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신의 양운과 그의 후계자 황임은 황후 앞에 바짝 조아렸다.
황후는 쉬이 말을 꺼내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고개 숙인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 찾아온 왕자를 진료하셨습니까? 왕자는 건강하지요?”
왕자를 걱정하는 척하는 황후의 말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네, 마마. 소신이 진찰한 바로는 건강하십니다.”
신의 양운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껏 찾지 못했던 왕자를 어디서 찾았답니까?”
황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소신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신의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가 고개 숙인 양운의 머리통을 뚫어버릴 듯 노려보았다.
양운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황후의 시선을 받으며, 꼼짝하지 않았다.
황후가 입을 열어 천천히, 그윽하게 말했다.
“내가 글쎄 아주 무서운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은근한 목소리는 서늘했다.
“…….”
양운과 황임은 조용히 황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찾은 왕자가 가짜라고 하지 뭡니까? 황제께서 워낙 병세가 위중하여 아들도 알아보지 못한다더군요.”
황후가 양운을 향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어찌… 그런…….”
양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머리 한편에서 다급하게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황후가 왕자가 가짜인 것을 알 리가 없다, 알 리가 없어. 절대 알 리가 없다.’
“두 분은 왕자를 보셨으니, 똑똑히 아시겠지요?”
황후의 목소리가 매섭게 변했다.
양운은 마른침을 크게 삼키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을 잃어버리기 전에 제가 진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귀비 유씨께서 워낙 조심하시어 저의 제자는 왕자님 가까이 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미 각오를 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황임만큼은 말려들지 않게 해야 했다.
그마저 황후의 눈 밖에 나면 신의의 맥이 끊길지도 몰랐다.
“그래요?”
황후가 작게 눈짓했다.
황후의 호위 중 하나가 조용히 황임에게 다가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황임이 나간 것을 확인한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양운에게 다가갔다.
양운의 바로 코앞까지 온 황후가 손가락으로 양운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양운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찾은 왕자가 가짜라고 하던데…….”
황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짜지요?”
황후의 말에 양운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찌… 그런…….”
양운이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가짜지요!!”
황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왕자가 가짜인 것을 황후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후궁의 아이 따위 본 적도 없고, 본 사람도 다 죽었다.
양운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아닙니다. 왕자님이 맞습니다.”
양운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가짜라니깐!!”
황후가 소리를 질렀다.
양운은 황후가 왕자를 가짜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눈치채고, 다시 힘주어 말했다.
“마마! 왕자님이 맞습니다!”
“가짜라고 말해애애!!”
황후가 악을 써댔다.
“마마…….”
“씨익… 씩… 이히…….”
황후가 양운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
양운이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눈에서 불을 뿜어낼 것처럼 매섭게 양운을 노려보았다.
“나가보세요!!”
황후의 말에 양운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와장창―
황후가 닫히는 문을 향해 찻잔을 집어 던졌다.
양운만 눈 딱 감고 왕자가 가짜라고 한마디만 하면 죽어가는 황제와 변방에서 온 영친왕, 돌아온 왕자 따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그가 고집을 부리는 통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황후는 크게 분노했다.
곧, 양운의 유배가 결정되었다.
귀비 유씨와 왕자를 진료했음에도 유씨의 병세를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말이다.
황후의 마음 같아서는 양운의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녀의 측근들이 말렸다.
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신의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유배도 과한 처사였다.
신의 양운은 유배지로 떠나기 전날, 제자 황임에게 신의라는 이름을 물려주었다.
왕자를 찾은 지 3일 만에, 그를 태자로 봉했다.
그리고, 열흘 뒤 황제가 승하했다.
이제 갓 돌이 지난 태자가 황제가 되었고, 그의 옆에는 영친왕이 있었다.
그리고, 영친왕에게는 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도에서만 활동한 황후의 병사들과 달랐다.
영친왕은 15년을 전장을 누빈 장수답게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했다.
망설임이나 용서 따위 없이, 과격하고 과단하게 적을 없애기 시작했다.
황궁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다.
처형장에는 하루도 원씨의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백성들은 여전히 먹고살기 힘들었고, 썩을 대로 썩은 관리들은 바짝 엎드려서 영친왕의 칼날이 자신을 피해 가기만을 빌었다.
* * *
신의가 옛날이야기를 끝내고 입을 다물자, 연천의 방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연천도 걸윤도 신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무겁고 껄끄러운 침묵은 깬 것은 걸윤이었다.
“네에?”
걸윤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신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긴 이야기의 결론이 뭐라는 말인가?
‘그러니깐, 저 문양이 가슴에 있는 사람이… 뭐?’
