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여인이 반짝이는 눈으로 걸윤이 다시 판 개구멍을 바라보았다.
“어머! 어찌 이리 개구멍을 잘 파세요?”
“개방도한테 개구멍 파는 건 일도 아니죠.”
걸윤이 말했다.
“개방도요?”
“네!”
“우와― 개방도이시구나! 저 개방도 처음 봐요. 존함을 여쭈어봐도 될까요?”
여인이 눈을 반들거리며 물었다.
“개방의 배걸윤이라고 합니다.”
“배걸윤 대협! 너무 감사합니다.”
여인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별말씀을요. 소저!”
걸윤은 이 작은 일에 기뻐하는 여인을 진지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에?”
여인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걸윤의 시선이 민망했다.
“힘내십시오. 열심히 살면 꼭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걸윤이 어린 시녀를 응원했다.
“네… 감사합니다.”
여인이 쑥스러운 듯 답하고, 구멍 밖으로 기어나갔다.
걸윤은 엉덩이를 씰룩대며 개구멍으로 사라지는 어린 시녀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작게나마 그녀를 도울 수 있어서 뿌듯했다.
* * *
연천 일행은 영친왕이 하도 잡는 통에 보름이나 성에서 묵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연천의 얼굴은 성에 들어갈 때와 다르게 환하게 펴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피를 나눈 숙부와 그의 가족들에게서 정이라는 것을 느끼니,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마차의 의자 위에 놓인 상자에는 천마검의 검집이 고이 들어있었다.
연천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들은 영친왕이 내어준 것이었다.
거기다, 영친왕은 관군으로 구성된 무력단체 하나를 급조해서 연천에게 선물로 주었다.
금의위, 동창, 밀위 등 관군 내의 최고수들로 이루어진 무력단과 영친왕의 측근 중 하나인 우신이 동행하는 조건으로 스승의 복수를 허락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바람에 영친왕이 내어주는 것을 모두 받았다.
연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친왕이 억지로 떠맡긴 무사 우신이 연천의 호위들 무리에 끼여 말을 타고 나아가고 있었다.
무력단체는 소집되는 대로 연천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이다.
따뜻하고 든든한 무언가가 자신의 옆에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연천아! 너 영친왕 성에 들어갈 때는 그렇게 죽상이더니 지금은 얼굴이 펴도 너무 폈다.”
걸윤이 오랜만에 편안해 보이는 연천을 놀렸다.
“음!”
걸윤의 말에 헛기침하며 표정을 가다듬는 연천이었다.
“…….”
신의의 눈에도 연천의 얼굴이 말할 수 없이 좋아졌기에, 걸윤의 말에 슬쩍 웃었다.
“너 황제 되고 나서 나한테 막 안면 바꾸고 그러면 안 된다, 한번 친우는 영원한 친우야. 아! 그럴 게 아니라 걸화랑 날을 잡자. 약혼을… 아니, 그냥 혼례를 치르자!”
“…….”
걸윤의 말에 연천은 답 없이 피식 웃었다.
걸윤이 걸화 이야기를 할 때면 연천의 반응은 늘 저랬다.
신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눈을 껌뻑이며 연천과 걸윤을 번갈아 보았다.
연천이 거부의 뜻을 보이거나, 뭐라고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걸화와 연천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평온하던 신의의 얼굴에 미간이 좁아졌다.
‘가주와 걸화라…….’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던 신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신의는 연천을 혈영천마의 제자라 소개를 받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주책맞게도 눈물이 자꾸만 고였다.
그분의 제자를 보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제자를 고른 그분의 안목에 또 한 번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큰 키에 훤한 얼굴과 반듯한 몸가짐, 유순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에 탄탄한 무공까지.
무엇 하나 신의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상상하던 천마의 모습 이상이었다.
그런 연천은 신의에게 혈영천마를 대신해서 섬기는 분이기도 했고, 그가 보살펴야 하는 자식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저승에 가서 그분을 뵙더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연천의 모든 것에 티끌 한 점 없도록 신경을 썼다.
‘한데, 연천 옆에 걸화가?’
생각하던 신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된다. 아니 될 일이었다.
신의는 걸화를 제자로서 아꼈다.
아이가 엉뚱하고 의욕이 과한 면이 있긴 하지만, 감각이 예민하고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크며 열정이 넘쳐 무엇이든 열심이었다.
훌륭한 의원이 될 자질이 있었다.
하지만, 연천의 짝으로는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연천 옆에 걸화를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신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 * *
영친왕의 여식 화린은 조용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외궁으로 나갔다 와서 이것저것 머릿속에 담아 온 것이 많기에 그리고 싶은 것도 많았다.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엿장수의 벌린 입과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코 흘리는 아이, 아이들의 성화에 마지못해 엿 몇 가닥을 사는 여인과 엿을 들고 신이 나서 뛰는 어린이…….
