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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78화 (178/230)

178화

연천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황제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랬다.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긴 하지만 틀림없이 황제가 있었다.

영친왕이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해서, 황제가 자신의 처소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은 산골 촌부도 아는 이야기였다.

한데, 갑자기 연천에게 황제라니?

“궁에는 황제가 없다. 있는 척했을 뿐 없다. 아니, 이제는 있구나. 네가 황제야.”

영친왕의 목소리는 기쁜 듯 덤덤했다.

영친왕의 말에 굳은 듯 서 있던 연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

갑자기 높아진 영친왕의 목소리에 긴장이 풀리고 있던 걸윤이 몸을 꼿꼿이 세웠다.

“…….”

연천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꽂히는 영친왕의 강렬한 시선을 피했다.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더냐? 나는 20년이 넘게 너를 찾으며 네 자리를 지켰어.”

영친왕의 격양된 목소리가 불만스럽게 튀어나왔다.

“…….”

연천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래,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곳이 네 자리다.”

영친왕이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려고 애쓰며 말했다.

“영친왕께서 황제가 되시면 안 됩니까?”

이것은 연천뿐 아니라 영친왕의 측근, 고관부터 말단 관리까지… 아니, 저자를 돌아다니는 장사치들조차 하는 생각이었다.

영친왕은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선대 황후와 그녀의 집안을 몰아내고, 작은 야심이라도 보이는 자는 가차 없이 쳐냈다.

황궁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언젠가는 영친왕이 황제를 없애고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천도 마찬가지였다.

궁과 나라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금껏 황제처럼 살았던 영친왕이 왜 아무것도 모르는 연천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어준단 말인가.

영친왕이 직접 황제가 되는 쉬운 길을 두고서 말이다.

“너는 나를 파륜자로 만들 셈이냐? 내가 조카의 자리나 탐내는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 게야?”

영친왕의 얼굴이 상당히 불쾌하게 변했다.

자신에게 황제가 되라는 것은 영친왕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였다.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황후에게 어미를 잃고, 자신은 전쟁 중인 변방으로 쫓겨나 15년을 버텼다.

황제인 형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았고, 그의 아이들은 빛도 보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자신에게 황제가 되라는 말은 그런 짓을 한 황후와 똑같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고 역겨워하는 그런 인간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것이 아니옵고… 저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연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으흠…….”

영친왕이 숨을 내쉬고 세게 일었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처음 본 조카에게 울컥 올라왔던 마음을 누르고 말했다.

“무슨 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다고!”

영친왕의 낮은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잔뜩 담겨있었다.

“…….”

영친왕의 말에 연천은 가만히 생각했다.

영친왕이 연천에 대해 조사한다면, 그가 하려는 일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일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연천은 영친왕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저를 주워 키워주신 스승님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연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

영친왕은 대답 없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복수와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충분히 이해하는 영친왕이었기에.

“그럼…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네 자리로 돌아오거라. 필요하면 내가 돕겠다.”

영친왕의 목소리는 묵직하고, 진지했다.

“그때도 영친왕께서 지금과 같이 생각하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연천은 단박에 황제가 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일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영친왕이 아니고, 숙부다. 그리 불러라.”

언제 불쾌한 목소리를 냈냐는 듯 영친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

마음에 들지 않는 말 한마디에 부르르 떨며 흥분하던 영친왕의 살가운 모습에 연천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 * *

“내 가족들이다. 너의 가족이기도 하지.”

연천은 영친왕이 소개해 준 그의 식구들을 바라보며, 특별히 신경 쓴 음식들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다.

영친왕의 아내 서씨 부인은 온화한 얼굴로 연천의 식사에 신경을 썼고, 연천보다 서너 살 어린 그의 아들은 영친왕을 닮아 단단하고 굳건했다.

영친왕의 여식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연천을 보았다.

연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영친왕의 가족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한 열기가 퍼져나갔다.

그는 보은장에 든 이래, 보은상회와 무명촌 사람들을 가족이라 여기며 살았다.

자신이 지키고 보살펴야 할 가족이라고 말이다.

그들 덕분에,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느꼈던 외로움과 쓸쓸함 같은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보살피고 책임져야겠다는 그 마음이 가족 간의 유대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지금 올라오는 감정은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특별한 다짐도 각오도 필요 없는, 어색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연천의 뱃속에서 몽글몽글 커지고 있었다.

