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연천은 아무런 대꾸 없이 걸윤이 내미는 술잔을 받아 들이켰다.
“어― 그래, 그래. 쭉 들이켜. 쭉―쭉―”
걸윤이 술을 마시는 연천에게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리곤 다시 연천의 잔에 술을 채웠다.
“…….”
연천은 걸윤을 향해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가 내미는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걸윤은 연천의 잔이 비기가 바쁘게 술을 따랐다.
걸윤이 워낙 급하게 연천에게 술을 먹이는 통에, 챙겨온 세 병의 술은 금세 동이 났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연천이 볼 일을 다 봤다는 듯이 말했다.
“덥지 않냐? 우리 멱 감을까?”
“싫다.”
“왜?”
“그냥.”
“너! 방구석에만 너무 있어서 땀 냄새 나. 좀 씻어야겠다.”
걸윤이 말을 하며 연천을 확 밀었다.
“…….”
연천이 상체를 틀어 피했다.
걸윤이 반대쪽 손으로 다시 연천을 밀치자, 연천이 손을 들어 걸윤의 팔을 막았다.
걸윤이 벌떡 일어서자, 연천도 따라 일어났다.
걸윤은 포기하지 않고 연천의 다리를 걸었다.
연천은 발을 굴려 한 척가량 몸을 띄웠다가 다시 제자리에 착지했다.
그사이 걸윤이 연천의 복부에 강하게 장력을 날렸다.
연천은 옆으로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 다시 걸윤에게 향했다.
걸윤이 팔을 돌려 손날로 연천의 어깨를 향해 강하게 밀어치니, 연천은 손바닥을 펴서 막아냈다.
두 사람은 작정하고, 빠르게 맨손을 부딪쳐댔다.
걸윤의 손이 더 강했지만, 연천이 더 부드러웠다.
옷소매가 펄럭대며,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점점 눈으로 좇기 어려울 정도로 빨라졌다.
첨벙―
“어푸…푸… 어푸…….”
너럭바위 아래의 계곡물에 빠진 걸윤은 얼굴을 찡그리며 바위로 기어 올라왔다.
연천은 뒷짐을 지고 서서, 바위로 올라오는 걸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말로 해! 그럼 들어주마.”
걸윤은 온몸이 홀딱 젖어서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뭘 들어줘? 한여름에 계곡에서 씻자는 건데.”
걸윤이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대꾸했다.
연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속이 너무 빤히 보여서 속아 주기도 힘들다. 무슨 일인지 말하고 싶으면 찾아오든가.”
연천이 말을 끝내고, 가벼운 걸음으로 보은장으로 향했다.
연천의 뒷모습을 보며 걸윤은 얼굴을 팍 구겼다.
‘그냥 이야기할까? 에이… 딱 한 번만 더 보면 확실할 거 같은데…….’
걸윤은 개방에서 본 것을 연천에게 말을 할지 말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었으니.
비밀을 밖으로 끄집어낼지 묻어버릴지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영친왕이 무슨 일로 가슴에 문양이 새겨진 사람을 찾는 것인지 확인한 뒤에 정할 생각이었다.
연천과 같이 술 마시고 같이 잠들고, 같이 씻는 일은 자주 있었다.
가슴의 문양을 한 번 더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연천이 걸윤의 의중을 의심하는 통에 일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 * *
여름의 새벽은 공기 가득 습기를 머금었다.
서늘하면서도 찝찝함이 남는 묵직한 공기였다.
연천은 언제나와 같은 시각, 검을 들고 연무장에 도착했다.
늘 혼자이던 연무장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이 들린 곳에는 걸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평소 걸윤은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보은장에 있는 지금은 아니지만, 중원을 다닐 때는 거지 행색으로 돌아다닐 때가 많았는데 검을 차고 다니는 건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개방엔 타구봉법이 있었지만, 걸윤은 권법이나 장법을 주로 연마해 왔기에 늘 빈손으로 다녔다. 걸윤 스스로도 자신의 애병은 양손이라고 말했으니.
“으흠…….”
연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그게 진행 중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걸윤이 저리 안 하던 짓을 해대니 말이다.
“나도 수련 좀 하려고.”
걸윤이 검을 허공에 대고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네가 쓰던 그 연무장에 가서 하지!”
걸윤이 자신의 뇌전에 맞은 이후, 새벽마다 수련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연천의 개인 연무장과는 떨어진 곳이었고, 검을 가지고 하지도 않았다.
“…….”
걸윤은 어깨를 으쓱일 뿐,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무슨 검이야?”
“히… 멋있지? 교준 대협한테 부탁해서 하나 얻었어.”
걸윤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연천은 웃는 걸윤의 얼굴에 대고 표정 없이 대꾸했다.
“나도 검법 좀 배워보려고. 야! 너 그거 좀 가르쳐 주라. 그때 나 기절시킨 그거, 몸을 짜릿하게 만드는 그 검법. 그건 이름이 뭐냐?”
“…….”
연천은 걸윤을 무시한 채, 연무장의 다른 쪽으로 가서 검을 뽑아 허공을 베어 나갔다.
언제나와 똑같은 자세로.
걸윤도 연천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서 검을 휘둘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천과 걸윤의 검세에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길게 베고, 짧게 내리치고 옆으로 가르고 위로 올려치고.
하지만, 내공의 사용이나 그 위력은 확연하게 달랐다.
걸윤은 그저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고 연천은 검에 뇌전을 실었으니.
주변의 사물을 베지 않고 검의 빛이 유난히 밝지 않게 딱 필요한 만큼만 뇌전을 실었다.
