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오랜만이구나…….”
모충일은 오래전 불렸던 자신의 호칭에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한때는 그렇게 불렸었지…….’
혈영천마께서 그리되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비슷하게 불리고 있으리라.
마철용이 벌떡 일어나 모충일을 향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주님을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만하거라.”
연천도 있는 앞에서 마철용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불편했다.
모충일의 말에 마철용이 마지못해 고개만 조금 들었을 뿐이었다.
모충일이 연천을 쳐다보았다.
연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둬도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이분의 물음에 빠짐없이 이야기하거라!”
모충일이 연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마철용이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반듯하게 답했다.
혈영천마의 호위였던 모충일이 보은상회 가주를 ‘이분’이라 칭하며 공대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뇌전신공을 사용한다는 것을 어찌 알았느냐?”
연천이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것이 혈영천마님의 뇌전신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가주의 뇌전신공은… 그… 지난번에 마차를 빌릴 때 보았습니다. 그분과는 기운이나 색이 다르긴 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마철용이 제법 상세하게 설명했다.
“마차를 빌려?”
연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친왕의 성에서 검을 훔치다가 쫓기게 되어… 마차를 빌린 적이 있습니다.”
연천의 머릿속에 곽림과 검을 맞대면서, 마차를 빌려달라고 설득하던 덩치 큰 복면인이 떠올랐다.
연천은 피식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눈치 없고 답답한 인사구먼…….’
“이곳에는 왜 온 것이냐?”
연천이 다른 질문을 했다.
“말씀드린 대로 가주가 뇌전신공을 어찌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그분을 해한 것이라면 복수하려고…….”
우직하게 말하던 마철용은 연천에게 존대하던 모충일의 모습이 떠올라 말끝을 흐렸다.
“으흠…….”
연천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한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철용이 말했다.
“하거라.”
연천이 짧게 답했다.
“뇌전신공을 사용하는 다른 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뭐라?”
연천과 모충일은 동시에 마철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럴 수는 없었다.
혈영천마가 사라지기 전까지 모충일은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주 가끔 그가 시키는 일을 할 때는 빼고는 말이다.
그분은 사라지고 나서 불과 얼마 뒤부터 연천과 둘이 살았다.
다른 이에게 뇌전신공을 가르쳐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찾아야 했다.
혈영천마와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 사람이 연천보다 다음 천마에 더 적합할 수도 있었다.
“그자가 누구냐?”
질문하는 모충일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사오나, 영친왕의 호위무사 시험을 치를 때 파월산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뇌전신공을 사용했습니다.”
“흐음…….”
마철용의 말에 잔뜩 기대했던 연천이 기운 빠지는 숨을 내쉬었다.
“계곡 뒤의 동굴에서였나?”
“어떻게 그걸……?”
마철용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으흠…….”
연천은 그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파월산에서 구한 수실이 이자의 것이었나…? 인연도 참…….’
“…….”
마철용은 연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 *
익숙한 천상의 집무실에서 일어나던 걸윤은, 종이가 덕지덕지 붙은 한쪽 벽면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언제나 찾을 사람이나, 개방 총타에서 알아야 할 일들이 쓰여 있는 종이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응……?”
걸윤이 벽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종이에 시선을 멈추었다.
오래된 종이는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은 그럭저럭 알아볼 만했다.
“아버지! 아니! 방주님! 이거, 이거… 뭡니까?”
걸윤이 구석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이야 사람을 찾아달라고 의뢰가 들어온 것 아니냐? 2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못 찾았어. 개방도로서 부끄러운 일이지…….”
“그러니깐… 이 문양이 뭡니까?”
걸윤이 종이를 유심히 살폈다.
그 종이에는 기이한 모양의 문양만 그려져 있을 뿐, 누가 의뢰한 일인지 그 문양은 무엇인지,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인지 기본적인 설명조차 없었다.
“음, 그런 모양이 가슴에 있는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천상의 말에 걸윤이 급하게 눈을 껌뻑거렸다.
“누가… 왜… 그런 사람을 찾는다고 합니까?”
“으흠… 왜 그런 자를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천상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말을 멈추었다.
걸윤이 빨려 들어갈 듯 천상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 일을 의뢰한 사람이… 영친왕이다.”
“에? 영친왕이요?”
천상의 말에 걸윤이 눈에 띄게 화들짝 놀랐다.
“…….”
천상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긴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니… 왜, 왜 그런 사람을 찾는데요?”
걸윤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말을 하지 않더구나. 너, 뭔가 아는 게 있는 게냐?”
“…….”
천상의 물음에 걸윤이 고민했다.
걸윤은 살면서 지금껏 아버지에게 무엇을 숨긴 적도 없었고, 거짓을 말한 적도 없었다.
굳이 그럴만한 일을 만들지도 않았고, 어지간히 잘못해도 아버지는 너그러웠기에 숨기지 않고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았다.
