의 실력이 그리 대단한 것도, 그런 실력을 가지고 거지촌에 든 것도 말이다.
입이 가벼운 거지들 덕분에 걸화의 소문은 점점 부풀어 중원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대단한 의술을 가졌고, 영단은 기똥차게 만들어 내는 데다가, 말 안 듣는 거지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의원이 동정호 인근 거지촌에 자리 잡았다고.
원래 신의의 제자였는데, 성질이 고약하고 허구한 날 술을 퍼마시는 통에 쫓겨났다고 말이다.
게다가, 그 영단을 먹으면 없던 내공도 생기고, 회춘을 한다느니, 반로환동이 된다느니…….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덧붙여졌다.
거지들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 * *
무림맹에 들렀다 돌아가는 연천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성한 나뭇잎과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신을 지키는 영친왕의 무력단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던 그들의 경호가 이젠 당연시되고 있었다.
마교 내에 넣어놓은 세력을 동원해서 상관량을 칠 방법을 모색 중이었지만, 연천은 정파에서 먼저 상관량을 없애버릴까 봐 불안했다.
상관량만은 백연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죽어야만 하는지를 똑똑히 가르쳐준 뒤에 처단해야 했다.
꼭 연천의 손으로 없애야 하는 놈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자 원흉인 그였으니.
무림맹에서는 마교의 상황을 파악해야 했고, 많은 문파들의 의견을 조율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급했다.
마차는 산 깊숙한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의 색은 더욱 짙어졌고, 풀은 억세며 빽빽한 녹음으로 인해 해가 거의 들지 않는 산길은 서늘하고 습했다.
마차가 천천히 멈추어 서자 연천의 뒤를 따르던 영친왕의 무력단도 움직임을 중지하고 울창한 산림 사이에 각자 몸을 숨겼다.
조용하고 은밀한 움직임은 자연과 동화되어 완전히 엄폐되었다.
연천은 시커먼 숲을 바라보며, 스승님과 함께 살던 당산이 떠올랐다.
이 산, 이곳에만 오면 늘 이는 감정이었다.
조만간 배가 나오고 덩치가 커다란 용림채 채주가 나와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고 보은상회 호위에게 통행세로 돈뭉치를 받고 나면 마차가 다시 출발할 것이다.
여기서 반 시진 정도 느릿하게 나아가면, 나무의 키가 작아지고 해가 많이 드는 들판이 나왔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에 눅눅한 기분마저 바싹 말라버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솟아나곤 했다.
연천은 어서 이 시커멓고, 꿉꿉한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오늘따라 채주의 동작이 유난히 굼뜬 것이 빨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창밖의 어두운 숲속에 스승님의 얼굴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관량의 모습이 떠올랐다.
슈우욱 쿠억―
쇠붙이가 긁히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울렁거렸다.
창문 옆 마차 벽면에, 끝이 날카로운 화살이 박힌 것이다.
보은상회 호위들이 마차를 에워싸고,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미리 준비된 용림채 궁수들의 철전은 보은상회 호위의 검을 뚫고 커다란 마차 옆구리에 콱콱 박혔다.
연천은 몸을 마차 한가운데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채주를 중심으로 용림채 산적들이 보은상회 마차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멀리 자리 잡은 궁수들은 쉬지 않고 활을 쏘아댔다.
날카로운 활촉이 박히기는 했지만, 활은 단단한 마차를 완전히 뚫지 못했다.
연천은 창문 통과해서 들어오는 화살을 고개를 돌려 가볍게 피했다.
숲 곳곳에 숨어 있던 영친왕의 무력단이 날아올라 용림채 산적들을 포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궁수들이 하나씩 쓰러지며, 날아오는 화살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으흠…….”
연천이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용림채는 물론이고 녹림 전체에 보은상회가 내는 통행료가 얼만데 산적들에게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보은상회를, 그것도 가주가 탄 마차를 공격한단 말인가?’
