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신의라고 황궁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황후의 변덕에 어린 목숨이 달린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지금의 황제처럼 허수아비 황제가 될 수도 있었고, 어느 날 싸늘한 시신이 될 수도 있었다.
“…….”
신의의 생각이 깊어졌다.
자신이 어린 왕자에게 천상선체시술을 행한 것이 황후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자신의 안위 또한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황제가 신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발 부탁함세. 아비가 되어서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 아이의 목숨은 황후라는 바람 앞의 등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제발 그 아이를 살려주시게,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절대 황후에게 들키지 않게 함세. 제발… 그 어린 것을 살려주게, 내 자네에게 무릎이라도 꿇음세.”
황제가 정말 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폐하…….”
신의가 황제를 일으키려 했으나, 그는 고집스럽게 무릎을 꿇고 버텼다.
신의의 눈이 황제의 눈과 마주쳤다.
‘제발… 제발…….’ 황제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저 간곡하게 간청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하겠으니, 그만 일어나십시오.”
신의가 자신에게 무릎 꿇은 황제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정말 할 수 있겠는가?”
황제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네, 해보겠습니다.”
신의도 황후가 어린 목숨을 독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의 말처럼 자신은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었다.
신의는 자신의 안위를 내려놓고, 왕자에게 천상선체시술을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자신의 신변에 변화가 생길지도 몰랐다.
계획보다 조금 일찍 신의라는 이름을 물려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석이라면 잘할 게야’
신의 양운은 자신의 후계자인 황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고마워… 오늘 일로 황후가 자네를 부를지도 모르네.”
“알고 있습니다. 은밀한 부위에 병이 옮았다고 하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황제는 신의의 손을 꼭 쥐었다.
* * *
황궁 곳곳에 황후의 눈과 귀가 붙어있었다.
특히, 귀비 유씨의 궁 주변에는 더욱 많은 시선들이 꽂혀있었다.
유씨 궁에는 시종을 드는 최소한의 시녀와 황제가 보낸 호위만을 두었지만, 궁에는 사람의 손이 필요한 일이 많았고 그들은 모두 황후의 사람이었다.
황후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아하하하, 하하하하!”
유씨가 출산한 후, 황후의 불편한 심기는 살얼음판처럼 불안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황후를 바라보는 그녀의 측근들은 흐뭇했다.
“며칠째 신의가 드나든단 말이지? 죽을병에 걸린 것은 아니겠지? 아하하하, 그래. 어린아이들이란 그렇지. 건강하지 못하고 원…….”
황후의 높은 목소리는 흥에 겨웠다.
“하나, 신의라면 치료를 해낼지도 모릅니다.”
진무사를 지내고 있는 황후의 육촌 오라비 원진이었다.
“그렇지, 신의라면 살려낼지도 몰라. 하나, 아이가 허약할 게야. 어찌하는 것이 좋을까? 이번 기회에 편한 곳으로 보내줄까? 벌벌 떨면서 사는 것을 더 지켜볼까?”
황후는 아침에 어떤 머리꽂이를 할지 고르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작디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는 신의 양운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차기 신의가 될 그의 후계자, 황임이 깨끗한 수건으로 신의의 이마를 눌러, 땀을 닦아 주었다.
아이의 자그마한 가슴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점들이 기이한 문양으로 나타났다.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천상선체시술은 어릴 때 행할수록 그 효과가 좋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자는 어떤 독이 닿아도 정화되는 정순하고 깨끗한 기운을 가지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아이에게 해를 가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어지간한 상처에도 병에도 강한 몸이 될 것이다.
“후우…….”
긴 숨을 내쉰 신의 양운이 의자에 앉았다.
천상선체시술을 다시 준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황제는 그 시술을 영원히 받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아이가 건강하게 자란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신의의 후계인 황임이 시술 도구를 챙기다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도 모른 채 황임을 보고 웃었다.
황임이 볼록 나온 아이의 배를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말랑말랑한 촉감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
황임이 아이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아이가 주먹을 꽉 쥐어 그의 손을 그러잡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맑고 티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황임은 아이를 향해 안타까움이 가득한 미소를 흘렸다.
스승님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남을지 명이 다할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황임은 도구를 챙겨 스승님을 따라 유씨의 궁을 빠져나왔다.
황후가 또다시 스승님을 부를지도 몰랐다.
스승님과 자신은 적당한 핑계를 대어 넘어가겠지만, 그 아이는 앞으로 어찌 될지…….
황임은 반달 눈으로 자신을 향해 웃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 * *
유씨는 식사가 차려지는 탁자에 왕자를 안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시중을 드는 이는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 둘이 고작이었다.
시녀 한 명은 차려놓은 음식 하나하나에 은수저를 담갔고, 다른 시녀는 조금씩 집어서 기미했다.
