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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86화 (186/230)

186화

【일렁이는 바람】

진료소 입구로 고개를 돌리던 걸화가 인상을 팍 구겼다.

두침이 부봉의 부축을 받아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멧돼지에게 들이받혀 사경을 헤매던 두침은 걸화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

몸 여기저기가 부러지고 어긋났던 뼈도 제자리에 잘 붙었고, 내상도 괜찮아졌다.

단지, 몇 달을 누워만 있어서 기운이 없고 움직이기가 힘들기는 했다.

옆에 있던 거지의 부축을 받아 평상 한편에 앉는 두침에게 걸화가 버럭 성질을 냈다.

“아니! 기운도 없으면서 여긴 왜 왔어요?”

저 꼴도 보기 싫은 원수 놈은 살려줬으면 곱게 살면 되지 여기는 왜 찾아와서 성질을 긁어대는 건지 원.

“의원님께서 살살 움직여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운동 삼아 왔습죠.”

두침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뒷간 가는 것조차 버거운 두침이었지만, 의원에게 고마워 나름 있는 힘, 없는 힘, 부봉의 힘까지 끌어모아 겨우 진료소까지 온 것이었다.

“운동을 왜 여기까지 와서 해요? 가요! 가! 가서 쉬어요!”

걸화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휴우… 조금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지금 일어설 기운도 없어요.”

두침이 죽는소리를 해댔다.

“아! 기운도 없으면서 예까지는 왜 와가지고! 돌아가 있어요! 내 며칠 뒤에 기운 나는 환단이라도 만들어 갈 테니!!”

‘꼴 보기 싫은 놈!’

걸화가 짜증스럽게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무림맹의 회의실에 든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현섭은 먼저 와서 앉아 있는 개방의 방주 배천상을 불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 똑 부러지고 지금껏 아비 말에 거역해 본 적이 없는 고명딸이 개방의 둘째 아들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혼담을 넣어달라고 하지 않겠는가?

혼담이 들어와도 거절해야 할 마당에 이쪽에서 혼담을 넣어달라고 하다니.

대체 저 개방 방주의 자식이 무슨 감언이설로 여식, 남궁소천을 꾀어낸 것인지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 둘째 아들이라는 놈이 눈에 뜨이면 당장 면상을 갈겨주고 싶었다.

안 봐도 뻔하지, 사기꾼 같은 놈이 뭔 속임수를 써서 순진한 소천을 부추겼을 게다.

언감생심 거지 놈이 어디 남궁세가 여식을 넘본다는 말인가.

남궁현섭은 이번 기회에 확실히 못을 박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쾌한 얼굴을 최대한 숨기고 천상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방주! 오랜만이외다.”

남궁현섭이 천상에게 인사했다.

“가주도 오랜만이오. 그간 잘 계셨소?”

천상의 천연한 인사에 눌렀던 화가 치미는 남궁현섭이었다.

“뭐… 잘 있었소. 여식에게 혼담이 이어지는 통에 바빴다면 바빴지만.”

남궁현섭이 슬그머니 소천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 여식 말이오? 나도 소문은 들었소. 그리 곱고 영리하다고 칭찬이 자자하더구먼. 가주가 부럽소.”

천상은 걸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여식이 곱고 영리하고 그런 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집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집을 나가서 거지촌에서 의원을 하는 걸화를 생각하면 말이다.

“으흠… 뭐… 워낙 이름 있는 가문에서 혼담이 쏟아지니 내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오. 방주께는 어디 혼담이 들어온 곳이라도 있소?”

남궁현섭이 의뭉스럽게 물었다.

걸화를 떠올리며 우울하던 천상은, 남궁현섭의 물음에 더욱 서글퍼졌다.

혼담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집에만 있어도 감사한 일이지…….

천상의 어두운 얼굴에 남궁현섭은 득의양양했다.

그리고 속으로 천상을 비웃었다.

‘거지에게 혼담 같은 것이 들어올 리가 없지.’

천상은 은연중에 나타난 남궁현섭의 표정에 기분이 나빴다.

자신도 뭐라도 자랑하고 싶었다.

“으흠… 우리도 얼마 전에 혼담이 들어왔소. 둘째 아들에게 말이지.”

천상이 어깨를 쭉 펴고 말했다.

남궁현섭이 슬그머니 소조했다.

‘대체 거지에게 혼담을 넣는 가문은 뭐 하는 집구석이라는 말인가? 잠깐! 둘째 아들? 그 둘째 아들이라는 놈이 바로 그놈 아닌가? 소천을 꾀어낸 그놈!’

“그것 잘 되었소. 방주께서 조만간 며느리를 보겠구려. 대체 어느 집안이오?”

남궁현섭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가문이면 어떠랴?

그놈이 장가를 가버려서 소천이 더 이상 개방 둘째 놈 타령을 안 하면 그만이지.

“음!!”

천상은 목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잡고는 말을 꺼냈다.

“영친왕께서 직접 걸음하시어 군주의 혼담을 넣으셨소.”

뭐, 거절해달라고 한 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천상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뭐? 군주? 영친왕이 개방에 군주의 혼담을 넣었다고?”

남궁현섭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렇소.”

