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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84화 (184/230)

184화

초정의 보고를 듣는 방천의 미간이 좁아졌다.

개방은 일반 거지들의 서열이 어떻든, 생활이 어떻든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지역 거지 두수에게 지시하면 그만이었다.

방천은 동정호 인근 전체 거지의 왕초, 즉 두수였다.

그 아래로 작은 거지 무리들의 왕초들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동정호의 모든 거지들은 방천 아래에 있었다.

비스듬하게 드러누운 방천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씰룩거렸다.

몇 달 전, 거지촌 인근에 진료소를 차린 의원이 슬금슬금 신경을 건드려댔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여인 하나 때문에 거지들의 기강이 점차 흐트러지고 있었다.

방천은 자신을 거스르는 놈들에게 구걸을 못 하게 만드는 벌을 주곤 했다.

그럼 꼼짝없이 굶을 수밖에 없으니, 거지들에게는 최고의 벌이었다.

한데, 요새는 진료소에 붙어 밥을 얻어먹으며, 구걸을 못 해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자신이 부르는데도 진료소에 약초를 캐러 가야 한다는 둥, 의원의 일을 도와야 한다는 둥 하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신고도 하지 않고 구걸하는 놈을 패주는 것도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됐다는 것 아닌가.

생각보다 문제가 더 심각했다.

계속 뒀다가는, 거지 놈들을 통솔하기 힘들어질 게 뻔했다.

방천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수하 놈들을 시켜서 진료소를 뒤집어 엎어버려?’

그렇게 하기에는 의원에게 붙은 거지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이쪽의 피해도 제법 될 것이다.

“으흠…….”

방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은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거지 놈들의 정신 상태가 빠르게 흐트러질 테니.

유명한 동정호 인근에는 유랑인도 무인도 많았다.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만큼 그들을 상대하는 상점과 상인, 호객꾼과 그에 이끌린 객, 소매치기나 사기꾼들로 언제나 복작복작했다.

몰린 인파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만들어냈다.

이미 다섯 개의 소분타가 있었지만, 그래도 개방의 동정호 분타주 왕하적과 부분타주 감륜은 바빴다.

몇 달 전에 두 개의 소분타를 더 만든 데다가, 최근에 총타에서 내려보낸 개방도의 숫자도 기대 이상으로 많았다.

왕하적은 최근 여유라는 것을 가지고 감륜과 이야기 중이었다.

그들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아가씨는 어쩌고 있다 하더냐?”

왕하적의 목소리는 낮았다.

걸화가 개방주의 여식이라는 것은 윗선과 총타를 자주 드나드는 이들만 아는 비밀이었기에.

“똑같습니다.”

감륜의 말에 왕하적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가까이서 그녀를 지켜야 할 것 같은데 개방도만 보면 쫓아내는 통에 그게 쉽지 않았다.

은신술이 뛰어난 녀석들을 붙여 놓아도 어찌나 귀신같아 찾아내는지, 개방도는 진료소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불안했다.

그때, 개방도 하나가 조용히 들어왔다.

“분타주님, 방천이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

왕하적이 짧게 말했다.

방천은 동정호 일대 일반 거지들의 총두수였다.

그가 동정호의 총두수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개방의 승인과도 같은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천은 종종 찾아와 동정호 거지들의 상황을 보고하기도 하고, 명절이면 술을 받아와서 분타주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두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지로 빌어먹고 살려면 무조건 개방에 잘 보여야 했다.

잠시 후, 방천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들어왔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빈손으로 오기 뭣해서 술을 좀 받아왔습죠.”

방천이 술 한 동이를 내려놓으며 비굴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야?”

대낮부터 술을 받아 온 방천에게 감륜은 얼른 본론부터 말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천의 긴 인사치레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하하, 부분타주님은 여전히 성격이 급하십니다.”

“…….”

방천의 웃는 얼굴에 대고, 감륜이 인상을 팍 썼다.

방천이 찔끔해서 몸을 움츠렸다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드립죠, 지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하.”

감륜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방천은 어색하게 웃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거지촌 인근에 진료소가 하나 생긴 것은 알고 계시지요?”

분타주와 부분타주가 모를 리가 없었다.

“…….”

감륜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으니 어서 할 이야기나 하라는 뜻이었다.

방천이 감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거지들을 치료하는 진료소가 생겨 잘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의원이 자꾸 저희의 규칙을 깨게 만들지 뭡니까? 그대로 뒀다가는 거지들을 통솔하기가 힘들 겁니다. 아무래도 의원을 쫓아내야 할 것 같은데…….”

“하하하하, 아하하하!”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던 분타주 왕하적이 껄껄 웃었다.

일개 거지 하나가, 개방주가 자기 자신보다 귀히 여기는 여식을 쫓아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분타주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총타에서 엄청난 수의 개방도를 동정호로 내려준 것도, 소분타의 수를 늘린 것도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한데, 일개 거지가?’

왕하적은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방천은 분타주가 왜 저리 웃어 재끼나 싶어 어리둥절해하면서,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부분타주 감륜은 얼굴을 구겼다.

