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걸화의 심부름을 온 거지, 부봉에게 그녀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들을 챙겨 보냈지만, 교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걸화가 있는 곳으로 갈 형편도 되지 못했다.
진료소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많았고, 환자들은 방에 누워 있었으며 돌보아야 할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걸화가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해 두고,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환자들은 돌려보냈다.
점심 먹은 정리를 하고, 환자들의 식사를 챙기고, 매일 약을 쓰는 환자들에게 같은 약을 달여주고, 피부에 이상이 있는 환자는 걸화가 사용하던 약물로 닦아 주었다.
장청와 마강에게 환자들의 저녁과 아이들을 부탁해 두고 먹을 것을 챙겨 걸화가 왕진간 곳으로 향했다.
벌써, 사위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거지촌에 자리 잡은 걸화와 염치라고는 없는 거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손에 물 마를 틈이 없었던 교준의 손은 무공을 익힐 때와는 다르게 거칠어져 있었다.
손가락에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휴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언제까지 밥이나 해대며 살아야 하는지 답답했다.
모충일의 눈에 들어 어린 나이에 살수로 훈련을 받았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독한 훈련을 받을 때도 이렇게 불만스럽지 않았다.
신의와 함께 며칠씩 험한 산길을 걸어도 힘든 줄 몰랐다.
하루 종일 거지들에게 밥과 빨래를 해대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말할 수 없이 못마땅했다.
교준은 답답한 마음으로 부봉이 알려줬던 다리 밑의 움막으로 들었다.
작은 호롱불을 밝히고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걸화는 교준이 들어온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소매와 앞섶에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 걸화의 눈에는 오로지 앞에 누운 환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시커먼 때가 켜켜이 껴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거지의 발을 아무렇지 않게 잡고 다리뼈를 맞추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깨끗한 걸화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환자를 보는 걸화의 눈빛은 진중했고, 손길은 찬찬하고 세밀했으며, 얼굴에 피가 튀어도 환자가 비명을 질러대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교준이 그녀 옆으로 다가가 이마를 따라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그녀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걸화가 점심도 먹지 못하고 나가서, 두침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거지촌의 모든 것이 잠든 후에도 계속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봉은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새 구석에 너부러졌다.
“후우…….”
거지촌에 어둠이 가장 깊어졌을 때 즈음, 걸화가 손을 멈추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목덜미를 벅적벅적 긁으며 움막을 나섰다.
교준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 교준 대협 언제 왔어요?”
걸화의 물음에 교준이 웃었다.
“좀 전에 왔습니다.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걸화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배고파요! 엄청!”
“손 씻으십시오. 만두를 좀 챙겨왔습니다. 식었지만 먹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만두라는 말에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그녀를 향해, 교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걸화는 게걸스럽게 만두를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천천히 드십시오. 체합니다.”
교준이 물을 내밀었다.
“느므 배가… 고파서…….”
걸화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교준은 입이 터지게 만두를 밀어 넣고, 대충 씹어 넘기고 있는 걸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당한 민가에 자리를 잡고, 신의의 제자라고 소문만 내면 돈 많고 예의 바르며 발도 씻고 사는 환자들이 몰려올 텐데…….’
거지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걸화의 얼굴은…….
“…행복합니까?”
걸화를 가만히 보고 있던 교준이 앞도 뒤도 없이 물었다.
“히…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거 같아서 너무 좋아요.”
걸화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입속에 씹다 만 만두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왜 하필 거지입니까?”
교준은 그 지저분한 꼴을 보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음… 돈 있는 사람이야 꼭 내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잖아요.”
걸화가 입에 만두를 잔뜩 넣고 입을 벌려 웃었다.
교준은 그 더럽고도 깨끗한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끝이 난 겁니까? 저랑 같이 돌아가세요.”
“못 가죠. 저리 뒀다가 상태가 심각해지면 어떻게 해요? 내상도 있어요. 장기를 보하는 약도 달여서 먹여야 해요. 대협 먼저 돌아가 있어요.”
걸화가 입 안 가득 찬 만두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네…….”
교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지촌에 들어온 후, 걸화가 하는 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교준은 그녀가 그러다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원 어디를 봐도 거지만 돌보는 의원은 없었다.
힘들고 돈도 되지 않았으며 명예나 성공 따위는 기대하기 힘들었기에.
하지만, 교준은 그녀가 앞으로도 돈 안 되는 환자들을 위한 의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가진 것 없는 환자를 향한 그녀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로 진료소로 돌아가는 교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지촌은 밤이 되면, 작은 빛줄기 하나 새어 나오는 곳 없이 고스란히 어둠에 잠겼다.
유난히 새까만 마을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작은 별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빛이 온전히 눈에 박혔다.
교준은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촌의 별빛만큼은 어떤 곳보다 맑고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 * *
교준은 매일 걸화의 식사를 챙겨 다리 밑의 움막으로 가져다주었다.
걸화는 두침이 의식을 차리고도, 이틀을 더 다리 밑에 있다가 진료소로 돌아왔다.
