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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70화 (170/230)

170화

노인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있다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지. 세월을 돌리고 싶네, 젊음을 되찾고 싶어. 다시… 새로 살고 싶어… 으흐흐흐.”

“…….”

걸윤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늙은이가 생명을 구해준 이에게 고마운 줄도 모르고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지? 으흐흐흐, 내가 이제 바라는 게 무엇이 있겠나? 죽을 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내게 남은 것은,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뿐이라네.”

노인의 얼굴을 뒤덮은 주름이 한층 깊어 보였다.

“아직도 살아야 할 날들이 있습니다. 남은 삶도 생각하셔야지요.”

걸윤이 노인을 위로하며 따뜻하게 말했다.

“…알고 싶은 게 무엇인가?”

아련하던 노인의 표정이 단호하게 바뀌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인의 얼굴을 보며, 걸윤은 낮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슴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종이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죽다가 살아나서 알 수 없는 얼굴로 웃던 노인의 얼굴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한참을 종이를 내려다보던 노인이 걸윤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났소?”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 이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걸윤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으흠…….”

노인이 한숨을 내쉬고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를 치료했던 자가 신의가 맞지?”

“네, 그렇습니다.”

“신의께 물어보시게, 나보다는 신의가 더 잘 알게야.”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침통한 얼굴로 걸윤이 꺼내놓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걸윤은 그런 노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 *

걸화는 의약당으로 들어서는 걸윤을 향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신의님 계셔?”

걸윤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걸윤의 얼굴을 보건데 뭔가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응, 스승님께 무슨 일인데?”

걸화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넌 알 거 없어.”

걸윤이 톡 잘라서 말하고는 신의의 방으로 향했다.

“치이…….”

걸화가 입술을 씰룩이며 걸윤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다가 다시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신의님! 계십니까? 배걸윤입니다.”

걸윤이 신의의 방문 앞에서 안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시게.”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신의는 집중해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걸윤이 들어가자, 붓을 내려놓고 어수선하게 놓여있던 서책과 벼루를 옆으로 밀어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걸윤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닐세. 차 한잔하시겠나?”

“괜찮습니다.”

신의를 바라보는 걸윤의 얼굴에서 설핏 긴장감이 돌았다.

“무슨 일인가? 자네가 나를 다 찾아오고.”

신의는 걸윤이 자신의 방까지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걸윤이 어디가 아프거나 얼마 전처럼 아픈 사람을 데려오지 않는 이상 신의를 따로 만날 이유는 없었다.

걸윤이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음… 얼마 전에 모셔온 어르신은 궁에서 나온 환관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 모셔온 것이지요. 그분께 알고 싶은 것을 물었더니 신의께 여쭈라고 하더군요.”

“음? 대체 그게 무어길래 그러는가?”

집히는 것이 전혀 없는 신의가 다시 물었다.

“…….”

걸윤이 품에 손을 넣어 차곡차곡 접힌 종이를 꺼내어 펼쳐 보였다.

종이에 그려진 기이한 무늬를 내려다보는 신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신의는 종이를 뚫어버릴 듯이 쳐다보았고, 걸윤은 그런 신의를 바라보았다.

“이, 이것은…….”

새하얀 신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쾌한 것이 아니고 어딘가가 아픈 것 같다고… 걸윤은 생각했다.

“영친왕이 가슴에 이 문양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왜 찾는지 아십니까?”

걸윤의 말에 신의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으흠… 그 일을 개방에 맡긴 지 꽤 오래된 것은 알고 있네. 그 사람을 찾는 연유까지는 알려 줄 수 없네.”

신의의 얼굴이 다시 제 빛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일을 개방에 맡긴 것은 신의도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

“가슴에 똑같은 문양이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걸윤이 묵직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무어라!? 그, 그분께선 어디 계신가?”

신의의 목소리가 과하게 높아졌다.

“그…분…이요?”

걸윤이 의아한 눈으로 신의를 바라보았다.

“어디 계신가?”

신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으흠…….”

걸윤의 눈이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의와 마주쳤다.

무언가를 알아내는 데 있어서 이런 일은 흔했다.

서로 한 가지씩 가지고 상대방이 먼저 내어놓기를 바라는 상황.

걸윤은 이런 기 싸움에 익숙해 있었기에 어설프게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연천을 위해 이 일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고, 신의는 연천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의의 얼굴이 너무 절실했다.

신의와 얽힌 시선을 거두지 않은 걸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연…천입니다.”

걸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걸윤이 다급하게 신의를 따라갔다.

걸윤이 짐작한 대로 신의는 연천의 전각으로 곧장 향했다.