해가 떠오르자 연천은 검을 내려, 검집에 갈무리하고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걸윤도 검을 검집에 넣고 연천을 따라 걸었다.
“너는 가주라 새벽에 수련하고 나면 목욕물도 딱딱 받아놓고 좋겠다.”
걸윤이 말하면서 연천의 전각으로 따라 들어갔다.
“네 전각에 가서 씻어라.”
연천은 걸윤이 기거하는 곳에도 자신이 가진 것 못지않은 욕실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전각을 전담하는 시녀도 있었다.
목욕물 정도야 말만 하면 금방 준비해 줄 것이다.
“왜? 나랑 내외해?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에? 갑자기?”
걸윤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연천은 걸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자신의 전각 내에 있는 욕실로 들었다.
수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걸윤이 넉살 좋게 욕실로 따라 들어가더니 먼저 옷을 훌훌 벗고 목욕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걸윤이 하는 양을 쳐다보던 연천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걸윤이 알몸으로 급하게 나와 연천을 붙잡았다.
“너 안 씻어? 이 여름에? 너 그러다 피부병 생긴다. 네가 피부병 생겨봐라. 신의께서 밤새도록 약재를 달이고, 교준 대협이 산골짜기에 약수 뜨러 다니고, 내 동생 걸화가 네 걱정한다고 울고불고… 그럼 나는 걸화를 달래야지. 너무 여러 사람이 힘들지 않겠어?”
“으흠… 대체 나를 그렇게 씻기려는 이유가 뭐야?”
연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또 말해줘? 여름에 안 씻으면 피부병 걸리고, 네가 피부병이 걸리면 신의께서…….”
“됐다! 됐어! 그만해라, 내가 알면서 그냥 당해준다. 귀찮아서 그냥 당해 주니까 그렇게 알아.”
연천도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
걸윤이 연천의 가슴 한가운데 난 문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연천은 자신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는 걸윤을 보았다.
그리고, 침음을 흘렸다.
“몰래 뭘 하려면 티 안 나게 하던지. 그렇게 쳐다보면 어쩌라는 거야?”
연천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걸윤이 어색하게 웃더니, 자신의 손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이거 안 지워지는 거야?”
너스레를 떨면서 침 묻은 손으로 연천의 가슴을 문지르려 했다.
“저리 가!!”
연천이 걸윤을 피해 탕으로 쏙 들어갔다.
연천을 따라 탕으로 들어간 걸윤의 얼굴이 묵직하게 변하고 있었다.
‘맞다. 그 문양이 틀림없다.’
* * *
보은장을 나선 마철용은 소강과 단원들과 함께 묵었던 객잔으로 들었다.
객잔 자신의 방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방문을 닫고도 주변을 한번 돌아본 마철용은 방 오른편 제일 끝 기둥 아래를 살폈다.
작은 글씨로 숫자 몇 개가 쓰여 있었다.
마철용은 쓰여 있는 숫자를 지우고 방을 나섰다.
마을 외곽의 물레방앗간에 도착한 마철용은 뒤편의 왼쪽 주춧돌에 쓰여 있는 숫자를 확인하고 지웠다.
마철용은 며칠간 두서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확인했다.
깜깜한 어둠이 내린 뒤, 마철용은 무명촌에서 제법 떨어진 산을 타기 시작했다.
한참을 길도 없는 산을 따라 걷더니, 모닥불이 피워진 작은 동굴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동굴에 있던 이들이 마철용을 쳐다보았다.
“적당히 좀 하지. 사람을 너무 빙빙 돌리는 거 아니야?”
마철용이 기운 없이 말했다.
마철용이 소강 일행을 찾은 방법은 소강이 만든, 엇갈린 일행을 찾는 혈풍단의 방법 중 하나였다.
헤어진 장소에 다음 장소를 암호로 써놓는다.
그리고, 그다음 장소에 또 다음 장소를 써놓고, 이렇게 몇 개의 장소를 넘어 만날 곳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불안한 소강은 꽤 여러 곳을 돌아 이곳에 대한 정보를 써놓았다.
어쩔 수 없이 소강이 이끄는 대로 중구난방으로 이곳저곳을 헤맨 마철용은 과한 소강의 조심성에 피곤함이 밀려왔다.
“조심해야지. 혹시나 해서 써놨는데, 어떻게 나왔어?”
보은장으로 들어가 그를 구할 방법을 모색하던, 소강이 마철용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너… 중원을 떠도는 수일검의 이야기를 들었어?”
마철용이 작게 물었다.
“…….”
듣지 못했다.
영친왕의 성에서 나와 도망가기 바빴고, 무명촌에 들어서는 보은장 주변을 살피느라 무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으흠… 상관량이 영웅삼존이라는 인간들과 손을 잡고 교주님을 해한 거래.”
마철용의 낮은 목소리가 묵직했다.
“뭐… 뭐?”
소강이 눈을 끔뻑였다.
“교주? 상관량?”
“상관량이 교주는 무슨… 원수 놈이지.”
마철용의 굵은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그는 보은장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철용과 소강 앞에는 장작불이 붉은빛을 내며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 * *
마철용과 소강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혈풍단의 단주 마철용이 천마를 뵙습니다.”
“혈풍단의 부단주 소강이 천마를 뵙습니다.”
“천마를 뵙습니다!!”
그들 뒤로 네 명의 단원이 연천 앞에 오체투지 했다.
연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옆에 선 모충일은 연천이 정말 천마라도 된 것만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