걸윤의 머릿속은 지금 황궁에 있는 황제가 가짜이고, 연천이 그때 잃어버린 왕자라는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걸윤이 연천을 쳐다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굳은 듯 앉아 있는 연천을 말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인지, 연천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걸윤은 자신이 연천의 가슴에 있는 문양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잘못한 것이었나 하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뭔가가… 걸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엄청난 것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을 떠안아야 하는 연천을 바라보는 걸윤은 안타까웠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일을 시작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 * *
걸윤이 머무는 전각 한편의 작은 방에 누운, 노인 장월은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죽을 때가 다 되어 그런 것인가, 쓰린 과거가 쉼 없이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그를 괴롭혔다.
떨쳐내려고 눈을 꼭 감고 머리를 흔들어도, 스스로가 만든 지난 일은 그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장월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다 죽었거나,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가난했지만, 그에게는 부모가 다 있었다.
가진 것 없는 그의 부모가 남 밑에 일해서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기는 힘들었다.
그의 부모는 항상 자식들이 밥 굶지 않을 방법을 생각했다.
갓 태어난 막내는 자식 없는 집에 업둥이로 보냈다.
큰누이는 낙향한 늙은 관리의 두 번째 첩실로 멀리 시집을 갔고, 큰형은 뜨내기 상인의 심부름꾼이 되어 집을 떠났다.
작은형은 마을을 지나던 사냥꾼에게 딸려 보냈고, 작은누이는 부잣집에 몸종으로 보냈다.
그래도, 여전히 남은 자식이 있었고 한입이라도 덜어내려면, 어디로든 보내야 했다.
그의 부모는 장월을 궁으로 보내기로 했다.
궁으로 들어가기 전날, 그를 데리러 온 환관이 그에게 물었다. 정말 궁에 들어가겠냐고.
장월의 눈에는 그를 염려하는 환관의 얼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이마에 쓰고 있는 영웅건만이 눈에 깊이 박혔다.
장월은 궁에 들어가면 그 영웅건을 가질 수 있냐고 물었고, 환관은 비단 영웅건을 선물로 주었다.
그의 생에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장월은 영웅건을 꼭 쥐고, 여섯 살에 거세되어 황궁으로 들어갔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끼니도 제대로 못 때우던 그의 눈에 황궁은 별천지였다.
도톰한 솜이 든 이불과 반들반들한 비단 의복, 커다란 전각과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는 음식들… 모든 것이 대단한 것이었다.
어린 그는 그것들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는 배곯고, 추위에 떠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 결심했다.
남성을 잃은 대가를,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눈치 빠르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그는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성공하기 위해 황후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은 황궁의 그 누구도 아는 사실이었다.
힘든 일은 없었다.
황후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었으니.
황후가 팔을 자르라면 팔을 자르고, 주리를 틀라면 틀면 되었다.
쫓아내라면 쫓아내고, 죽이라고 하면… 죽이면 그만이었다.
간단한 일이었다.
황후의 수족처럼 움직인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엄청난 부와 궁에서 막강한 지위를 얻게 되었으니.
환관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황제를 보필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최대한 상세하게 황후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되었고, 황제도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으니.
황제보다 더 오랜 시간 대전에 머무르며, 황제보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아랫것들을 볼 때면, 자신이 황제인지 금의를 두른 그자가 황제인지 헷갈리기까지 했었다.
부는 자꾸만 쌓이고, 궁에서 그의 입지는 더 단단해져 갔다.
궁에서 그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그의 발아래였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영친왕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쯤 궁 밖의 커다란 집에서 수십의 시종과 시녀를 거느리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영친왕만 아니라면…….
영친왕은 황후와 그 집안을 빠르게 몰락시켰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재산과 지금껏 쌓은 권력과 그의 수족을 다 잘라내면서도 목숨만은 앗아가지 않았다.
장월은 영친왕이 했던 말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너는 따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따랐다. 그 끝을 지켜보아라.’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장월은 영친왕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라는 것이 없을 때는 몰랐다. 그것이 사라지는 허망함을.
힘이라는 것이 없을 때는 몰랐다. 그것이 사라지며 얻게 되는 굴욕감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는 황궁의 한구석에서 그가 떠받들던 이들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새파란 환관이, 시종이 그리고 시녀가 그에게 쏘아대는 차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때때로 그의 옷을 찢어놓는 이도 있었고, 욕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똥물을 뒤집어쓴 적도 있었다.
그들이 누구라고 했던가?
그가 다리를 자른 누구의 친우라던가? 그가 죽인 누구의 아우라던가 누이라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도 좋구나.’
그 질긴 목숨은 끊어지지도 않고 그리도 모질게 이어지더니, 죽으라고 갖다 버려뒀는데도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살아난 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의 과거가, 그가 죽였던 이가, 그가 팔을 잘랐던 이가, 그가 무시했던 황제가 그에게 들러붙어서 이제 그만 목숨을 놓으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후회와 한탄밖에 남지 않은 과거가 지독하게 그를 쫓아다녔다.
바람이 좋은 어느 날, 평생 환관으로 산 노인 장월은 색이 바래고 헤진 영웅건만을 남긴 채 조용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