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보은상회의 마차에 올라탄 연천은 허물어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곧 정마대전이 있을 것이다.
정파에서 십만대산으로 쳐들어간다면 상관량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절대 그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그것은 상관량이라는 원수 놈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겠다는 연천의 마음이고, 정파로부터 마교를 지켜서 혈영천마가 있었던 그때처럼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모충일과 화칙의 마음이었다.
연천도 모충일도 화칙도 모두 마음이 바빴다.
보은장으로 가는 길에 식당에 들어서도 연천은 자신의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가주님! 생각이 많으신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셔야지요. 그리 드시면 몸 상합니다.”
허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 알았다. 잘 먹으마. 너도 많이 먹거라.”
연천이 어두운 표정을 풀고 말했다.
“저야 잘 먹고 있습죠.”
허성이 씩 웃었다.
연천도 허성에게 작게 미소를 보여주고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을 집는 연천을 보고 허성도 제대로 식사를 시작했다.
스승님과 둘이 살면서 하루 종일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해 먹던 음식에 비해 보은장에서 먹는 것과 하는 일은 비교도 되지 않게 편하고 좋았다.
연천과 함께 다니며 식당에서 먹는 음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성은 잘 튀겨진 생선살을 발라 부지런히 입속으로 넣었다.
그때, 누군가 허성과 연천이 앉은 자리 옆을 지나가다 비틀대는 것이 아닌가.
“어! 어어!!”
허성이 놀라서 젓가락을 든 채로 넘어지려는 사람을 잡아서 바로 세웠다.
“하아… 감사합니다.”
허성이 넘어지지 않게 잡아준 사람이 똑바로 서서 인사했다.
“…….”
허성은 그 사람이 무림맹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노승 중 한 명이라는데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운상대사에게 말을 건넨 것은 연천이었다.
“아이고―! 보은상회 가주님 아니십니까? 늙으면 다리에 힘도 없습니다. 덕분에 저는 괜찮습니다.”
운상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연천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몇 걸음을 옮기던 운상대사가 다시 그들의 자리로 돌아왔다.
“가주님!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식사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리하시지요.”
연천이 마지못해 답했다. 안면도 있는 소림의 승이 밥 먹는 중에 와서 같이 먹자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
허성은 꺼림한 얼굴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두 승려를 바라보았다.
연천과 허성 사이에 자리한 두 노승은 편안한 얼굴로 연천과 허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소승은 이번 무림맹 회의에 소림의 대표로 오게 된 운상이라 합니다.”
운상대사가 자리에 앉아 새삼스럽게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도원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보은장에서 가주님을 뵌 적이 있지요.”
수일검의 일이 있었던 때에 보은장에 초대되었던 도원대사가 말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 시종이 지금 연천 앞에 있는 자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운상대사도 그 시종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보은상회 가주 백연천입니다.”
상대가 자신을 소개하니 연천도 말했다.
운상대사와 도원대사는 고개를 돌려 허성을 쳐다보았다. 이제 너의 차례이니 어서 너를 소개하라는 눈으로 말이다.
일개 시종이 뭔 이름을 말할 필요가 있나 싶어 가만히 있던 허성은 두 노승의 눈빛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허성이라고 합니다. 가주님의 시종입니다.”
“가주의 시종이라… 언제부터 시종 일을 하셨소?”
운상대사가 허성에게 물었다.
“네에?”
세상에 시종에게 언제부터 시종이었는지 물을 것이 무엇인가.
허성은 생각지 못한 질문에 연천을 쳐다보았다.
“…….”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이 허성만을 바라보고 있는 두 노승을 연천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허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묻는 대로 답하라고.
“1년이 좀 못 되었습니다…….”
허성이 답했다.
“그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셨소?”
운상대사의 물음에 허성은 이번에도 연천에게 허락의 눈빛을 보냈다.
연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집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으흠…….”
운상대사가 묘한 신음을 흘렸다.
“대사님! 식사가 다 식었습니다. 음식을 다시 시켜야겠군요.”
연천의 말에 운상대사가 생각에서 깨어나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럽시다, 그럽시다.”
그들은 다시 음식을 주문해 식사를 시작했다.
허성은 자신이 젓가락을 움직이는 손과 음식을 씹는 입, 씹어 삼키는 목과 깜빡이는 눈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바라보는 두 노승 때문에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불편했다.
식사를 끝내고 두 승려에게 적당히 인사한 허성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 넘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비싼 음식들이 가슴을 꽉 막아 답답했다.
다음 날 묵은 객잔 마당에서 또다시 두 노승을 맞닥뜨린 허성은 그들이 자신들을 쫓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객잔은 무림맹에서 소림의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이었다.
허성이 껄끄러운 표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두 명의 승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시주! 이리 또 뵙는군요. 우리가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하하하하.”
운상대사가 입을 벌려 웃으며 말했다.
“네…….”