맨살을 맞댄 것처럼 간지럽고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연천은 처음 가져보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영친왕의 가족을 아니, 자신의 가족을 흘끔거렸다.

* * *

걸윤은 하릴없이 영친왕의 넓은 성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신의는 궁에 상주하는 의원인 그의 사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고, 연천은 만날 영친왕과 둘이서 쑥덕거리거나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걸윤은 며칠이 지나도 영친왕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저렇게 연천만 불러서 밥도 먹고 얘기도 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그를 해할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연천이 괜찮다고 하고, 자신이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걸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으흐흥… 흑… 으흥…….”

뭔가 낑낑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어슬렁거리는 걸윤의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걸윤은 드문드문 끊어지는 작은 소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난 곳은 내성 외곽이었다.

후미진 담벼락 밑에서 혼자 용을 쓰고 있는 시녀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이힝… 끄응… 아잇! 힘들어… 이거 꼼짝도 안 하네…….”

두 손과 소맷자락이 흙투성이인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저기… 소저…….”

걸윤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엥?”

여인이 깜짝 놀라며 걸윤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열대여섯쯤 되는 어린 시녀였다.

“…….”

걸윤은 그녀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십니까?”

여인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걸윤을 쳐다보았다.

“아!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궁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일행의 일이 길어지는 바람에 이리 구경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걸윤은 자신의 처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영친왕의 성에 수상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도 철저히 확인하고 들여보내는데 말이다.

“네…….”

시녀는 걸윤이 쳐다보니, 민망한 표정으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훔쳐냈다.

손에 묻은 흙이 옮겨붙어 깨끗한 이마에 얼룩이 생겼다.

“어찌 이러고 계십니까?”

걸윤은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딱 봐도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어린 여인이었다.

그 나이에 성에 들어와 시녀로 산다는 것은 그녀의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힘들게 자랐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거기다 말단 시녀의 생활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을 터였다.

“…….”

여인은 처음 본 사내에게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걸윤이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혹여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여인은 미소가 기분 좋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혼나고, 규칙을 어겼다고 야단맞고, 몰래 쉬었다고 기나긴 잔소리를 듣는 게 일상인 그녀 앞에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말이다.

여인은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에게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걸윤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손가락으로 담벼락 아래의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 보이죠? 내가 몇 날 며칠을 고생해서 개구멍을 만들어 놓은 건데 누가 막아놨어요.”

그녀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

걸윤은 생각지도 못한 이유를 대는 여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내가 그거 판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여인의 말에 걸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곳은 영친왕의 내성 안이었다. 이곳을 나가면 외성이 있었다.

내성만큼은 아니었지만, 외성 곳곳에도 영친왕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내성에서 외성으로 나가는 것은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확인만 하는 수준이었다.

“소저… 그냥 문으로 나가시면 되지 않을까요?”

걸윤이 조심스레 말했다.

“못 나가게 해요… 내성만 빠져나가면 장터도 있고, 사람 사는 구경도 할 수 있는데, 못 나가게 해요…….”

그녀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외성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해요?”

걸윤의 마음 한편이 불편해져 왔다.

‘내성의 시녀들은 함부로 외성으로 나가지도 못하는구나…….’

걸윤이 어린 여인을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가 뭐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외출 좀 하는 건데…….”

여인이 엄청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걸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의 후미진 구석, 담벼락 주위로는 사람도 없었다.

“제가 파드릴까요?”

걸윤이 그녀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다가오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저거 파는 데 며칠이나 걸렸어요. 시간이 많으신가 봅니다?”

“에이… 이까짓 것 저한테는 일도 아닙니다.”

걸윤이 씨익 웃으며 전에 여인이 만들었다 메웠다는 개구멍으로 다가갔다.

누가 메웠는지 커다란 돌을 밀어 넣고 주위에 젖은 흙을 채워 넣어 말린 것이었다. 새로 파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터였다.

걸윤이 흙이 채워진 부분을 손에 힘을 주어 긁어내자, 흙가루가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제법 파내다가 묵직한 돌을 끄집어내고, 우둘투둘한 구멍 주위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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