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또 다른 시작】
“아버지! 제 혼담이 오가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화린이 과단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 그래 알다마다.”
영친왕은 화린의 나이 겨우 16세에 약혼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서씨가 원하고 화린도 반대하지 않으니 가만히 있었지만, 화린이 싫다고 하면 서씨에게 잘 말해서 조금 더 미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는 대장군부의 아드님을 마음에 두고 있다 하십니다.”
“음… 그래…….”
영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부라면 영친왕이 믿는 그의 측근 중 하나이고, 그의 아들인 강령은 영친왕도 여러 번 보았지만, 인물도 품행도 괜찮았다.
서씨의 판단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그분도 좋은 분이겠지만… 제가 약혼을 해야 한다면… 그분 말고 다른 사람과 하면 안 될까요?”
“허허허… 그래, 되고말고. 너의 혼례다. 누구보다 너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여식을 향한 영친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약혼하겠다고 하더니, 마음에 담아 둔 사내가 있었구나…….’
“…….”
자신의 속내를 꿰고 있는 것 같은 아버지의 미소에 화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아주 잘된 것이지.”
영친왕은 황제와 황족의 정략결혼을 많이 보아왔었다.
그는 결혼하는 본인이 아닌, 부모와 친척들이 상대의 지위나 집안과 같은 것을 따져서 한 결혼의 끝이 그다지 좋다고 생각지 않았다.
황제를 받쳐 줄 든든한 집안이라는 그 원씨 집안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그리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시간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주 아니라 황제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화린이 좋다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와 약혼을 시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
영친왕이 화린의 생각을 지지했음에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허허허… 그리 부끄러워할 것 없다. 아비에게 말을 해야지 약혼을 성사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
영친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여식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대체 누구인가? 얼마 전 학림에서 왔던 서사부인가? 아니면……?’
영친왕의 머릿속에 여식이 최근에 어울렸을 만한 사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비록 부마가 되기에 지위가 좀 부족해도 여식이 원한다면 짝을 지어주리라 마음을 먹으면서 말이다.
“그분은… 개방의 배걸윤이라는 분입니다.”
말을 마친 화린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음… 응? 뭐? 누구? 어디의 누구?”
“개방의 배걸윤이라는 분입니다.”
화린이 벌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말했다.
“…허어.”
영친왕이 당황한 얼굴로 여식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에 납득이 되고 있었다.
왜 한 사람의 배필을 부모와 친척들이 집안과 지위 같은 것을 따지며 정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영친왕이었다.
“대체 어디서 개방도를…….”
영친왕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그의 안중에 연천과 같이 왔던 개방도 배걸윤이라는 자는 없었기에.
“…….”
화린은 대장군부의 자식도 서사부도, 자신의 약혼 상대 그 누구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부모나 타인의 눈에는 그의 신분이나 지위로 사람의 모습이 정해지겠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다 똑같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럴 것이면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하고 싶었다.
환한 얼굴로 웃어 보이고,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자신을 격려하던 그 사람과 말이다.
“아하… 둘이… 언제… 그런 약속을 하였느냐?”
여식에게 질문하는 영친왕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약속한 것은 아니고… 그분은 저를 모릅니다. 제가 혼자 생각한 것입니다.”
화린이 침착하게 답했다.
“……!!”
영친왕의 뒤통수가 욱신거렸다.
‘군주가 거지를 지아비로 삼고 싶다는데 그 거지는 그것을 모른다고?’
자존심 상하고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면 잘 됐다는 생각이 드는 영친왕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아비가 알아보마.”
영친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었지만, 속마음만은 달랐다.
정말 백번 양보해서 말단 관리나 상인, 농부까지도 어찌해보겠지만… 거지라니.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거지가 화린의 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 * *
신의는 입맛이 없었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입안은 꺼끌꺼끌하고, 몸은 피로하며 생각은 많았다.
마당에서 약재를 손질하는 걸화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으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연천과 걸화를 떼어놓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그러려면 신의도 보은장을 떠나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연천이 최후의 일을 해낼 때까지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보고 싶었다.
“으흠…….”
신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제가 맥을 짚어서 보약이라도 지어 올릴까요?”
언제 다가온 것인지 걸화가 신의 옆으로 와서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 너는 네 할 일을 하거라.”
표정 없는 신의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식사도 못 하시던데, 죽이라도 끓여 올릴까요?”
걸화는 여전히 신의 옆에서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다. 내가 생각할 것이 있어 그런 것이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평생 곧고 바르게 살아온 신의의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의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은 제자에게 떳떳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가까이 있다고 걸화가 알리는 없지만, 지금은 그녀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힘드시면 저를 꼭 부르세요.”
