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영친왕】
신의 황임은 연천과 걸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한 다음 날, 바로 보은장을 떠나 황궁으로 향했다.
연천도 걸윤도 단호한 신의를 말리지 못했다.
이제 그들의 손을 떠나버린 이 사실이 황궁에서 어떤 바람을 몰고 올지 그들은 몰랐다.
단지, 불안하고 두려웠다.
연천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보은장 자신의 방에 처박혔다.
“야! 너 아침도 거의 안 먹었다면서? 배 안 고프냐? 너 밥 안 먹고 그러면 팍 늙는다. 그렇지 않아도 나보다 인물도 못한데 늙어 보이기까지 하면 어쩌냐?”
걸윤은 연천의 코앞에 떡 벌어진 상을 차려놓고 넉살을 떨고 있었으나, 어쩐지 오늘은 걸윤의 너스레에도 흥이 쏙 빠져있었다.
연천은 술상을 앞에 두고, 술에도 안주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씹어 넘기던 걸윤도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입과 다르게, 걸윤의 눈은 걱정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연천을 바라보았다.
“…눈치 좀 그만 봐라, 내가 다 불편하다.”
연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걸윤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지.”
이건 연천이 많이 놀랐다는 말을 에둘러 하는 것이었다.
영친왕이 그 문양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고 하니, 걸윤의 입장에서는 그 이유가 뭔지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
미리 연천에게 의논을 했건 안 했건 결론은 같을 것이고, 지금과 다를 게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려보고 싶었다.
모두들 자신에게만 의지하고 자신만 믿고 바라보는 이 버거운 상황에, 더 힘든 일이 벌어지려 하는 이 무거운 마음을 자신도 한 번쯤 불평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걸윤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도울게.”
걸윤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연천이 그런 걸윤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술잔을 채워 걸윤에게 내밀었다.
걸윤이 연천의 눈치를 볼 만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연천의 일을 도울 필요도 없었다.
연천은 자신을 걱정하는 걸윤이 고맙고, 그런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어 오히려 미안했다.
“신의께서 옳은 판단을 하실 게야. 그분을 믿어.”
연천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난 잘 모르겠다.”
걸윤이 찝찌름한 얼굴로 말했다.
걸윤은 신의를 존경했고, 그의 의술을 신뢰했으며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하지만, 영친왕에 대한 그의 생각만큼은 도저히 동의하기 힘들었다.
영친왕의 군사에 짓밟혀 죽어 나간 목숨을 어찌 손으로 꼽아서 세겠는가?
영친왕은 군사들을 직접 통솔했고, 처형장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 나갔다.
많은 이들을 쓸어버리고 권력을 잡은 영친왕은 강하고 무섭게 통치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원씨들은 도망가서 자신의 성씨를 버렸고, 관리들은 그의 칼날과 눈빛에 벌벌 떨었다.
측근이라도 그의 눈 밖에 나면 용서 따위 없이 바로 내쳤다.
조금이라도 분란의 소지가 있으면 휩쓸어서 죄다 없애버렸다.
인자함이나 자비와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었다.
영친왕 덕에 관리들과 악덕 업자의 횡포가 사라져서 백성들의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의 처분에는 여전히 과격한 면이 많았다.
‘그것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인가?’
걸윤이 혼자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신의가 이번 일을 당장 영친왕에게 고하는 것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권력에 눈이 먼 영친왕이 연천을 없애겠다고 마음먹기라도 한다면, 연천은 살아남기 힘들지도 몰랐다.
그리도 연천을 아끼는 분이 그에게 해될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에서 불편하게 일렁이는 불안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넌 스승님도 욕했었어.”
연천이 작게 말했다.
“끄응…….”
걸윤의 낯이 불편하게 변했다.
연천의 말이 맞다.
걸윤은 혈영천마가 희대의 악인이고 수일검이 무림의 영웅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이번에도 자신의 생각이 틀리기를 마음속으로 비는 걸윤이었다.
* * *
영친왕은 한쪽 벽면의 대부분을 채운 선황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영친왕의 가슴 속에 있는 형의 모습은 저것과는 많이 달랐다.
어미 없는 어린 아우를 안아주고 놀아주며 웃던 그 모습은 굳은 듯 정면을 바라보는 영정과는 달랐다.
선황이 승하한 이후, 매일같이 그의 영정을 바라보는 게 영친왕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선황의 눈빛에 황후 일가를 쳐낼 용기를 얻었고, 그의 굳은 입매는 자신을 황제로 추대해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을 벌할 힘을 주었다.
영정 위에 겹쳐 보이는, 반달 눈으로 웃는 형의 모습에 흐트러지는 이성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막강한 권력을 얻은 영친왕은 자신이 평생을 증오했던 황후가 아주 조금은 이해되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지니,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간신들과 그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 다가와 교묘하게 눈을 가리고 기분 좋은 미끼로 그를 유혹했다.
가슴 속 깊이 세워놓은,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결심이 흐려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한순간에 자신도 황후의 길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했다.