허성이 작게 답하고 그를 지나치려 하자, 운상대사가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가주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아… 곧 나오실 겁니다…….”
“그렇군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운상대사가 갑자기 허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허성이 당황해하며 운상대사가 내지른 오른손을 자신의 왼팔로 막았다. 운상대사는 허성이 그의 팔을 막을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쪽 팔로 가격했으나 허성이 이번에도 막더니 다시 공격해오는 운상대사의 손을 두 손으로 모아 잡고 비틀어서 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운상대사는 멈추지 않고 속도와 강도를 높여 허성의 가슴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스님… 이, 이러지 마십시오…….”
허성은 더듬거리며 말을 했지만 전박을 세워 운상대사의 공격을 모조리 방어하다가, 양쪽 전박을 교차해서 운상의 손을 누르며 그를 밀어냈다.
객잔 마당으로 나오던 연천은 화려한 손놀림으로 운상대사의 공격을 막아내는 허성의 움직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운상대사의 팔을 슬쩍 잡았다가 손목을 돌리며 밀어내고, 밀어낸 손을 그대로 감아서 틀며 운상대사의 새로운 공격을 흘리는 허성의 움직임은 빨랐다.
운상대사가 다리를 쭉 뻗어 허성이 서 있는 바닥을 훑으니, 허성이 다리를 양옆으로 쫙 벌리며 어른의 가슴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연천은 허성이 무공을 수련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천에게 했던 말과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무공을 배운 적 없다던 허성의 말이 거짓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음… 무공을 배우는지도 모르고 익혔단 말인가…….’
연천이 혼자 주억거렸다.
잠시 후, 손을 내린 운상대사가 허성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림의 육합권, 대금강권, 반선수, 수리건곤! 더 읊어야 되겠느냐?”
“에?”
허성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소림의 무공을 어디서 배웠느냐?”
운상대사의 표정은 근엄하게 변해 있었다.
“제가 무슨 무공을 배웠다고 그러십니까? 스님께서 공격하시니 그저 피한 것이지요…….”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도 거짓을 고하는 게야?”
운상대사의 울림 큰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저는… 그냥…….”
“어디서 소림의 무공을 훔친 것이야!!”
운상대사가 매서운 목소리로 허성에게 호통을 쳤다.
“…….”
허성은 곧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연천이 알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허성 옆으로 다가가 운상대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아이의 스승이 은수골에 사는 취한이라는 자입니다!”
연천의 단호한 그 말에 운상대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운상대사는 그 취한이라는 자가 금월대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무표정하게 운상대사를 바라보던 연천이 몸을 돌렸다.
“가자!”
허성은 운상대사를 불편한 얼굴로 쳐다보곤 연천의 뒤를 따랐다.
* * *
무림맹 회의를 끝내고 당가에 도착한 당시월은 가주에게 회의 내용을 보고했다.
몸을 씻고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당시월이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그놈이야. 내가 그놈을 어찌 잊겠어… 사기꾼 같은 놈.”
그는 무림맹 회의에 나타났던 보은상회 가주를 생각하며, 오래전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준 그놈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의 실력과 당가와 당가의 독을 모욕하던 놈!
가주를 어찌 구워삶아 호형호제하던 놈!
그날 그놈에게 머리를 굽히며 사과했던 그 수모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제깟 놈이 가주? 하! 내 절대 그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아무도 없는 방에 당시월이 이를 가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 * *
햇살 좋은 날, 흙바닥에 퍼질러 앉은 두침의 목소리는 높았다.
멧돼지에게 들이받혀 몇 달을 누워있다가 겨우 움직이게 되었어도, 몸에 힘도 기운도 하나도 없었다.
뒷간에 갈 때도 부봉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몇 걸음씩 떼는 것이 고작이었다.
살아난 것은 좋았지만, 이대로 움막에 처박혀서 꼼짝 못 하는 것은 아닌지 무섭기까지 했다.
한데, 며칠 전 의원이 주고 간 환단을 먹었더니, 몸에 힘이 불끈불끈 솟는 것이 몇 달 동안 기운 없던 아랫도리가 아침마다 빳빳이 고개를 들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죽다 살아난 두침은 따뜻한 햇볕도, 두침이 다쳤다는 소식에 병문안을 왔다가 함께 수다를 떨어대는 거지들도 사랑스러웠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웠다.
특히, 자신을 살려준 의원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그러니깐 그 의원님이 의술 실력도 그렇게나 대단하지만, 특히 환단! 아니, 영단이지! 영단! 그거는 어찌나 잘 만드는지. 나 봐봐! 꼼짝도 못 하고 겨우 몇 발짝씩 움직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벌떡 일어났잖아!”
두침의 기분 좋은 목소리는 높고 컸다.
힘없이 빌빌거리던 두침은 걸화의 약 덕분에 정신도 또렷해지고 기운도 났다.
그래서, 자신을 살려준 의원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