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황후는 아직도 그날 자신이 눈물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웃었던 것을 기억했다.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던 두 남녀의 사이가 틀어진 꼴이 그리도 즐거웠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후궁은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몸 시중드는 두어 명의 시녀와 함께 궁의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늙어 죽는 길뿐이었으니.
한데, 그 유씨가 회임을 해서 아이를 낳기 직전이라니, 황후의 화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황제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황제가 유씨의 시녀들을 다 내친 것은 황후의 눈과 귀를 자르기 위함이었고, 작은 전각으로 옮긴 것은 황후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황제가 유씨의 뱃속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만했다.
그리도 사랑하는 여인을 거의 열 달 동안 만나지 않았고, 자신의 아이가 커가며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는 기쁨도 포기했으니 말이다.
유씨가 지독한 것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회임하여 거동이 불편하니 더 나은 곳에서, 더 많은 시녀를 두어도 모자랄 판에 시녀도 다 내치고 작은 전각에서 열 달을 버텼으니.
황제와 유씨가 그리 모질게 마음을 먹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씨는 이미 아이 하나를 뱃속에서 잃은 경험이 있었다.
거기다 어찌 된 일인지 회임한 후궁들은 하나같이 건강하게 아이를 분만하지 못했다.
아이를 품은 채 죽기도 하고, 뱃속에서 아이를 잃기도 했다.
표면상으로는 산모나 태아가 건강하지 못하거나 어쩔 수 없는 사고에 의해 그리된 것이라 하지만, 궁에 있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 황후의 짓이라는 것을.
황제와 유씨는 황후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절실하게 바랐다.
얼마 후, 유씨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황후는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갈아댔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경우는 허다했으니, 그리 화를 낼 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 * *
황제 주원은 잠자는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깐의 틈만 있어도 달려와 왕자를 바라보았다.
왕자를 눈에 담고 있는 그 시간이 황제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자, 그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가슴 속 깊이 진하고 아픈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황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두렵다는 감정뿐이었다.
황실의 핏줄로 태어나,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태황후를 어마마마라 부르며 자란 그 어린 시절 말이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아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그를 감싸고 있던 벽이 무너진 것 같았다.
유일하게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아우뿐이었다.
태황후는 언젠가부터 자신을 태자로 인정했다.
무서워서 그녀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자신을 말이다.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자신을, 차기 황제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바라보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태황후의 뜻에 따라 살았다.
나약하고 부족한 태자의 모습에 관리들도 태황후도 날 선 시선을 내려놓고, 조소와 비웃음을 채웠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자신과 아우를 지킬 수 있으면, 조소면 어떻고 비웃음이면 어떠랴.
그리 살면 됐다고 생각했다.
태자인 그는 정확하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고, 영리하게 처신했다.
태황후가 흔드는 대로 마구 휘둘리면서 말이다.
그런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피와 같고 살과 같은 아우였다.
아우는 자신과는 달랐다.
강하고 굽히지 않는 아우의 성격은 그가 옆에서 말린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자신과 아우에게서 멀어졌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그들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아우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시선들이 쑥덕쑥덕 모의해서 내린 결론은 아우를 변방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태황후의 뜻에 반대했다.
몇 날 며칠을 빌어도 그녀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그를 말린 것은 아우였다.
전쟁 중인 변방으로 가야 하는 아우가 자신을 위로했다.
허울뿐인 태자는 전쟁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우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무탈하기를 빌 뿐이었다.
변방으로 가 소식조차 끊긴 아우는 가슴속에 깊게 스며들어, 문뜩문뜩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으로 전해졌다.
어린 왕자의 얼굴 위로, 아우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태황후 따위에게 빌지 말라고 자신을 말리던 아우가.
과단한 얼굴로 변방으로 떠나던 그 아우가 말이다.
황제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태자에서 황제라는 이름으로 바뀌어도 그의 삶은 변한 것이 없었다.
허수아비처럼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앉아, 그들이 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태황후의 먼 친척이라는 새로운 황후는 얼굴만 쳐다보아도, 역겨웠다.
부부의 연을 맺은 그녀는 태황후만큼이나 사납고 악독했다.
아무것도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고,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세월이 흐르는 대로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황제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다.
바로 자신의 아이 말이다.
지금까지 잃은 다른 것들처럼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황제는 아이에게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살라는 뜻에서 후(煦)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밀위를 몽땅 유씨의 전각으로 보냈다.
아들 후만 무사하다면 자신의 생명과 같은 밀위가 아니라 더한 것도 내어 줄 수 있었다.