걸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저 특이한 문양이 가슴에 새겨진 사람은 백연천이었고, 그것을 찾는 사람은 영친왕이었다.
영친왕이 무슨 일로 연천을 찾는 것일까?
그것도 20년이 넘도록 말이다.
영친왕의 지금까지의 행보를 볼 때, 연천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걸윤은 불편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
천상은 재촉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걸윤을 바라보았다.
걸윤이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면, 천상은 그냥 넘어갈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다.
아무리 개방의 일이 중요하고 영친왕을 무시할 수 없다지만, 해야 할 일과 하지 않는 게 나은 일 정도는 충분히 분별할 줄 아는 분이라고 말이다.
“으흠…….”
걸윤이 시름 섞인 숨을 내뱉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은상회 가주의 가슴에서 저런 것을 본 듯합니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천상도 걸윤의 말에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영친왕이 비밀리에 맡긴 일은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하지만, 뭔가 심각했고 영친왕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았다.
“영친왕께 알리실 겁니까?”
걸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천상이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의뢰한 지 20년이 넘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영친왕에게 알릴지 말지를 결정하자꾸나.”
천상의 말에 굳었던 걸윤의 얼굴이 펴졌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걸윤이 말에, 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매미와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강한 햇살은 살결에 난 작은 숨구멍도, 가느다란 핏줄도, 보일 듯 말 듯 한 솜털조차 훤히 비추어주었다.
걸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지음… 속골… 금문… 부양…….”
혈자리를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말이다.
잔뜩 집중하고 있던 걸화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볕 좋은 마당 한편의 넓은 나뭇가지에 기대어 앉은 걸윤은 걸화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확인을 해 보면 좋겠는데. 아닐 수도 있잖아…….’
생각하던 걸윤이 벌떡 일어섰다.
“야! 어디 가?”
걸화의 물음에 걸윤은 그제야 걸화가 거기 있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 어디를 가지……?”
일어서서 걷던, 걸윤이 중얼거렸다.
“너 더위 먹었냐?”
걸화가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그래! 더위, 더위… 물놀이 가자!”
걸윤이 혼잣말처럼 하더니, 의약당을 나섰다.
걸화가 삐딱한 얼굴로 걸윤이 사라진 의약당 입구를 쳐다보았다.
‘아무튼 배걸윤 이상해. 소천 소저가 사라져서 충격받았나? 그 소저는 그리 가버리고 연락도 없어…….’
걸화는 소천이 조용히 보은장을 떠난 것이 걸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배걸윤이 마음에 안 드는 뭔 짓을 했겠지. 에효… 모처럼 몽달귀신을 면할 기회였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걸화의 양쪽 다리와 발등에는 고슴도치처럼 빼곡하게 침이 놓여있었다.
“있소?”
걸윤이 연천의 전각 앞에 서 있는 호위 곽림에게 물었다.
“네.”
곽림이 짧게 답했다.
“연천아!”
걸윤이 연천을 부르며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
연천은 명상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는 이 더운 날 방에서 뭐 하냐? 우리 시원한 계곡에 가자!”
걸윤이 유쾌하게 말했다.
“계곡은 무슨…….”
연천은 다시 눈을 내리감았다.
“야! 야! 너, 방에서 그러고만 있으면 엉덩이에 곰팡이 생겨! 나가자!”
“…….”
연천이 걸윤을 어이없게 쳐다볼 뿐이었다.
“가자! 가자! 너 바람 좀 쐐야 돼. 답답하지도 않냐?”
걸윤은 아예 연천의 팔을 잡아당겼다.
“…….”
연천은 마지못해 일어나면서 걸윤을 흘겨보았다.
“…….”
걸윤이 연천의 시선을 피했다.
“……?”
연천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걸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하려고 저러는 게지?’
지금 걸윤의 표정은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 걸화의 얼굴과 똑같았다.
연천은 일단 걸윤이 이끄는 대로 전각을 빠져나갔다.
저 남매가 뭔가 일을 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막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연천을 끌고 앞서 걷던 걸윤이 걸음을 멈추었다.
“술 챙겨갈까?”
연천에게 물은 걸윤은 그의 대답 따위 기다리지 않고, 잽싸게 부엌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바구니에 술과 간단한 안주를 담아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부엌에서 일하는 시녀들을 어찌나 잘 구워 삶아놨는지, 식사 시간 외에도 종종 술이며 음식을 얻어먹곤 했다.
걸윤은 연천을 끌고, 보은장에서 멀지 않은 계곡으로 향했다.
연천은 불편한 얼굴로 걸윤을 따랐다.
“자― 한잔 받아라.”
걸윤이 연천에게 술을 따라서 잔을 내밀었다.
“…….”
맑은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무더운 날, 시원한 계곡 아래의 너른 바위에 앉아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한가로운가.
하지만, 연천의 눈에는 걸윤을 향한 의심이 가득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