그녀가 점심을 포기하고 진료소를 나선 지 며칠 만이었다.
“의원님!!”
영영이 거지꼴이 된 걸화에게 안겼다.
“아이코!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걸화가 영영을 안아 들며 말했다.
삐쩍 말라 푸석푸석하던 영영은 걸화의 진료소에 든 후,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의원님 오셨어요?”
성소가 제법 어른스럽게 인사했다.
그 모습이 우스운 걸화가 성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의원님! 어서 오세요.”
영영과 성소의 어미, 미령이 부엌에서 나와 인사했다.
“움직여도 돼요?”
걸화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심각한 영양실조로 쓰러진 아이들의 어미는 걸화와 교준의 보살핌 덕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며칠 전부터는 부엌일도 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식사… 목욕물을 준비할게요. 의원님, 먼저 씻으세요.”
몸을 추스른 미령은 거지촌을 돌아다닌 여인답지 않게 곱고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거지 또한 단정하고 반듯했다.
그녀 덕분에 교준은 빨래와 밥 짓는 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거지인지 의원인지 헷갈리는 꼴로 돌아온 걸화는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미령이 차려준 밥을 먹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 *
걸화의 진료소에는 여전히 거지들만 버글거렸다.
아픈 이들도 있었고, 며칠씩 굶은 거지들이 한 끼를 해결하고 가기도 했다.
걸화는 환자든 환자가 아닌 이든 기쁘게 맞이했다.
가끔 산에서 잡은 작은 짐승을 내밀고 가는 이도 있었고, 동냥한 것인지 철전 몇 개를 내어놓는 이도 있었다.
걸화는 그것 또한 사양하지 않고 기분 좋게 받았다.
미령이 살림을 맡아보는 덕분에, 교준은 한결 수월해졌다.
손에 물 마를 틈이 없는 통에 생겼던 습진도 점차 가라앉았다.
장청과 마강을 데리고 약초와 나물을 캐어와 씻고 말리고 손질하는 것이 교준의 일이 되고 있었다.
매일 두침의 움막을 찾던 걸화는 차츰 그 횟수를 줄이더니, 요즘은 거의 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약을 달이며, 자신의 진료소를 메운 거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의원님!! 의원님!! 저쪽 동문 인근에서 거지들끼리 싸워요!!”
어린 거지 하나가 진료소로 뛰어들며 크게 소리쳤다.
거지들은 아프거나 다쳤을 때뿐이 아니고, 거지들끼리 싸움이 나거나 일반인에게 얻어맞고 있거나 관에 끌려가거나 위험에 처했거나… 암튼 무슨 일만 일어나면 걸화에게 달려와서 알렸다.
그만큼 그들이 걸화를 신뢰하고 있었고, 그녀가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걸화가 하던 일을 딱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제일 참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거지들끼리 싸워서 한쪽이 상처 입는 것.
없는 이들끼리 서로 보듬어 주지는 못할지언정, 자기들끼리 상처 내는 그것에 분노했다.
걸화는 한쪽에 세워진 대나무의 대로 만든 싸리 빗자루를 들고 동문으로 향했다.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걷는 그녀 뒤로 교준과 장청, 마강 그리고 진료소에 있던 거지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힘없는 거지가 힘이 센 거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은 일상이었다.
거지들이야말로 힘과 완력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곳이었기에.
초정과 그의 패거리들은 처음 본 거지 놈이 제대로 신고도 하지 않고 구걸 중인 것을 응징하고 있었다.
길바닥이라고 해서 아무나 막 구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마다 그곳을 관리하는 거지가 있었기에 어디서 굴러온 놈이라면 정식으로 두수에게 인사하고, 동냥해서 뭐라도 벌면 자릿세도 내야 했다.
이런 것들을 그냥 두었다가는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릴 수 있기에 확실하게 해야 했다.
특히 동정호처럼 뜨내기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말이다.
이럴 때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야, 딴 놈들도 다루기 쉬웠다.
바닥에 몸을 웅크린 놈에게 발길질해대던 초정은 엉덩이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뒹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 여인이 싸리 빗자루의 대나무 대로 자기 패거리들의 엉덩이를 인정사정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거지 하나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초정의 패거리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아씨!”
여인에게 달려들려던 초정은 그녀의 뒤 서 있는 교준과 한 떼의 거지 무리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거지들의 힘의 서열은 한 명 한 명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많은 무리를 짓는지에도 달렸다.
당장은 자신들이 수적으로 열세했다.
초정은 이를 꽉 깨물고, 뒤로 돌아 달렸다.
그의 뒤로 자신의 패거리들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 많은 거지들 앞에서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꼴을 보였으니 당분간 거지들을 다루기 힘들지도 몰랐다.
거지들이란 그런 족속들이었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제멋대로 굴기 일쑤였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되는데…….’
뭔가 수를 써야 했다.
걸화를 따라온 이들은 쓰러진 거지를 일으켜 세워 진료소로 향했다.
걸화는 그놈들을 더 패주지 못한 것에 화가 났다.
들끓는 성을 참지 못해 씩씩대며 진료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