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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73화 (173/230)

173화

장만영은 왕자를 품에 안고 서쪽 문으로 향했다.

서문은 황제가 만약을 위해 자신의 사람을 심어놓은 곳이었다.

장만영은 달렸다.

왕자의 목숨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했다.

궁의 마지막 문을 빠져나온 장만영은 한시름을 놓고 품에 안긴 왕자를 바라보았다.

왕자의 죽에도 독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천상선체시술 덕분인지 중독되지 않은 왕자는 다행히 웃고 있었다.

장만영의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이리 어린아이가 뭘 알며, 무얼 잘못했다고 그 목숨을 앗으려고 하는지…….’

궁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왕자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황후가 그 목숨을 걷어가려는 것을.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장만영은 아무런 걱정 없이 웃음 짓는 왕자의 얼굴을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바라보다, 서늘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았다.

장만영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멀리 서궁 지붕의 용마루에 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만영은 그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장만영은 다리에 급하게 내공을 실어 달렸다.

왕자를 숨겨야 했다.

정신없이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어도, 그자가 자신과 왕자를 쫓기로 마음먹었다면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향하던 장만영의 눈에 다리 밑 거지들의 움막이 모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아래로 뛰어가서 비어있는 아무 움막에나 왕자를 집어넣고 사람들 틈에 섞여 나아갔다.

그자에게 왕자가 어디 있는지 절대 들켜서는 안 되었다.

그러려면 왕자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했다.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내공을 실은 다리가 버거울 만큼 빠르게, 멀리 달리기만 하던 장만영은 갑자기 자신의 눈앞으로 튀어나온 사내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저 사내는 늘 저런 식이었다.

장만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나타나 자신을 놀라게 하곤 했다.

장만영은 자신의 앞에선 사내, 태무령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못 본 사이 눈빛이 더 매서워져 있었다.

장만영은 목울대가 울렁거리도록 크게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어찌 이러십니까?”

“하하하하, 아직도 나를 스승이라 부르는구나.”

태무령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제게 정도를 따르라 가르친 분이 스승님이십니다. 황제와 그의 자손이신 왕자가 바로 이 나라의 정도입니다. 어찌 황후 따위를 따르려 하십니까?”

장만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쯧쯧… 네 놈이 그러니 아직도 그 모양인 게지. 정도라는 것은 이기는 자의 것이다. 짓밟혀 사라지면서 정도를 외친들 그것은 죽기 전의 비명일 뿐이야.”

태무령이 한심하다는 듯, 장만영을 쳐다보았다.

“모두가 정도를 따르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내가 이길 것이고, 이긴 내가 있는 곳이 정도이니라.”

태무령이 말을 마치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

장만영도 태무령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검을 뽑았다.

“그동안 네 놈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보자꾸나.”

태무령이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검을 든 손으로 장만영을 찔러 들었다.

정신없이 머리만을 노리며 좌측과 우측, 정면으로 찔렀다.

“…….”

장만영은 빠르게 태무령의 공격을 피했다.

“더 부드럽게! 피한다고 상대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되지!! 검을 보지 말고 상대의 몸을 봐! 그래야 다음 공격이 어찌 들어갈지 미리 알 수 있다.”

“…….”

장만영은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자세를 낮추어 태무령의 공격을 피했다.

“그렇지!! 상대의 눈을 봐! 자세를 크게 바꾸거나, 공격에 변화를 줄 때면 상대의 눈빛이 먼저 바뀐다!”

태무령의 낮은 목소리에 장만영의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것 같았다.

자신은 절대 태무령을 이길 수 없었다.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친 자이니.

태무령은 자신의 모든 무공을 알고 있었고, 자신보다 몇 수 위였다.

그리고 자신이 스승이라 부르던 자였다.

그가 가르친 것은 무공만이 아니었다.

올바른 길과 정당한 도리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장만영은 태무령의 모든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하늘 같은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장만영은 무인이 궁으로 들어, 그들만의 치열한 암투 속에 뛰어드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이 가는 길이었고 궁에 들어서 목도한 비정함과 이기심, 치졸한 욕심은 바른길을 따르는 그에게 쳐내버리고 싶은 욕구를 북받쳐 오르게 했다.

그렇게 스승과 함께 황제를 지켰다.

그것이 옳은 길이고 참된 도리라고 믿었기에, 무인으로서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데, 어느 날 스승이 황제를 버리고 황후를 따르기로 정한 것이다.

황후가 보여줬다던 그 대단한 비급과 금의신검에 매료된 태무령은 완강했다.

그는 장만영이 당연히 자신을 따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장만영은 그럴 수 없었다.

비열하고 추악한 황후를 따를 수 없었다.

그것은 무인의 길이 아니고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게 평생을 따르던 스승과 등을 지게 된 것이다.

