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기분이 좋으니 밥맛도 좋았다.
다른 사람이야 걱정을 하건, 마음이 아프건 걸화는 한껏 들떠 있었다.
독립해서 진짜 의원이 되었고, 신의의 영단 비급이 담긴 귀한 서책도 얻었으니 말이다.
우중충한 하늘색도 멋있고, 허름한 객잔의 구질구질한 식당에서 만들어 내놓은 별 볼 일 없는 음식도 맛있고,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불친절한 점소이의 시중도 마음에 들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의원님! 이제 어디로 갈까요?”
늘 걸화를 소저라고 부르던 교준이 그녀를 의원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글쎄요. 다른 의원들은 처음 독립하면 어디로 가요?”
걸화가 입에 잔뜩 넣은 음식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음… 그냥 정처 없이 떠돌다 환자를 만나면 치료하기도 하고, 고향이나 은혜를 입은 곳이 있으면 근처에 진료소를 차리기도 합니다.”
신의와 다니며 그의 제자 몇을 봐온 교준이 말했다.
“은혜요?”
교준은 걸화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고 생각했다.
“은혜! 그렇지! 내가 은원이 확실한 사람인데. 아하하하!”
입속에 씹다 만 음식이 튀었지만, 걸화는 그딴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은혜라는 교준의 한마디에 걸화 평생에 원수를 갚지 못한 한 사건이 떠올랐다.
연천과 무림행 중, 동정호 인근에서 거지 놈들에게 두들겨 맞은 그 일 말이다.
그 억울하고 분하고, 이가 갈리는 그 일을 지금껏 잊고 있었다니…….
“하아…….”
걸화는 신의의 제자가 된 후, 절대 남을 괴롭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의 영단과 탕약 때문에 고생한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타인을 괴롭히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 없었고, 약을 조제할 때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쏟았다.
스스로도 변했다 생각했던 걸화는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으며 자신을 두들겨 패던 거지 떼 두수의 얼굴이 떠오르며 마음속에서 엄청난 갈등이 일었다.
‘나는 이제 복수나 해대는 사람이 아닌데… 나는 의원인데…….’
교준은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긴 걸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을 혼자서 구시렁거리며 생각하던 걸화가 결심한 듯 교준에게 말했다.
“동정호로 갑시다!”
‘복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동정호 인근에는 사람이 많으니 의원의 손도 많이 필요로 할 게야. 암! 신의의 제자가 돼서 복수 따위… 난 그런 사람 아니지, 난 의원이야.’
걸화가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 * *
멀리서 반짝이는 동정호가 눈에 들어왔다.
‘쓰읍… 동정호까지 왔으면서 대물 잉어찜이랑 홍주를 먹지 않고 지나치다니… 난 참 훌륭한 의원이야…….’
걸화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동정호 앞에 줄을 선 객잔과 식당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일단은… 그놈부터 찾고 싶었다.
그놈에 대해 떠올린 순간부터,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눌러놨던 감정이 걸화를 불편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그냥 찾아만 보는 거야.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게야…….’
걸화는 속에서 싸워대는 다른 감정들을 가지고, 거지들이 많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원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그만 가십시오. 그쪽으로 가면 거지촌밖에 없습니다. 민가는 저쪽입니다.”
교준이 인가가 드문 곳으로 향하는 걸화를 말리며 말했다.
“어허! 교준 대협! 내 대협을 그리 안 봤는데… 환자를 돌봄에 있어서 거지와 부자를 나누어서 되겠습니까? 저는 스승님의 뜻에 따라 힘든 이들을 도울 것입니다.”
걸화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거지촌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그놈을 찾으려면 거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어야 해. 아니야! 난… 힘없고 돈 없는 거지들을 도우러 가는 거야…….’
걸화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두 개의 마음이 일었다.
거지촌 한가운데에서 교준과 걸화는 실랑이 중이었다.
“의원님! 여기는 정말 아닙니다. 환자를 돌보려면 쾌적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이곳에는 약재를 둘 곳도, 환자들이 쉴 곳도 없습니다.”
걸화가 거지촌 한 중앙에 있는 움막에 진료소를 차리겠다고 우기는 것을 교준이 말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거지들이 낯선 걸화와 교준을 힐끔거렸다.
대놓고 쪽박을 내미는 자도 있었다.
교준이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자, 슬금슬금 그를 피했다.
걸화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교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걸화는 최대한 거지들이 많은 곳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그놈을 찾…….’
걸화가 머리를 흔들었다.
‘거지들을 돕고 싶어서 그런 게야. 난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깐.’
“일단 오늘은 객잔에서 묵고, 제가 여기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진료소를 열 만한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교준의 말에 걸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걸화는 대물 잉어찜과 홍주를 앞에 놓고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낸 교준은 진료소를 열 만한 집을 구하러 나갔다.
걸화가 또 되지도 않는 곳에 진료소를 차리겠다고 우겨댈까 봐, 같이 가겠다는 그녀를 두고 말이다.
혼자 있는 걸화는 눈앞의 동정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동정호의 잔잔하고 일정한 물결은 걸화를 기억의 한편으로 잡아끌었다.
오래전 연천과 함께 동정호를 바라보던 그때로 말이다.