* * *
신의 양운이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내 신의께 치료를 받아야 하니, 모두 나가거라.”
황제가 전에 없던 명을 내렸다.
황제 주위를 지키던 시녀와 환관, 호위들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한데 환관 장월, 그만은 황제의 말을 못 들은 척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나가라지 않느냐?”
유순하기만 하던 황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소신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소서.”
장월이 꿋꿋하게 버텼다.
입을 꽉 다문 황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나는 의원에게 치료받는 것도 네놈 없이는 하지 못하는구나! 뭐가 그리도 보고 싶고 뭐가 듣고 싶은 게냐. 내 바지를 벗을 터이니, 내 아랫도리 구경을 실컷 해 보거라! 네 놈이 그래야 속이 시원하다면 그리해! 내 내밀한 곳이 어찌 생겼는지 샅샅이 살펴서 황후께 고하거라!!”
황제가 악에 받친 고함을 질러댔다.
환관 장월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게는 황후와 후궁, 궁녀 외에도 여인들이 차고 넘치게 많았기에, 내밀한 곳에 병이 생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황제 주원은 그다지 많은 여인과 관계를 하지는 않았지만, 병이 생길 수 있었다.
그것을 환관과 시녀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황후의 명이 있기는 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신의에게 은밀한 곳을 치료받는 시간쯤은 자리를 피해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소신 물러가겠습니다.”
장월이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붉어진 얼굴로 장월을 노려보던 황제는 그가 밖으로 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풀고 신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이 오게.”
신의 양운이 황제에게 몇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으흠…….”
황제는 신의에게 더 가까이 오라는 명을 내리는 대신, 자신이 일어서서 신의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
신의가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들게, 시간이 없네.”
황제의 낮은 목소리는 서두르고 있었다.
황제의 말에 신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의원은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게지?”
황제가 다짜고짜 물었다.
“…네, 그렇사옵니다.”
양운이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그럼, 사람 좀 살려주게.”
황제가 신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분부만 하십시오. 소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천상선체시술은 준비가 되었는가?”
“예, 준비되었습니다.”
신의가 답했다.
“천상선체시술을 내 아들, 후에게 해주시게.”
황제의 얼굴은 간절하고, 단호했다.
“…….”
신의 양운은 답하지 못하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천상선체시술은 신의가 황제에게 행할 의술로, 나라가 황후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대로 황제에게 시행되던 것이었다.
시술 방법이 복잡하고, 준비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신의밖에 없었다.
최초의 신의가 신의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천상선체시술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상선체시술을 시행하는 데에는 신과 같은 기술이 필요로 했기에.
황제가 힘이 있던 때에 천상선체시술은 황제가 즉위함과 동시에 받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나, 권력을 거머쥔 황후는 황제에게 그 의술이 시행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허수아비 황제가 건강해서 무엇하겠는가?
천상선체시술을 받으면, 여차했을 때 없애기도 어려웠다.
보는 눈이 있어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황후와 그 세력들은 시술 준비를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미루었다.
그렇다 보니, 황제가 천상선체시술을 받게 되는 것은 즉위하고도 여러 해가 지난 후였다.
대대로 황제의 사망 원인의 1순위는 독살이었다.
천상선체시술은 그것에 대비한 것으로, 신체를 천상선체로 만들어 어떤 독에도 자연 치유가 되게 했다.
더불어, 상처의 회복에 걸리는 시간도 짧아지고 질병에 저항하는 힘이 강해졌다.
황권이 강하던 시절, 황제들은 건강을 위해 무공을 익혔다.
천상선체가 무공을 익히면 단전과 혈도의 한계가 없어지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속도로 내공이 증진되었다.
이 엄청난 시술은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었다.
지금까지 황제 외에는 아무도 그 시술을 받은 적이 없기에.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황후조차도 감히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을 왕자에게 시행하라고 한다.
물론 왕자가 황제가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직은 황제가 아니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물고 늘어진다면 반역이 될 수도 있었다.
황제만 받을 수 있는 시술을 왕자에게 행한 것이니.
황제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 신의 또한 어린 왕자를 돕고 싶었지만, 쉬이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상선체시술을 내 아들, 후에게 해주시게.”
황제가 망설이는 신의에게 다시 말했다.
“…….”
“신의는 후가 아프다 하면 바로 가서 치료할 수 있지 않은가. 후에게 그것을 해주게.”
황제의 간곡한 목소리에 신의의 눈동자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