곽림이 신의를 보고 인사했지만, 신의는 못 본 것인지 어쩐 것인지 알은체도 하지 않고 바로 연천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걸윤이 신의의 뒤를 따랐다.

조용히 명상하던 연천은 급하게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신의가 상기된 얼굴로 연천을 보더니, 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걸윤 대협에게 들었습니다. 가슴을 보여주소서.”

신의가 과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

연천이 신의 뒤에 선 걸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황한 걸윤은 망설였지만, 연천의 눈빛은 걸윤을 재촉했다.

“그… 내가 네 가슴에 있는 문양에 대해 좀 알아보고 있었어… 신의께서 그것에 대해 아시는 모양이야…….”

걸윤이 연천에게 적당히 상황을 설명했다.

다짜고짜 가슴을 보여달라는 신의를 보고 연천이 놀랐을 테니.

연천이 걸윤을 흘겨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 대해서 알아보는 친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앞섶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신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으흠…….”

무슨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바쁜 것 없이 여유만만하던 신의의 눈에 간절함과 다급함이 가득 차 있었다.

보여주지 않고 해결될 일이 아닐 듯싶었다.

연천이 걸윤을 향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을 한 번 더 쏘아 보낸 뒤, 천천히 앞섶을 열었다.

신의는 달려들 듯이 연천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기이하게 생긴 문양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영 민망스러운 연천은, 멀리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의는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연천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지 못했다.

연천은 신의가 이제 그만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굳은 것처럼 자신의 가슴에 꽂힌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그런 신의를 말린 것은 걸윤이었다.

“이제… 그만 되지 않았습니까?”

걸윤이 신의를 연천에게서 떼어내며 말했다.

신의는 걸윤이 잡아끄는 대로 물러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염려스러운 얼굴로 신의를 보던 연천과 걸윤의 시선이 마주쳤다.

‘왜 저러셔?’

연천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몰라.’

걸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천은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걸윤을 쳐다보았고, 걸윤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의를 바라만 보고 있던 걸윤이 밖에 나가 냉수 한 사발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

걸윤이 신의께 냉수를 내밀었다.

걸윤을 흘깃 쳐다본 신의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우…….”

긴 숨을 내쉬고도 신의는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신의가 낮고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제가 스승님께 신의라는 이름을 받기 얼마 전의 일이지요.”

신의가 연천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 *

황후와 그녀의 집안이 황실을 집어삼킨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새로운 황후는 이전 황후 집안의 조카나 친척, 아무튼 그 일가에서 나왔다.

몇 대째 황후 자리를 차지하고 황실을 쥐고 흔들었지만, 황후들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

황후에게 아부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황후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아름다운 여인이 태어나 황후가 될 운명이라고 했고, 입바른 소리를 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악한 짓을 많이 한 황후 집안에서는 황제가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어찌 되었건, 벌써 5대째 황후를 배출해 낸 원씨 집안은 아들이 귀했고, 원씨 성을 가진 황후들은 황제를 낳지 못했다.

그러니 황제들은 후궁의 배에서 난 아들들이었고, 그들은 황후의 괴롭힘과 핍박 속에 자라기도 전에 시들어갔다.

현 황후는 전대 황후인, 황태후의 6촌 언니의 손녀였다.

그녀의 전각에는 황실의 주요 관리들이 줄을 지어 황후의 말을 기다렸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이곳이 정사를 논하는 곳인 줄 알 것이다.

황후의 방에 있는 고관들은 하나같이 황후의 친척이나 인척, 아니면 그 친인척과 가까운 이들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던 황후가 탁자를 큰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어찌 이리도 허술하게 일을 한단 말입니까?”

황제 앞에서도 큰소리를 뻥뻥 쳐대던 고관들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황후의 눈치만 봤다.

“내 그리도 잘 감시하라고 일렀거늘, 어찌 산달이 되어서야 그것의 회임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까!!”

화가 난 황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제 주원의 후궁 중 하나인 귀비 유씨가 회임을 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유씨는 회임 사실을 숨길 수 있는 데까지 철저하게 숨겼다.

귀비 유씨는 황제가 아끼는 후궁이었다.

황후의 처소에는 합궁 날, 얼굴 한번 내비칠까 말까 하면서 유씨의 처소에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황후의 눈과 귀들이 유씨에게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한데, 어느 날부터인가 황제가 유씨의 처소에 발걸음을 딱 끊었다.

유씨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시녀들도 다 쳐내고 황궁의 후미진 곳의 작은 전각으로 처소까지 옮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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