권력이라는 것은, 힘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형님… 오늘 신의가 찾아왔습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영친왕이 영정을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신의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영친왕은 영정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멈추었다.
“글쎄… 왕자를 찾았답니다. 왕자를요…….”
영친왕은 대답 없는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허! 설마? 당연히 내가 같이 가야지.”
걸윤은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네가 왜?”
연천이 퉁명하게 대꾸했다.
영친왕의 성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걸윤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영친왕이 무슨 마음으로 자신을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은 자기 한 몸도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 한편에 걸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걸윤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
“내가 돕기로 했고, 이 일을 알아본 게 나잖아. 당연히 나도 같이 가야지.”
걸윤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됐어, 혼자 다녀오마.”
연천이 덤덤하게 말했다.
“…….”
걸윤이 연천을 흘겨보았다.
연천이 왜 자신을 영친왕의 성에 함께 가지 못하게 하는지 짐작이 되기는 했지만, 그에 반해 걸윤은 꼭 같이 가고 싶었다.
걸윤은 같이 갈만한 핑계가 없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 나도 영친왕의 성에 가야 돼! 개방에 맡긴 일을 처리했는데 가서 상황도 보고하고, 수고비도 받아야지. 나는 너 때문에 가는 게 아니고 개방 일 때문에 가는 거야! 네가 마차 태워주기 싫으면 따로 갈 테니 그리 알아!!”
말을 끝낸 걸윤이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저런 이유라면 연천이 그를 말릴 수 없으리라.
“으흠…….”
걸윤을 보며 불편하게 한숨을 내쉬는 연천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두렵게 일던 마음 한편이 걸윤이 함께 하겠다는 말에 누그러들고 있었다.
걸윤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믿음직했고 그가 옆에 있으면 든든했다.
신의와 연천, 걸윤은 보은상회 마차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것에 타고 있었다.
말을 탄 호위들이, 마차 주위를 에워싼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연천은 마차만 타면 으레 그렇듯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걸윤이 연천과 신의를 쳐다보았다.
연천의 얼굴은 어둡고 무거웠고, 신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걸윤의 마음이 불편했다.
혈영천마의 팔을 보며 오열하던 신의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천의 비밀을 알자마자 영친왕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버린 신의에 대한 불신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신의의 말대로 연천이 잃어버린 왕자라면 영친왕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권력욕에 눈이 먼 영친왕이 어찌 나올지 걸윤은 불안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언짢은 생각들을 지워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부스럭대며 뭔가를 꺼냈다.
“야! 육포 먹을래? 이거 진짜 맛있어. 주방에 나한테 반한 시녀가 있는데, 내가 주방에만 가면 그렇게 먹을 걸 챙겨 주네. 역시 나한테 넘치는 이 매력을 어쩔 수가 없나 봐.”
걸윤이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연천의 입에 육포를 쿡 찔러 넣었다.
“읍!”
연천은 육포를 입에 문 채 걸윤을 노려보았다.
“어때 맛있지? 신의님도 드셔보세요.”
걸윤이 사양하려는 신의의 입에도 육포를 찔러 넣었다.
“두 분이 생각하기에 내 매력은 무엇인 것 같아요? 잘생긴 얼굴? 근육이 탄탄한 몸? 이 화려한 언변?”
연천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대며, 걸윤에게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하하하! 너 나를 샘하는구나?”
걸윤의 말에 전의를 잃고 눈에 힘을 푸는 연천이었다.
걸윤이 가는 내내 터무니없는 흰소리를 해대는 통에 연천은 지금의 사태에 대해 생각에 빠질 겨를도, 더 무거워진 어깨를 부담스러워할 여유도, 영친왕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틈도 없이 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커다란 성문 높이 황금빛 깃발이 펄럭였다.
걸윤 때문에 잊고 있었던 부담감이 연천의 가슴을 무겁게 눌러 내렸다.
성문을 통과하는 걸윤의 머릿속에는 연천과 함께 영친왕의 호위무사로 성에 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스승님에 대해 알아내겠다는 생각뿐이었던 백연천과 무조건 그를 따르던 걸화. 그리고 걸화를 지키겠다고 함께했던 자신이 생각나, 무거운 마음 한가운데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걸윤이 연천을 쳐다보았다.
연천의 얼굴은 과거를 떠올릴 여유도 없이 굳어있었다.
그들을 따르던 보은상회 무사들은 성 입구에서 마차와는 다른 곳으로 안내되고, 대신 영친왕의 병사들이 마차를 둘러쌌다.
마차는 정문을 통과하고도 한참을 이동하여 성의 중앙에 위치한 영친왕의 궁, 내전 앞에서 멈추었다.
영친왕의 병사가 마차의 문을 열자, 연천 일행은 밖으로 나와 내전을 바라보았다.
호위무사 때는 보지 못한, 영친왕의 내전은 엄청나게 높은 계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고 넓은 계단의 양옆에는 병사들이 줄을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 곳을 응시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병사들은 대충 보아도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묵직한 무언가가 걸윤의 가슴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