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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82화 (182/230)

182화

사람을 저 지경이 되도록 팰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거지들이 힘없는 한 사람에게 떼로 덤비기 때문이었다.

여럿이 함께 밟고 때리니, 맞는 놈이 얼마나 쥐어 터졌는지 누가 얼마나 팼는지 모른다.

서로의 광기에 사로잡혀 사람을 패 죽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걸화는 자신의 기준에서는 별것도 아닌 일에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든 거지들의 불합리함에 분노했다.

아버지와 형, 걸윤의 얼굴을 떠올리며 개방도라면서 이런 것도 제대로 정리 못 하는 그들의 무능함에 화가 났다.

걸화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보던 장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가 돈이 없어서… 죄, 죄송합니다. 꼭 갚겠습니다.”

장청의 말에 걸화가 안면을 확 바꾸어, 온화한 의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휴… 배고프다. 밥이나 먹읍시다.”

교준과 걸화, 장청이 한 탁자에 둘러앉았다.

장청은 과분한 대접에 어쩔 줄 몰라 했고, 교준은 처음 보는 거지와 겸상을 하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걸화만 태평하게 젓가락질을 해댔다.

“안 먹고 뭐 해요? 얼른 드세요.”

걸화의 재촉에 장청이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교준은 께름한 얼굴로 밥을 깨작거렸다.

* * *

심하게 두들겨 맞은 걸화의 첫 환자 마강이 의식을 차리자, 그를 데려온 장청은 걸화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를 데려가려고 했다.

걸화가 한사코 말리며 더 있어야 한다고 빡빡 우겼다.

얼마나 기다려서 본 첫 환자인데 호락호락 내보내 줄 수 없었다.

있는 병, 없는 상처 다 끄집어내서 말끔히 치료해야 했다.

환자인 마강과 함께 진료소에 묵고 있는 장청은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얻어먹는 것이 미안해서 마당도 쓸고, 마강이 더럽힌 이불도 빨고 교준을 따라 약재 정리도 함께했다.

마강이 걸화의 진료소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나자, 걸화는 더 이상 그들을 잡아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두 거지를 바라보았다.

“의원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장청이 진심으로 말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강도 말했다.

“아니에요. 혹시 어디 쪼끔이라도 아픈 데 있으면 또 와요. 돈 같은 거 걱정하지 말고 와요. 주변에 아픈 거지들 있으면, 소개 많이 해주세요.”

걸화의 말에 교준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걸화는 문밖까지 나가서 그녀 생의 첫 정식 환자를 배웅했다.

그들을 보내고 진료소로 드는 걸화는 충만한 만족감과 의원으로서의 긍지, 자신의 일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 같은 것이 뒤섞여… 무진장 기분이 좋았다.

“의원님!”

교준이 한껏 행복한 걸화를 묵직하게 불렀다.

“왜요?”

걸화는 전에 없던 교준의 심각한 목소리에 긴장했다.

“거지들한테 저렇게 공짜로 치료해주고, 공짜로 밥 먹여주고 하면 저희는 뭘 먹고 삽니까?”

교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신의가 거지들에게 무료로 진료하고 음식과 약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은 부자들에게 넉넉히 돈을 받고 치료를 해주기 때문이었다.

거지촌 옆에서 거지들에게 퍼주기만 하다가는 진료소를 유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나는 스승님의 제자가 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의원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개방을 나올 때 받은 돈이랑 가주님이 주신 돈이랑 아직 있어요.”

걸화가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 돈을 다 쓰고 나면 어쩔 겁니까? 더 이상 어려운 사람을 돕기 힘들 텐데요.”

교준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요.”

걸화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으흠…….”

교준이 침음을 흘렸다.

걸화의 첫 환자인 마강이 가버린 후, 진료소는 다시 조용했다.

무료하게 입구만 노려보고 있던 걸화가 벌떡 일어나서 진료소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그러더니, 진료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엎드려 있는 거지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거지를 흘겨보았다.

거지는 걸화를 못 본 척 바닥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이씨…….”

걸화가 거지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키려 했다.

“아! 아! 이거 놓으세요!!”

거지가 일어서지 않으려 버티며 말했다.

걸화는 거지를 일으키려고 하고, 거지는 일어나지 않으려 버텼다.

진료소 앞에서 두 사람이 소란을 피우니 교준이 밖으로 나와, 거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걸화가 거지의 얼굴에다가 자기의 얼굴을 들이대며 으르렁댔다.

“여기서 뭐 하세요?”

“구, 구걸하잖아요.”

거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모자란 거지라도, 거지만 사는 거지촌에서 누구한테 구걸한다는 말인가?

“씨이!”

걸화가 거지의 허리춤을 노려보았다.

거지의 허리에는 빨간 매듭 세 개가 매달려 있었다.

“…….”

거지가 걸화의 시선을 피했다.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세요!!”

걸화가 거지의 등을 떠밀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거지가 답하며, 마지못해 쪽박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구요! 의원님! 이라고 불러요! 의원님!!”

걸화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거지의 등을 잡고 진료소에서 멀리까지 밀어내고는 다시 진료소로 돌아왔다.

진료소 앞에서 손을 탁탁 털던 걸화는 멀지 않은 곳의 아름드리나무 위를 노려보았다.

“저…….”

교준도 걸화가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성한 나뭇가지가 부스럭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아후우!! 아버지이…….”

걸화가 구시렁대며 진료소로 들었다.

걸화가 신의에게서 독립해 거지촌에 진료소를 차렸다는 것을 천상이 모를 리 없었다.