분타주와 부분타주 외에 총타에 자주 드는 몇몇만이 그녀가 방주의 여식인 것을 알고 있었다.

걸화가 ‘아가씨’라고 부르면 질색을 하는 데다 그녀가 방주의 여식인 것을 알려서 좋을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기에 진료소 인근에 개방도를 보내 몰래 살피곤 했는데, 걸화가 귀신같이 찾아내서 쫓아버렸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료소를 드나드는 거지들에게 상황을 듣고, 거지들을 돕는 귀한 의원이니 도울 일이 있으면 성심을 다하고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왕하적과 감륜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 다쳤다가는 방주가 어찌 나올지 말이다.

“아휴… 내 오랜만에 참으로 웃긴 이야기를 들었더니 참기가 어렵구만, 이봐!”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던 왕하적이 정색하고 방천을 불렀다.

“네에! 네!”

방천이 바짝 긴장해서 분타주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분타주 왕하적이 의미가 정확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위협이었다.

노련한 짐승이 지금껏 감추고 있던 발톱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처럼, 왕하적이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방천의 목을 옥죄었다.

왕하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의원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했다가는 자네는 물론이고 나도 중원에 발붙이고 살기 어려워. 몸 성히 살고 싶거든 의원께서 시키는 대로 해. 의원께 불손한 눈길이라도 줬다가는 그날이 바로 네 놈 제삿날이 될 게야.”

그의 느릿한 목소리는 서늘했다.

방천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네… 네!”

아무리 눈치 없는 방천이라도 그 여인이 그저 일개 의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았으면 가 봐!”

왕하적의 말에 방천이 쭈뼛쭈뼛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바로 패거리들을 데리고 가서 진료소를 덮쳐버리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었던 생각이 떠오르며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 * *

오랜만에 성 밖으로 나온 영친왕의 얼굴은 언짢았다.

‘그냥 근처를 지나는 길에 들르는 거야. 그냥 잠깐만 가보는 거야. 왕자를 찾아준 일도 고맙고 해서…….’

영친왕이 혼자 주억거렸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찝찝하고 못마땅한 감정들이 들끓었다.

솟구치는 불쾌함을 꾹 눌러 내렸다.

때로는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게 부모의 일이었다.

개방 총타는 여전했다.

단지, 개방도의 수가 늘어났고 맡는 일의 양은 더 많아졌으며 천상보다 걸부가 일을 더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천상은 걸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강서에 소분타 두 개 더 만들었고, 올해 훈련이 끝난 개방도 대부분을 동정호로 보냈습니다.”

걸부의 말에 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걸화의 진료소 근처에 개방도는 얼씬도 못 하게 한답니다. 뭐… 일반 거지들에게 상황 파악을 하는 모양인데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걸부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걸화가 의원이라니 참…….”

천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걸화가 대견스러웠다.

그녀가 신의의 제자가 되긴 했지만, 중간에 그만두든지 쫓겨나든지 아무튼 진짜 의원이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독립해서 자신의 진료소까지 차렸다니…….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그냥 곱게 있다 시집이나 갔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이 여전히 천상의 마음 깊이 박혀 있었다.

“방주니임!!”

개방도 하나가 다급하게 천상을 부르며, 그의 집무실로 뛰어들었다.

걸화를 생각하던 천상은 표정을 바꾸어 집무실로 든 개방도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서두르는 게냐?”

걸부가 침착하게 물었다.

“영친왕이 총타로 오고 있답니다.”

들어온 거지가 헐떡이며 말했다.

“무어?”

천상이 되물었다.

“뭘 잘못 알았겠지. 영친왕이 이곳에 왜 와?”

걸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 마차가 이쪽으로 오기에 길을 잘못 든 줄 알고 물어봤더니, 글쎄 영친왕이 방주님을 만나러 오는 거라고 합니다. 벌써 총타로 올라오는 외길로 들어섰답니다.”

“…….”

“…….”

다급한 거지의 말에 걸부가 천상을 쳐다보았고, 천상은 미간을 좁혔다.

천상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은 영친왕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영친왕과 이리 둘이서만 보는 일은 이십 년도 전에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가슴에 문양이 그려진 아이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위해서였다.

당시, 영친왕은 그의 군사들로 왕자를 찾아다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해서 개방에 은밀히 일을 맡겼었다.

비록 아주 심하게 늦긴 했지만, 개방에서 그 아이를 찾아주었다.

의뢰를 맡은 지 이십 년도 더 지나서 말이다.

하지만, 그때 영친왕은 천상을 궁으로 불러들였지, 이렇게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전에 없던 영친왕의 행보에 천상의 내면에 긴장감이 일었다.

“영친왕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천상은 겉으로는 아닌 척 담담하게 말했다.

“으흠… 지난번 맡긴 일을 처리해 준 것은 참으로 고맙네. 내가 감사 인사도 못 했군.”

영친왕이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말했다.

“그게 저의 일인 것을요.”

천상이 대답하며, 영친왕을 살폈다.

이십 년이 지나서 찾아준 이가 영친왕에게 중하기는 했지만, 그저 사람 하나를 찾아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예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눈치 보는 일을 해 온 천상이기에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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