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신의가 익숙하게 내전을 향해 앞장서고, 연천과 걸윤이 그 뒤를 따랐다.
내전으로 올라가는 첫 계단을 밟기도 전에 무사가 그들을 저지했다.
“무기는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잠시 저희가 맡아두겠습니다.”
그들을 막은 영친왕의 무사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연천의 검에 향해 있었다.
“으흠…….”
연천이 표정 없는 무사와 높이 자리 잡은 내전을 차례로 쳐다보고는 검은 내밀었다.
스승님은 언제나 말씀하셨다. 검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연천은 검이 있어도 없어도, 싸움의 승패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었다.
반면, 걸윤은 연천이 해검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서 손톱 발톱을 다 뽑아놓고 가는 것과 같았다.
영친왕이 연천을 해할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과 연천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전 입구에 보이는 무사들의 수만 해도 어림잡아 2, 300명은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과 궁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의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걸윤의 가슴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퍼지며, 무겁고 단단한 것이 온몸을 눌러 내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흔들어 답답한 생각을 걷어낸 걸윤은 연천의 검을 받아드는 무사를 흘겨보다, 혼잣말인 듯 모두가 들리게 한마디 했다.
“하.하.하… 난 무기가 이 손인데 어쩌지.”
연천의 검을 가져가는 무사에게 소심한 불평이라도 하려는 듯,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는 걸윤이었다.
연천의 검을 받아 든 무인은 걸윤의 말을 못 들은 척 앞만 바라보았다.
“으흠! 가세.”
신의가 껄끄러운 공기를 깨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굳은 표정의 연천과 못마땅한 얼굴의 걸윤이 따랐다.
어른 키의 세 배쯤 되는 높이의 계단을 오르고도, 쭉 뻗은 길을 한참을 걸었다.
“우와… 다리 아파서 못 가겠네.”
걸윤은 잔뜩 강직된 스스로의 마음을 풀어보려는 나름의 방식으로, 영친왕의 성이 너무 넓다고 말하고 있었다.
신의는 걸윤의 말을 못 들은 척 계속 걸었다.
황금색과 다채로운 색들로 조화를 이룬 내전의 벽과 천장, 바닥은 엄청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금색 문 앞에 세 사람이 서자, 두 명의 시녀가 공손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또 걸어서 나온 문을 시녀가 열어 주었다.
세 번째 문을 통과하며 걸윤이 투덜댔다.
“배고프고 기운도 없다…….”
“으흠…….”
연천은 걸윤의 불평에 피식 새어 나오는 실소를, 목을 가다듬으며 눌러 내렸다.
연천이 생각해도 영친왕의 궁은 과하게 넓고, 복잡하며 비효율적이었다.
일행은 다시 세 개의 문은 통과한 후에야 영친왕이 있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방에는 벽면을 따라 한 걸음 간격으로 병사들이 둘러 서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공기는 방으로 들어서는 세 사람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방의 중심, 높다란 단 위에 영친왕으로 보이는 이가 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일행을 보는 그의 눈초리가 어찌나 매서운지 멀리서도 온몸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거지꼴로 전 중원을 누비며 온갖 눈총과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걸윤조차도 사방에서 쏘아대는 보이지 않는 힘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엄청난 중압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의식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곧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걸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조용히 자신의 무기인 주먹을 슬그머니 쥐었다 폈다 하며… 만약을 준비했다.
신의가 방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영친왕을 향해 오체투지 했다.
연천과 걸윤도 신의 뒤에서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영친왕에게 인사를 했다.
“영친왕을 뵙습니다.”
영친왕은 세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볐고, 돌아온 후에도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살아온 영친왕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고개를 드시게.”
영친왕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세 사람은 바닥으로 향했던 얼굴을 앞으로 들었다.
영친왕이 말을 이었다.
“내 신의께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확인은 필요한 것이니 너무 불쾌하게 생각지 말거라.”
영친왕의 뜻밖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연천은 복잡한 심경으로 눈을 내리깔았고, 걸윤은 의심 가득한 눈동자를 요리조리 돌렸다.
영친왕이 가볍게 턱 짓을 하자, 사발을 든 시녀와 의원이 연천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손을 주십시오.”
의원의 말에 연천이 손을 내밀었다.
“피를 낼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의원의 말에 연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걸윤은 눈이 둥그레져서 연천과 의원을 번갈아 보았다.
의원이 작은 단검을 꺼내 연천의 새끼손가락 끝을 살짝 그었다.
곧 선홍색 피가 배어 나왔다.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발이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의 사발에는 섬뜩하리만큼 새카만 액체가 담겨있었다.
의원이 연천의 손가락을 들어 피 몇 방울을 사발에 떨어트렸다.