여식의 안위가 걱정되는 천상이 개방도를 시켜 진료소 주변을 염탐하게 했지만 걸화는 번번이 그들을 찾아내서 멀리 쫓아내 버렸다.

* * *

“크크흐흐흐.”

걸화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파리 떼조차 찾아오지 않던 진료소에 환자들이 미어터지게 밀어닥치고 있었다.

걸화는 신이 나서 입이 잔뜩 벌어졌지만, 교준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진료소인지 거지 소굴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지들이 우글대니 말이다.

환자와 같이 온 이들에게 공짜로 밥도 준다는 소문이 퍼져 환자 하나에 딸려 온 이들이 서넛은 되었다.

배고픈 어린 거지들은 꾀병을 부리며 드러누웠다.

걸화의 지시에 따라, 큰 솥에 미어터지게 밥을 해서 거지들에게 먹이는 교준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걸화가 진료소를 연 지 서너 달이 지났을 뿐인데, 의원의 호위이자 약재를 담당했던 교준은 거지들의 식사와 수발을 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끼니마다 밥솥이 터져나가게 밥을 했고, 어린 거지를 씻기고 옷도 갈아입혔다.

장청과 마강은 매일 진료소에 들러, 장작을 패고 교준이 밥 짓는 것을 돕고 약초를 씻어 말리고 마른 약재를 썰었다.

교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지만, 걸화는 막무가내였다.

낡았지만 제법 큰 초가집에 자리가 모자라서 마당에까지 거적을 깔고 밥을 차렸다.

교준은 작은 상에 앉아, 두 아이에게 밥을 먹였다.

네 살짜리 영영과 여섯 살 성소 남매였다.

닷새 전, 남자아이 하나가 달려와 어미가 다 죽게 생겼다고 울고불고하길래 가보았더니 어미는 정말 아사 직전이었다.

걸화의 치료 덕분에 의식은 차렸으나, 워낙 오랫동안 굶어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두 아이는 교준이 돌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힘들게 살아 그런 것인지 일찍 철이 든 두 아이는 손이 많이 가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지내본 적 없는 교준은 남매를 대하는 것이 어색했다.

교준은 자신이 누구인지, 대체 이 거지촌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의원니임! 의원니이이임~!”

진료소에 들어서기도 전에 소리부터 질러대는 거지 부봉의 목소리에 밥을 먹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방에서 환자를 진료하던 걸화도 밖으로 나왔다.

“의원님! 큰일 났습니다. 저의 형님이 다 죽어갑니다. 제발 저의 형님 좀 살려주십시오!!”

얼마나 뛰어왔는지 부봉의 얼굴은 땟국과 땀이 뒤범벅되어 더러운 국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걸화가 밥상과 부봉을 번갈아 보았다.

‘아이… 밥 먹을 참이었는데…….’

그녀는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잠깐만 기다려보시오.”

식사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걸화였지만, 의원으로서의 책임감도 만만치 않았기에 주섬주섬 왕진 갈 준비를 했다.

걸화는 자신을 재촉하는 거지, 부봉을 따라 걸었다.

부봉은 걸화의 진료소에서 멀지 않은 다리 밑에, 움막이 옹기종기 모인 곳으로 걸화를 안내했다.

구질구질한 움막 안으로 들어간 걸화는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움막 안에는 얼굴이 창백하고 숨도 겨우 쉬는 사내가 누워있었다.

걸화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보았다.

거지촌 옆에 진료소를 열고 지금까지 수많은 거지를 보며 매일같이 떠올리던 그 얼굴.

양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고는 자신을 쥐어패던 그놈.

비겁하게 자신의 패거리를 몰고 와서 앞뒤 할 것 없이 공격하던 거지 놈.

여러 해가 지났지만, 걸화는 두침을 잊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들겨 맞았던 그 아픔과 억울함, 굴욕을 결코 잊을 리가 없었다.

“으흠…….”

목을 가다듬으며 잡생각을 떨친, 걸화는 최대한 태연하게 그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낯빛만큼이나 맥도 미약했다.

“어쩌다 이리되었소?”

걸화가 핏물이 배어 나온 두침의 몸 곳곳을 보며 침착하게 물었다.

“멧돼지가 들이받아서…….”

“네에? 어디? 산에서요?”

“네… 기름진 것 좀 먹어보려고 새끼 돼지라도 잡아볼까 하다가 그만…….”

“허…….”

걸화가 조심스럽게 피에 젖은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부러져서 어긋난 다리뼈가 살을 뚫고 솟아 나와 있었다.

“…….”

걸화를 데려왔던 부봉이 인상을 찡그렸다.

걸화는 환자인 두침의 옷을 벗기고 그의 몸을 살폈다.

기운 센 멧돼지에게 들이받히고, 바닥으로 세게 낙하한 모양이었다.

하반신뿐만 아니라 갈비뼈와 등뼈, 어깨와 손목까지 어디 성한 곳이 없었다.

충격이 컸는지 내상도 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몸 상태였다.

“후우…….”

치료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저놈은 꼭 살려내야 했다.

살려야 복수를 하든…….

아니, 의원으로서…….

암튼 절대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제가 서찰을 써 드릴 테니, 진료소에 교준 대협이라는 분께 전해주세요. 약재와 치료할 도구를 챙겨 줄 겁니다.”

걸화는 침착하게 종이를 꺼내 치료에 필요한 것들을 써 내려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봉은 걸화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고, 또다시 검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녀의 진료소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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