화린은 떠오르는 모습을 하얀 종이 위에 옮겨 담고 있었다.
제각각의 표정을 가진 종이 위의 수많은 얼굴들 사이로, 환한 미소를 담고는 있는 사내의 얼굴이 떠오르더니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제가 파 드릴까요?’
화들짝 놀란 화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 앞의 종이에는 장터의 모습만이 펼쳐져 있었다.
“음……!”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낸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어머니를 보고 붓을 내려놓았다.
요즈음 어머니가 자신의 방에 오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는 화린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차를 한 모금 넘긴 화린의 어머니 서씨는 그녀가 그리던 그림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또 몰래 외궁으로 나간 것이냐?”
“헤헤… 잠깐 다녀온 것입니다.”
화린이 멋쩍게 웃었다.
“이제 너는 아이가 아니다. 한 집안의 지어미이자 한 사내의 안사람이 될 게야. 언제까지 그리 철없이 지내서야 되겠느냐? 네가 아무리 군주라고 해도 시집을 가면 그 집안의 법도를 따르고 부군의 내조에 힘을 써야 하는 게야.”
서씨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네… 어머니…….”
화린이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어머니 서씨는 황제보다 더한 힘을 가졌다는 영친왕의 정실부인이었지만, 권력과 세도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로지 부군인 영친왕의 내조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 덕분에 지금껏 아무런 문제 없이 영친왕의 정실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영친왕은 그녀조차 가차 없이 내쳤을 것이다.
다행히도 유교를 숭상한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은 서씨에게, 여인은 가족들만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영친왕은 화린을 사내를 조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한 명의 완전한 사람으로 대하고 그렇게 키웠다.
법도를 중요시하는 어머니와 실리가 우선인 아버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아버지의 대우 속에서 화린은 종종 혼란스러웠다.
“너는 누구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만, 어미는 대장군부의 자식이 마음에 들더구나. 영친왕께서 너와 의논을 해보라고 하시는데 너는 어떠냐?”
서씨가 오늘 화린의 전각에 든 이유를 말했다.
서씨는 여식의 혼사에 굳이 딸아이의 의견을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생각해서 좋은 곳을 정하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영친왕이 혼사를 치를 화린의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며 그녀의 의견을 물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찾아와서 의논하지 않았으리라.
“글쎄요…….”
화린이 머뭇거렸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화린은 약혼 같은 것에 관심도 없고, 누구와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무나와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혼례가 망설여졌다.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귓속에 은근한 그 목소리가 또다시 맴돌았다.
‘제가 파드릴까요?’
목소리와 함께 환하게 웃는 얼굴이 그녀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럼 이 어미가 알아서 정하겠다.”
서씨가 망설이는 딸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제가 조금만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화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씨에게 말했다.
“…….”
서씨는 말없이 여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영친왕은, 무거운 얼굴로 자신의 방에 든 여식을 바라보았다.
화린의 표정이 그렇게 변한 이유를 알만했다.
영친왕은 화린이 꼭 지금 약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화린 자신이 결혼하고 싶고 그녀가 원하는 사내가 있을 때나 본인이 바랄 때 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부인 서씨의 마음은 달랐다.
서씨의 마음속에는 여식이 약혼할 때가 지금이었다.
그녀는 이상적인 사위의 모습과 그 집안의 지위 같은 것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었다.
영친왕이 반대한다면 서씨도 그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서씨를 존중해주고 싶었다.
궁 안에서 서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끼 올라오는 식사의 종류와 그들의 두 아이가 전부였다.
그것만큼은 서씨의 뜻대로 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영친왕은 이제 곧 자신의 품을 떠날 여식, 화린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부모의 정을 받아보지 못한, 영친왕은 가족에게 유난한 애정을 보였다.
특히 여식에게 말이다.
아들 녀석은 만에 하나라도 황제의 자리나 권력에 탐을 낼까 저어되어 엄하게 다룬 경향이 있었지만, 화린에게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을 다 쏟았다.
“그래. 우리 군주께서 무슨 일로 아비를 찾아왔느냐?”
영친왕은 흐뭇한 얼굴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화린을 시집보내고 싶은 서씨가 요즘 들어 궁중의 법도나 예법을 더욱 신경 써서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와서 앉는 자세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
군주, 화린이 묵직하게 영친왕을 불렀다.
“그래.”
영친왕은 전에 없이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는 여식을 바라보았다.
“…….”
뭔가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화린은 쉬이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네가 아비에게 말 꺼내기 어려운 일도 있느냐? 뭐든 괜찮으니 이야기해 보거라.”
영친왕이 말했다.
화린은 저리 머뭇대는 아이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비인 영친왕에게는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서씨가 말리는 것도 영친왕에게 애교를 부리고 떼를 써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는 하는 그런 아이였다.
영친왕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여식을 바라보았다.
겨우 얼마 사이에 많이도 변한 화린의 품행이나 말투가 대견하면서도 섭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