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
영친왕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천상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상대가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일수록 조용히,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중요했다.
어서 말을 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천상은 영친왕의 얼굴을 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으흠…….”
영친왕이 목을 가다듬었다.
“…….”
천상은 여전히 기다렸다.
“내가 자네에게… 의뢰할 일이 있네.”
“…….”
영친왕의 묵직한 목소리에 천상은 귀를 기울였다.
지난번처럼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운 일이라면 예까지 직접 찾아와서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게 이해가 되기는 했다.
“자네 자식 중에 배걸윤이라는 아이가 있다지?”
영친왕이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물었다.
천상의 미간이 좁아졌다.
‘영친왕이 갑자기 그 아이는 왜?’
“네, 제 둘째 자식입니다.”
천상이 덤덤한 척 답했다.
“으흠…….”
목을 가다듬고 다시금 뜸을 들이던 영친왕이 한참 만에 말을 내뱉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혼담을 넣으러 왔네.”
“네에?”
내내 담담한 척하던 천상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에 띄게 놀라고 있었다.
‘혼담? 영친왕이 걸윤이에게? 누구랑? 설마 군주?’
“그 혼담을 거절해주게. 이게 내 의뢰일세.”
영친왕이 과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절을요?”
천상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혼담에 대해 제대로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거절을 당해… 아니, 이쪽에서 거절하라고?
자신이 지금 영친왕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를 하긴 한 것인지 얼떨떨했다.
“이미 정혼자가 있다고 해도 좋고, 군주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렇다고 해도 좋네. 적당한 이유로 거절해주게.”
‘역시 군주구나…….’
천상은 군주를 며느리로 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꿈에라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일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천상은 자신이 영친왕의 말에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군주와 걸윤을 결혼시키겠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리하겠습니다. 이 일도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입니까?”
천상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은 아닐세, 그렇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필요는 없지만.”
혹여 군주가 이 일에 대해서 알아보면, 혼담을 넣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거지에게 혼담을 넣고 거절당한 것은 말할 수 없이 불쾌하고 기분 나빴지만, 거지를 사위로 들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말을 끝낸 영친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친왕의 볼일이 끝난 것이리라.
“살펴 가십시오.”
천상은 애써 담담한 척 영친왕에게 인사했다.
“그럼 의뢰한 일은 잘 처리해주시게.”
영친왕은 그 말을 남기고 개방 총타를 나섰다.
천상은 멍하니 영친왕의 행렬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 * *
걸화는 교준과 거지들이 캐어 온 약초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음… 좋아요! 우와! 이런 것까지 캐어 왔어요? 좋아 좋아! 그럼 이만큼은 진료소에서 쓰고 이건 가지세요.”
진료소에서 당분간 쓸 만큼의 약초를 옆으로 옮겨두고 나머지는 거지들에게 내밀며 말했다.
“네에? 에이… 저희가 약초를 가져다가 어디다 쓰겠습니까?”
장청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약방에 팔면 되죠.”
걸화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말에, 거지들이 그녀를 뻔히 쳐다보았다.
약초를 팔면 돈이 되는 것은 거지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걸 왜 주냐고?
진료소에 쓰고 남는 약초가 있으면 직접 하든 교준 대협을 시키든 팔아서 돈으로 만들면 되는 것을 왜 주냐고?
“그건 알지만… 그걸 왜 우리한테…….”
이해가 안 되는 마강의 목소리는 작았다.
거지들은 혼자 살지 않았다.
대부분 무리를 지어 살았고, 구걸을 해서 몇 푼이라도 얻으면 모조리 패거리 왕초에게 갖다 바쳐야 했다.
왕초는 동정호 거지의 두수인 방천에게 상납했다.
구걸한 것조차 갖지 못하고 바치는 판에,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들에게 어찌 생긴 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일일이 가르쳐서 캐낸 것을 왜 주냐는 말이다.
약초를 판 돈 중에 몇 푼 쥐여주면 감사하다고 받을 것이고, 안 줘도 맨날 공짜 밥 얻어먹는 처지니 뭐라 할 형편도 안 되는데.
“직접 캔 거니깐 가지는 게 맞죠. 진료소에 이만큼 준 것도 감사해요.”
걸화가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
거지들은 멍하니 걸화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키도 덩치도 조그마한 여인을 말이다.
거지들은 걸화가 내민 약초를 인근 약방으로 가져가 쭈뼛쭈뼛 내밀었다.
약방의 주인장은 거지들이 내놓은 것을 의심 가득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약초꾼들의 외관 또한 거지들 못지않게 구질구질하긴 했으나, 약초를 보는 눈만은 거지들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모르는 이의 눈에는 똑같이 생긴 두 개의 풀이지만 하나는 약이 되고 다른 하나는 독이 되는 일이 천지였다.
함부로 아무 풀이나 캐어 먹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약방 주인장은 그들이 가져온 약초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장청은 주인장이 하는 양을 보며 길게 하품을 했다.