“이놈! 무슨 잡생각이냐!!”

태무령의 목소리에 장만영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

서늘한 칼끝이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쯧쯧…….”

머리만을 정신없이 찔러대던 태무령이 빠르게 검을 내려 장만영의 어깨를 꾹 찌르고 다시 머리를 공격했다.

장만영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한 손으로 누르고 그의 공격을 피했다.

태무령은 쉴새 없이 머리만을 찌르다, 간간이 장만영의 팔뚝이나 옆구리를 찔렀다.

장만영은 그의 공격을 다 피하지 못했다.

그의 몸 곳곳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깊게 찌르지 않아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태무령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헉… 헉…….”

장만영의 무릎은 바닥에 닿아있었지만, 상체는 꼿꼿하게 세우고 태무령을 쏘아보았다.

그의 전신은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흙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의 양으로 보아, 쓰러지지 않고 몸을 세우고 있는 것도 엄청난 정신력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장만영은 태무령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도를 따르는 자신이 옳고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바닥을 향해 기울어가는 몸을 다시금 바로 세워 버텼다.

“왕자는?”

장만영 앞에선 태무령이 그를 내려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장만영은 마음이 놓였다.

왕자를 숨기는 것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

장만영은 답이 없었지만, 여전히 태무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둘 사람의 시선이 매섭게 얽혔다.

태무령에게 왕자 따위 찾아도 그만, 죽으면 더 좋았다.

설령 왕자가 살아서 다시 궁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황후에게 기회는 많았다.

태무령에게는 그것보다 저 사리 분별 못 하는 제자를 어찌 벌해야 할지가 더 중요했다.

지금이라도 싹싹 빌면, 옛정을 생각해서 다시 받아줄 마음도 있었다.

‘대체 정도가 무엇이며, 바른길이 무엇이란 말인가?’

장만영은 그것을 자신에게 배웠다고 하지만, 정작 태무령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강해지고 싶었고, 그것이 무인으로서 옳은 길이고 정당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제자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어떤 입바른 소리도 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제발 그가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길이 다른 두 사람의 끝은 하나밖에 없었다.

누구든 강하지 못한 사람이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이리 끝이 나도 되겠느냐?”

태무령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평생, 정도를 따랐습니다. 나보다 강한 이의 검에 가는 것은 무인다운 죽음이지요. 후회는 없습니다.”

장만영이 덤덤하게 답했다.

“쯧!! 지금이라도 빌어라. 빌면 용서해주마.”

태무령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고는 말했다.

‘그놈의 정도!! 그게 어찌 목숨보다 중하단 말인지!’

당장 죽게 생긴 놈이 저리도 담담한 것에 짜증이 치솟았다.

‘내게 잘못했다 빌라고!! 그럼 다시 받아주겠다고!’

“…….”

장만영은 조용히 태무령의 처분을 기다렸다.

“…….”

어금니를 꽉 깨문, 태무령이 검을 들어 올렸다.

“…….”

장만영은 저항 없이 그의 검과 얼굴을 바라보았다.

“…….”

검을 높이 든 태무령의 손끝이 흔들렸다.

검을 든 채로 장만영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태무령은 검을 든 자세로, 장만영을 노려보았다.

담담한 장만영의 눈에는 태무령을 향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담겨있었다.

태무령은 화가 났다.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손에 죽게 되는 주제에 저런 눈을 하다니 말이다.

‘정도 따위가 무엇이라고. 무인이면 강해지는 것이 우선인 것이지.’

‘어쩌다가 저런 덜떨어진 제자를 들여서 이런 꼴에 이르게 된 것인지.’

태무령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내려서 저항조차 하지 않는 저놈의 가슴에 찔러넣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그리 찌르지 않았던가. 그 대가로 지금처럼 강해진 것 아닌가. 검을 내려서 찌르기만 하면 그러면 된다. 그러면…….’

“흠……!”

태무령이 한숨을 내쉬고 검을 내렸다.

손끝처럼 가슴도 울렁거렸다.

‘어리석은…….’

쐐액―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장만영의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무릎 꿇은 장만영의 몸이 뒤로 밀리며, 울컥 피를 토했다.

입가로 피를 흘리는 장만영의 눈빛만은 태무령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장만영은 일그러지는 태무령의 얼굴과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고스란히 눈에 담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태무령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장만영 앞에서 몸을 떼지 못했다.

장만영에게 꽂힌 시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무령의 등 뒤에서 황후의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급하게 말을 타고 온, 진무사 원진이 활을 든 채 태무령 옆에 말을 멈추었다.

“왕자는?”

원진의 물음에도 태무령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속에서 치미는 무언가가 불편하게 목구멍을 아프게 했다.

원진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태무령은 조용히 몸을 돌려 묵직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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