칠흑보다 검던 사발 속의 검은 액체가 꿈틀거리는 듯싶더니 색이 바래기 시작했다.
회빛을 띠더니, 곧 흐리터분한 탁색이 되었다가 이내 맑은 액체로 변했다.
연천의 옆에 있던 걸윤은 영친왕 앞이라는 것도 잊고 넋을 놓고 액체를 바라보았고, 표정 없던 의원의 눈동자가 커졌다.
의원은 시녀에게서 쟁반을 받아, 계단을 올라가 단 위의 영친왕에게 내밀었다.
영친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쾌한 듯 굳은 표정으로 사발 속의 액체를 노려보던 영친왕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높은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내려왔다.
묵직하게 발을 움직이며, 연천을 뚫을 듯 쏘아보았다.
“흐음…….”
걸윤이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온몸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영친왕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연천은 조용히 고개를 바닥으로 향했다.
연천도 영친왕이 어찌 나올지 염려스러웠다.
옆자리에 걸윤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괜히 걸윤을 끌어들여 그를 위험하게 한 것 같아 그와 함께 온 것이 후회되었다.
어느새 바닥까지 내려온 영친왕이 연천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닥에 길게 끌린 금빛 장포와 화려한 옥 신발이 연천의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라.”
영친왕이 묵직하게 명했다.
연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천의 앞에 선 영친왕은 한쪽 무릎까지 꿇고, 연천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힐끔거리며 영친왕의 행동을 지켜보던 걸윤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발끝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영친왕에게 뛰어들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친왕은 연천의 얼굴을 꿰뚫을 듯한 눈으로 찬찬히 살폈다.
연천은 불편한 얼굴로 영친왕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연천을 보는 영친왕의 미간이 일렁거렸다.
걸윤은 아예 고개를 쭉 내밀고, 연천을 쏘아보는 영친왕을 살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갈지는, 영친왕의 표정에 달렸기에.
그는 영친왕의 꽉 다문 입매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바짝 긴장한 주먹을 꽉 쥐었다.
연천을 보는 영친왕의 딱딱한 얼굴은 엄청 거북해 보였다.
걸윤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영친왕에게 연천은 그 존재 자체로 거슬리고 못마땅할 테니.
한참을 굳은 듯 연천의 얼굴만 바라보던 영친왕이 고개를 들었다.
“으흠…….”
영친왕이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너라.”
짧게 말하고 먼저 앞장서서 어디론가 향했다.
신의와 연천, 걸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영친왕의 뒤를 따랐다.
불안한 마음에 꽉 쥔 걸윤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을 두 개쯤 지나 멀지 않은 곳에 궁의 규모에 비해 작고 아담한 문을 영친왕이 직접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내전 곳곳에 도열해 있던 시녀도 환관도 무사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의 한쪽 벽면에는 커다랗게 한 사람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걸윤은 미간을 좁히고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
걸윤의 머리 한편이 띵하게 울렸다.
‘눈앞의 그림은 연천…인가?’
연천인거 같은데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대체, 영친왕은 어떻게 연천을 알고 그를 그려놨다는 말인가?’
걸윤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히고 있었다.
연천 일행 앞에 선 영친왕은 영정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왕자를 본 적이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신의가 그려준 기이한 문양이 고작이었지. 그것을 가지고 어린아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어.”
영친왕이 조금은 아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를 찾으면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해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구나…….”
영친왕이 연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찌 이리도 똑같이 생겼느냐?”
영친왕이 읊조리듯 말했다.
“…….”
연천은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영친왕의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어린 것이 죽지 않고 살았구나… 고맙다…….”
영친왕의 낮은 목소리는 물기가 묻어있었다.
영친왕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냉혹하고, 엄격하고, 무섭다는 것이다.
세상의 평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그와 다른 면이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연천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수작인지… 걸윤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영친왕을 흘끔거렸다.
그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두어 가고도, 아직도 탄탄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권력의 꼭대기에서 관리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당연히 연천을 없애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력과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비정하고 몰인정한 인간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맙다’는 소리를 하다니… 놀랄 수밖에.
어쩌면 신의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친왕이 슬그머니 연천의 손을 잡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끌어안듯이 감싸 쥐었다.
걸윤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제가 누구입니까?”
연천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영친왕이 연천을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천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따뜻하고 온화했다.
“너는… 선대 황제이시자, 내 형님의 아들 주후다.”
걸윤이 눈을 끔뻑이며, 영친왕을 쳐다보았다.
신의에게 들었으면서도, 걸윤이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던 말을 영친왕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다.”
영친왕의 크지 않은 목소리에 걸윤은 머리가 멍해졌다.
연천도 놀란 모양인지,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작은 방안 가득 육중한 적막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