마강은 목을 벅벅 긁으며 무료하게 기다렸다.
“으흠…….”
주인장은 잘못 섞여들어 간 풀 한 포기 없이, 깨끗하게 캐어낸 약초를 보며 떨떠름한 얼굴로 거지들을 보았다.
그중 몇 개는 꽤나 상품이 되는 물건들이었다.
주인장은 약초꾼들에게 주는 보통의 값으로 계산해서 거지들에게 내밀었다.
장청이 주춤거리며 돈을 받아들고는 주인장과 자신의 손에 놓인 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럼, 다음에도 부탁함세.”
주인장은 어서 가게에서 나가라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약초는 나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거지들이 캔 것이라고 꺼리는 이들이 있을까 봐 걱정도 되었다.
장청과 거지들은 주춤주춤 가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 쥐어보는 큰돈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정도의 돈이면 한동안 밥 굶을 걱정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구걸하지도 않고, 진료소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 필요도 없이 말이다.
다들 처음 쥐어보는 분에 넘치는 금전에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이 큰돈을 어떻게 나누고, 어디에다 쓸지 의논이 필요했다.
거지들은 약방 인근의 담벼락에 붙어서 수세미 같은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키가 작고 마른 거지의 말에 장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강은 손을 흔들어가며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과분한 돈을 앞에 두고 탐심 가득한 눈도, 욕심 어린 목소리도 없었다.
흥에 겨운 몸짓과 신이 난 표정뿐이었다.
그들의 의견은 비슷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리를 떼어 낸 거지들의 얼굴은 뭔가 시원하고 개운해 보였다.
그들은 얼마의 돈을 나누어 각자의 품에 챙겨 넣고 진료소로 향했다.
장청은 거지로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뱃속이 간질거렸다.
따뜻한 무언가가 뱃속에서 몽글몽글 솟아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마강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의 다른 거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렴풋이 웃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의 표정으로 보건데, 다들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진료소에 도착한 거지들은 각자 흩어졌다.
누구는 미령이 빨래하는 것을 도왔고, 누구는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
그리고 누구는 약초를 씻었고, 누구는 진료소 앞을 쓸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했다.
그리고 장청은 영영과 놀고 있는 교준에게 다가갔다.
“저기… 대협…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장청이 조심스레 교준을 불렀다.
교준은 진지한 얼굴의 장청을 쳐다보다, 성소를 불러 영영을 맡겼다.
“무슨 일입니까?”
교준이 전에 없던 장청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
장청은 머뭇거릴 뿐,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
교준은 장청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저, 저… 이거…….”
장청은 한참을 망설이다 약초를 판 돈의 대부분을 교준에게 내밀었다.
거지들이 나누어 가진 약간의 돈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말이다.
“이 돈은 뭡니까?”
교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약초 판 돈입니다요…….”
장청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에… 그러니깐…….”
장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돈을 주는 그의 표정은 공짜 밥을 얻어먹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구걸한 돈을 뺏기다시피 왕초한테 내기는 했지만, 자발적으로 누군가에게 돈을 줘 본 적이 없는 장청은 그것이 생각보다 부끄럽고 쑥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 밥값하고 치료비하고 뭐… 그런 겁니다. 꼭 갚는다고 했으니깐요…….”
장청은 돈을 교준의 손에 던지듯이 쥐여주고는 후다닥 진료소를 뛰쳐나갔다.
평생을 남이 적선해 주는 것에 의지해서 먹고살았다.
어디 가서 돈을 내어본 적도 없었고, 아무도 자신들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루 세끼를 챙겨 먹어 본 것은 손에 꼽혔고, 구걸이 안 되면 며칠씩 굶는 일도 허다했다.
한 푼이라도 생기면 왕초 몰래 숨겨 놓을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걸리면 죽도록 얻어맞았지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또 숨겼다.
그래봤자 철전 한푼 두푼에 불과했지만.
그런데, 가져본 적 없는 과분한 돈을 달라고 하지도 않는데 남에게 내어주다니…….
장청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항상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는 그 생각.
언젠가는 굶어 죽거나, 아파 죽을 것이라는 그 두려움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배고프면 진료소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고, 아프면 그 작고 성격 괄괄한 의원이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교준은 거지들이 참으로 염치없고 뻔뻔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는 곳에 와서, 돈도 없이 얻어먹고 치료도 받기 일쑤니 말이다.
하지만 장청이 부끄러워하며 내민 돈을 내려다보며 어쩌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체면이나 예의가 사치인 사람들도 있다고.
당장 며칠을 굶으면 그딴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약초를 캐러 나가는 거지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산나물도 캐오고, 작은 짐승들도 잡아 왔다.
그리고, 돈이 생기면 슬쩍 교준에게 내밀었다.
덕분에 진료소는 그럭저럭 큰 적자는 나지 않고 굴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