황후가 가장 흔하게 쓰는 방법이 독이었다.
향도 맛도 없는 독부터, 피부에 닿기만 해도 즉사하는 독까지 황후가 가진 독의 종류와 사용 방법은 무궁무진했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유씨가 기미한 시녀를 한 번 보고 식사와 함께 나온 죽을 왕자에게 떠먹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식사하십시오.”
시녀가 유씨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 두어라.”
유씨가 왕자를 내려다보며, 작은 숟가락으로 죽을 떠먹였다.
돌이 다 되어 가는 왕자는, 묽은 음식을 오물거리며 씹어 삼켰다.
유씨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왕자에게 죽을 다 떠먹인 유씨는 식은 음식을 바라보았다.
“음식을 데워오겠습니다.”
시녀가 유씨에게 말했다.
“번거롭게 그럴 것 없다.”
유씨가 식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유씨의 궁에는 다른 곳보다 시녀의 수가 현격히 적었다.
황후를 경계하여 그리한 것이나, 다른 전각보다 시녀들이 힘들지 않을까 늘 걱정이었다.
음식을 일일이 데우는 것도 번거롭고 또다시 기미까지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식은 음식쯤 그냥 먹는 것이 나았다.
“…….”
식사를 하는 유씨의 옆에 선 시녀는 황송한 얼굴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자, 왕자의 친모가 저리 식은 음식을 먹고 있으니 말이다.
“괜찮다, 내가 괜찮다지 않으냐. 원래 뜨거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어차피 식혀 먹을 것인데 이리 식은 것을 먹으니 편하구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유씨의 말에 시녀가 빙그레 웃었다.
“큭……!”
미소를 띠던 시녀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
유씨가 의아한 얼굴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제에게 부탁해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자신 앞에서 얼굴을 구기는 아이가 아니었다.
시녀의 얼굴이 천천히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
유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수저! 음식에 담갔던 은수저 어디 있느냐?”
그녀의 말에 다른 시녀가 급하게 은수저를 내어왔다.
은수저의 끝부분이 아주 느릿하게 색이 변하고 있었다.
독이었다.
황후도 유씨가 기미를 하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겠지.
독이 천천히 퍼져, 기미를 한 직후에도 모르게 한 것이었다.
“장 호위!! 장 호위를 불러라! 어서!!”
유씨의 외침과 함께 은신하고 있던 장만영이 급하게 나타났다.
그는 황제가 내어준, 가장 신임할 수 있는 밀위였다.
유씨는 왕자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품에 한번 꼬옥 안아본 뒤, 장만영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눈에, 입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시녀가 들어왔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저는 동문으로 가겠습니다.”
유씨가 장만영에게 말했다.
왕자에게 먼저 죽을 먹이느라, 유씨 본인은 생각보다 늦게 식사를 했다.
길지는 않지만, 독이 퍼질 때까지 어느 정도는 시간이 있으리라.
유씨는 급하게 강보에 베개를 넣어 쌌다.
“왕자를 부탁드립니다.”
유씨가 짧게 말했다.
“마마, 왕자님은 제가 꼭 지키겠습니다.”
장만영이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
유씨는 장만영의 굳은 얼굴을 한번 바라본 뒤, 강보에 싼 베개를 들고 동문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남은 시녀 또한 울먹이며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던 장만영도 천에 왕자를 싸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서쪽으로 이동했다.
귀비 유씨는 자신의 뒤를 밟는 이들의 기척을 들으며, 더 필사적으로 뛰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황후의 눈에 왕자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황후는 자신에게 거슬리는 것은 작은 것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지난 1년간 두 모자를 가만히 둔 것만으로도 성질 급한 황후로서는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리라.
뜨거운 기운이 일어 뱃속이 홧홧하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독이 퍼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유씨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마, 얼른 가십시오.”
뒤따르다 멈춰선 시녀는 잠시 후, 비명과 함께 더 이상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유씨의 뒤편에는 숨기는 기색도 없이 그녀를 쫓는 자들만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각 주위를 지키는 이들 모두가 자신을 쫓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진짜 왕자가 아니라 중독되어 죽어가는 자신을 말이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울컥 앞으로 치밀었다.
그녀의 입가에 뜨거운 핏덩이가 쏟아졌다.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선 그녀는 강보를 꼭 끌어안고 더욱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입에서는 핏물이 쉬지 않고 흘러나와 강보와 그녀의 앞섶을 적셨다.
유씨는 눈앞이 흐릿해져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걸음 붉은 자국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고, 그녀의 움직임은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처럼 흔들렸다.
유씨는 벽을 잡고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낀 그녀는 강보를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고 앞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꼭 끌어안은 강보를 소중하게 가슴에 붙이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