연천은 무력단에 쓰러져가는 산적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시진 후, 보은상회의 마차는 햇살이 반짝이는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화살을 뽑아낸 자리로 들이친 햇발이 마차 내부에 여러 개의 사선을 그어댔다.
오늘만큼은 따뜻하고 선명한 빛도, 반짝이는 풀잎도 연천의 복잡한 생각을 완전히 걷어주지 못했다.
채주에게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다.
녹림 윗선에서 보은상회 가주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밖에.
‘녹림에서 대체 왜?’
연천의 정체를 들켰다고 해도 녹림에서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녹림 윗선 누군가가 연천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연천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낼 수가 없었다.
* * *
퍼억―!
녹림의 총채주 호령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통나무를 깎아 만든 반질반질한 나무 탁자에 호령의 주먹이 박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어후우!!”
여전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호령이 허공을 향해 사자후를 터트렸다.
상황을 보고하던 손시량은 눈을 질끈 감고 그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손시량이 호령을 옆에서 보필한 것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갔다.
워낙 성질이 급하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오늘처럼 물건을 부수고 사자후를 터트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아악!!”
호령은 악을 쓰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시량이 불안한 얼굴로 호령을 쳐다보다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호령의 시뻘건 얼굴은 한참이 지나서야 가라앉았지만, 사납게 올라간 눈에는 여전히 분노가 이글거렸다.
“보은상회 가주를 병신으로 만들라고 의뢰한 그놈이 누구인지 찾아내!!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찾아! 당장!!”
호령은 말을 끝내고도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녹림에 보은상회 가주를 습격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을 때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은상회는 중원 전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상회였기에, 보은상회에서 녹림으로 들어오는 통행료는 무시하지 못했다.
한데 의뢰자가 제시하는 돈도 만만치 않게 컸다.
의뢰를 거절하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 더 이익이 큰지 재어 보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보은상회 가주가 이동할 때 데리고 다니는 인원이 많지는 않았다.
조용히 그 모두를 없애버리고 모른 척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가주가 없어도 잘 돌아가던 보은상회에서는 가주를 새로 뽑든 어쩌든 상회는 계속 유지할 것이고, 의뢰에 대한 돈은 돈대로 벌 수 있으니 말이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봐도 남는 장사를 할 기회였다.
한데, 보은상회 가주를 치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매복하고 있던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나타나서 산채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관군들이 쳐들어와서 쑥대밭이 된 산채 인근에 산적의 씨를 말리고 가버린 것 아닌가.
이건 누군가가 관군을 등에 업고 녹림을 위협한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 왜 녹림의 세를 줄이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어영부영 그놈에게 휘말렸다가는 녹림의 존폐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 * *
며칠 뒤.
손시량의 보고를 듣는 호령의 꽉 쥔 주먹에서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우드득―
“음!”
손시량은 목을 한번 가다듬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 번 확인했지만, 보은상회 가주를 없애라고 의뢰한 놈은 당가의 총관 당시월이 확실합니다.”
“당가가 왜!! 우리가 당가에 뭘 잘못했다고!! 우리 애들 중에 당가에 원한을 산 놈이 있어?”
호령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당가가 아니라, 총관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혼자서? 그놈을 당장 요절을 내버릴 테다!!”
호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정하십시오! 당가입니다. 함부로 나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손시량이 침착하게 호령을 말렸다.
“그럼 그놈을 가만히 두자는 게야? 당장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을!”
흥분한 호령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우리가 직접 나서면 위험합니다. 믿을 만한 곳에 의뢰하는 게 좋습니다. 값은 비싸지만, 경험이나 실력도 그렇고 뒷마무리까지 확실히 하려면 살막만 한 곳이 없지요.”
손시량의 말에 호령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막 말고… 광사연에 연락을 넣어.”
“과, 광사연 말씀이십니까……?”
손시량이 선뜻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
호령이 단호한 눈빛으로 손시량을 쏘아보았다.
“…네, 연락하겠습니다.”
손시량이 망설이다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