천상이 의뭉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군주와 걸윤이 결혼할 일은 없겠지만 그것이 거짓도 아니고 남궁현섭의 놀란 얼굴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

남궁현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그 둘째 놈에게 군주가…….’

남궁현섭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던 천상은 이어 회의실로 들어오는 다른 가문의 가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는 천상의 얼굴이 유난히 밝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림맹의 대회의실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여러 문파의 대표들로 인해 시끌시끌했다.

서로 안부를 묻고 맹주가 무슨 일로 모든 문파를 불러들였는지 추측을 하는 중에 동떨어진 세 개의 문파가 있었다.

바로 화산과 소림, 무당이었다.

화산의 장문인 운천은 자신을 향해 쏘아대는 이들의 시선을 모른 척,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노골적으로 쳐다보는지 낯이 다 따끔거렸다.

보은장에서 수일검이 저지른 일이 밝혀진 이후, 화산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점포를 봐주던 상회들이 손을 떼는 바람에 매달 들어오던 돈이 들어오지 않거나, 그들의 속가제자들이 운영하는 무관들이 줄줄이 화산의 간판을 내리거나, 화산이 있는 섬서에 들어 온 낭인들이 살기를 뿜어대는 것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운천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화산 내에서 수일검을 내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화산의 제자들끼리 다투고 척을 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화산 문밖으로 나가기도 힘든 상황에서, 화산 내에 갇혀서 자신들끼리 싸워댔다.

운천의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가 깊이 묻어둔 것들을 깨우고 있었다.

‘정말 이 일이 수일검 한 사람만의 잘못이고 나머지 제자들은 아무런 잘못 없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

“허…….”

수백 년을 쌓아온 화산의 모든 것이, 십수 년 동안 누렸던 영웅의 문파라는 거짓 이름과 뒤섞여 덧없게만 느껴졌다.

다 떠나서 수일검의 만행에 자신조차도 떳떳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생활해 온 수일검 운호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정파의 제자임에도, 정도보다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빠른 길로 가기를 원했고, 능력에 비해 욕심이 과했다.

운호가 혈영천마를 없애고 돌아왔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다.

그의 실력에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세상 사람들이 믿더니, 어느 순간 운호를 영웅이라 일컬으며 추앙하기 시작했다.

운호는 신이 나서 혈영천마를 없앤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의 이야기 속 혈영천마는 운호의 매화검법에 피를 흘리고, 태청강기에 쓰러졌다.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운천과 장로들은 운호가 혈영천마를 없앴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화산을 위해 굳이 캐묻지 않았고 의심스러운 점투성이인 일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 대신, 입 가벼운 운호를 화산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방법을 강구했다.

자신도,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운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운호가 진짜 영웅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영웅의 문파라는 그 이름을 포기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화산을 우러러보는 것이 좋아 모른 척 한 것이면서 이제 와서 자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고 모두 운호의 탓이라고 우겨댈 수 있겠는가?

운호의 그 거짓 덕분에 영웅의 문파라 칭송받고 어깨에 힘주고 산,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은 볼 것도 없었다.

그런 생각들을 할 때면 운천, 자신의 양심부터 무언가가 찔러댔다.

그것은 문파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모른 척 덮어두었던 감정이 십수 년 동안 곪고 곪아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고, 운호가 혈영천마를 제거했다는 거짓을 믿는 척했던 죄책감이었다.

화산의 모든 제자들이 그것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영웅 문파의 제자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수일검만의 잘못이라고?

여전히 양심을 속이고, 깨끗한 척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운천의 가슴 한편이 불편해져 왔다.

곪고 썩어 문드러진 가슴 속에 도덕적 의식이라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 이제야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 * *

무림맹주 여송의 등장에, 시끄럽던 회의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웅성대는 말소리와 자신을 향한 매운 눈초리에, 운천의 머릿속에서 중구난방으로 떠오르던 생각들이 갑작스러운 고요와 함께 딱 멈추어 버렸다.

운천은 맹주를 향해 예를 갖추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 틈에 끼여 슬그머니 일어났다.

모든 이들이 다시 자리에 앉자, 주위를 둘러보던 여송이 입을 열었다.

“모두 예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신 것은 더 이상 마교주 상관량의 악행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입니다. 그놈은 정도를 걷고 있던 정파의 제자들을 속여 혈영천마를 제거하는 데 이용하고, 무고한 이들을 학살한 천하의 악인입니다.”

여송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리한 문파의 대표,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상관량이 정파의 제자를 속여 이용했다고, 영웅삼존의 잘못을 은근슬쩍 상관량에서 떠넘기고 있었다.

자신에게 향해 있는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른 도리를 추구하는 정파의 제자로서 좌시할 수 없기에 악인 상관량을 벌하려 합니다. 정도를 따르는 문파들께 정의를 위해 악인을 처벌하는데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여송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무림맹주 여송의 그럴듯한 이야기는 마교와 전쟁을 치르자는 말이었다.

말이 쉽지, 엄청난 희생이 발생할 것이다.

정의도 좋고 정도도 좋지만, 평화를 깨고 싶지 않고 자신의 문파 제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쉬이 여송의 말에 지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맹주의 말에 반대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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