그날 거지들에게 두들겨 맞고 온 자신을 연천이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때 맞았던 아픔도 객잔의 온기도, 연천의 입에서 풍기던 차의 향기도 걸화의 몸에 스미듯 함께 떠올랐다.
짠한 그리움에 콧등이 찡하게 울렸다.
걸화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기억을 떨쳐냈다.
빛이 반짝이는 동정호도 그날 묵었던 객잔도, 그때 마셨던 홍주의 맛도 그대로인데 연천과 자신은 그때와 같지 못했다.
잘 먹던 잉어찜과 홍주의 맛이 씁쓸했다.
* * *
걸화는 민가에서 떨어진 거지촌 외각에 진료소를 차렸다.
집이 낡기는 했지만, 방이 여러 개 있고 앞뒤로 마당이 넓어 약초를 널어 말리기에도 그만이었다.
걸화가 워낙 우기는 통에 거지촌 인근에 빈집을 구했지만, 교준은 진료소의 위치도 집의 상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걸화를 호위하고 돕는 입장이었기에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집을 수리했다.
오래되고 구질구질한 집을 보는 걸화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의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서 밥도 굶어가며 허름하고 너절한 진료소를 정리했다.
간판을 걸고 문을 연 지 이레가 되었는데도, 환자 한 명 찾지 않는 걸화의 진료소는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민가나 객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면 몰라도, 거지촌 바로 옆이었다.
무인들과 일반인들은 가까이 오지 않는 곳이었고, 거지들은 아파서 죽기 직전이어도 돈이 없으니 의원을 찾지 않았다.
걸화는 진료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도 입구만 노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보은장에 있을 때는 신의가 잠깐만 보이지 않아도 그 짧은 짬에 의서를 읽으며 공부하고 영단을 만들기 바빴는데, 목이 빠지게 환자를 기다리는 지금은 무엇을 만들고 싶지도, 의서를 읽고 싶은 마음도 일지 않았다.
‘어디 가서 아픈 환자를 주워올 방법이 없을까?’
기다리는 마음은 조바심이 났다.
영영 자신의 환자를 받을 수 없을까 봐, 불안했다.
* * *
걸화의 진료소에는 약초를 손질하는 교준과 입이 댓 발이 나와 문만 바라보는 걸화가 있었다.
교준이 구한 집은 해가 잘 들어 약초가 잘 말랐고, 그가 쉬지 않고 준비한 약재는 쌓여 갔지만, 환자는 없었다.
걸화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날도 다른 날과 같았다.
걸화는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바람이 선선해서 약초가 잘 말랐으며 교준은 약재를 정리했다.
거지 하나가 피떡이 된 다른 거지를 업고, 진료소로 들어서는 것을 본 걸화가 벌떡 일어났다.
피 칠갑을 하고 업혀 들어오는 거지가 어찌나 반가운지, 신발도 제대로 꿰어 신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환자를 업고 진료소 앞마당에 선 거지, 장청은 더 들어오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걸화는 장청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환자를 데리고 가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어서 오세요!! 환자를 방으로 옮기세요!”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친절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저… 저기…….”
거지, 장청이 망설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
걸화는 목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걱정되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어서 말을 하라고.
“죄, 죄송합니다.”
걸화는 대뜸 사과부터 하는 장청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야! 안 돼! 가면 안 돼!’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돈은… 꼭 갚겠습니다.”
“네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서! 어서 환자를 방으로 옮겨요.”
걸화는 의원이 된 이래 처음 온 환자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서둘러 두 거지를 방으로 이끌었다.
얼른 자리를 펴고, 이불 위에 환자를 눕히게 했다.
장청은 좀 전보다 더 길게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등에 업힌 마강을 이불에 눕혔다.
환자 옆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걸화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찌 저리되었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심하게 두들겨 맞은 것이었다.
걸화는 지혈을 하고, 환자의 옷을 벗겨 핏자국을 닦아냈다.
가슴 한편이 짠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겨우 아이의 때를 벗은 청년, 마강의 온몸은 멍투성이였다.
오늘 처음 맞은 것이 아니었다.
걸화는 정성껏 약물을 달여 몸을 닦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혔다.
땀방울을 흘려가며 탕약을 달이고, 신중을 기해 침을 놓았다.
장청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걸화와 그녀가 치료 중인 마강을 바라보았다.
식당이고 대장간이고 의원이고 모든 가게는 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어디를 가더라도 돈이 있어야 했다.
돈이 없는 거지는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자신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외관만 보아도 거지고 돈이 없는 게 뻔한데, 이 젊은 여자 의원은 자신들을 안으로 들여 정성껏 치료를 해 주고 있었다.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깨끗한 요 위에 땟국물과 핏물이 흥건한 마강을 눕히라고 했을 때는 겁이 나기까지 했다.
대체 아무것도 없는 거지에게 뭘 뜯어내려고 저리 정성을 다하는지 불안했다.
한숨 돌린 걸화가 장청에게 물었다.
“어쩌다 이리되었습니까?”
“저 아이가… 다른 거지들 영역에서 구걸하다 들켜서…….”
장청의 작게 이야기하는 대답에 걸화는 확 화가 일었다.
“아후우… 길바닥에 무슨 영역이 있다고… 내 이것들 잡히기만 해 봐라.”
걸화는 마강을 때린 놈들이 자신을 팼던 그 거지 떼인 것만 같아, 화가 들끓었다.
그놈들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