걸화가 신의에게 당부했다.
“그래.”
신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대꾸했다.
걸화는 다시 마당에 앉아 약재 정리를 했다.
신의는 눈을 가볍게 내리감았다.
신의는 여러 날을 고민해서 결론을 내렸다.
걸화를 독립시키기로 말이다.
걸화가 신의의 제자가 된 지는 겨우 3년이 넘었다.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걸화는 기감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열정이 과하여 신의가 가진 그 많은 의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탐독했다.
다른 제자들보다 빨리 내보내는 것이기는 했지만, 배움이 빠른 그녀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신의는 자신에게 절을 하는 걸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스스로를 달래도, 마음 한편이 불편하게 쿡쿡 찔러댔다.
“으흠…….”
누구도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조금 빠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의원이라면 많은 환자를 만나보고 그들을 치료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교준을 내어줄 터이니 함께 나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의원이 되도록 하여라.”
독립하는 제자에게 심부름하는 시동을 하나 딸려 주어도 그만이고 그렇지 않아도 되었건만, 신의는 걸화에게 무려 교준이라는 대단한 호위를 붙여 주었다.
표면상으로는 걸화가 여인이라 걱정이 되어 그런다고 하지만, 내실은 교준이 걸화를 마음에 둔 것을 알기에 둘이 정분이라도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연천에 대한 마음은 접기를 바랐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걸화는 신의의 마음도 모른 채, 기분 좋게 답했다.
“이것은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신의는 ‘청령의서’라고 쓰인 책을 내밀었다.
신의가 영단의 비급에 대해 쓴 책이었다.
그가 스승님께 배운 것과 지금껏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아주 귀한 것이었다.
억만금을 들고 와도 줄 마음도 없고, 구할 수도 없는 책이었다.
연천에 대한 자신의 욕심 때문에,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독립하는 걸화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라도 달래려는 것이었다.
“에헤!! 이리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스승님!!”
걸화는 귀한 책을 받아 들고, 한껏 들떠서 신의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래, 몸조심하고. 알려준 대로 네게는 네 명의 사형이 있다. 기회가 되면 사형들을 찾아가 인사라도 하거라.”
“네!!”
신이 난 걸화가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의원으로 성공을 하든, 다른 사내와 눈이 맞건 연천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라는 신의의 마음은 무거웠다.
고개를 흔들어 걸화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쳐냈다.
‘독립할 때가 된 게야… 그럼…….’
연천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걸화와 교준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교준과 마주할 때면, 걸화를 보고 미소 짓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걸화의 안전을 위해서는 교준이 옆에 있는 것이 믿음직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걸화 옆에 있는 것이 싫었다.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잘 살기를 빌어주는 수밖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해진 연천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몸 조심히 다니거라.”
짧게 말을 내뱉고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주님도 몸 건강하십시오.”
걸화가 연천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연천과 자신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백연천은 보은상회 가주고, 자신은 그저 의원이니.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쓸모있는 의원이 되고 싶었다.
백연천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그에게 매여서 그런 의원이 될 수 없었다.
걸화는 언제 또 볼지 모르는 연천의 모습을 눈에 깊이 담았다.
“갈 길이 머니, 어서 출발하거라.”
연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걸화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서둘러 걸화를 내보내야 했다.
여차하다가 그녀를 붙잡을지도 몰랐기에.
걸화와 교준은 연천에게 인사하고 그의 전각을 나섰다.
걸윤은 뭔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따랐다.
걸윤은 보은장 입구에서 누이의 등을 토닥였다.
“환자들 건강보다 네 건강이 제일 중요해. 무슨 일 생기면 어디든 좋으니 개방 분타로 찾아가. 내가 말을 해 놓을게.”
“걱정 마! 걱정 마! 나 이제 진짜 의원이야!!”
걸윤이 걱정스럽게 보건 말건 걸화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제 스승님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환자를 돌보고 치료할 수 있었다.
진짜 의원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교준 대협! 걸화를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 있으면 아무 거지나 붙잡고, 제게 연통을 전해 달라고 하면 됩니다.”
걸윤이 교준을 보고 말했다.
“네, 잘 보살피겠습니다.”
“아이참… 괜찮다니깐. 내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있어.”
걸화는 걱정 가득한 걸윤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려 웃어 보이고는 보은장을 나섰다.
걸윤은 그녀와 교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오래도록 보은장 입구에 서 있었다.
“후우…….”
걸윤은 터덜터덜 걸어 가까운 개방의 분타로 향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연천의 꼴도 보기 싫었고, 보은장에 있기도 싫었다.
얼굴을 보면 머저리 같은 친우에게 화를 낼 것 같았기에 당분간은 개방 분타로 가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