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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60화 (160/230)

160화

소천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사람이 너무 부끄러우면, 진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걸윤은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은 이미 파해서 인적도 드물었고, 해가 진 사위는 어둑했다.

언제까지고 아무도 없는 장터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걸윤이 말을 꺼냈다.

“소저… 내게 업히는 것이 어떻겠소? 너무 불쾌하게 생각할 필요 없소. 그저 소저의 몸이 불편하여 내가 잠시 돕는 것뿐이니, 그리 생각하고 내게 업히시오.”

말을 마친 걸윤은 쪼그리고 앉아 소천에게 등을 내밀었다.

걸화에게 들어서, 소천이 개방도를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업히는 것을 꺼리겠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보은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으흠…….”

지금 이 발로 걸을 수도 없고, 장터에서 버틸 수도 없었다.

소천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걸윤의 등에 업혔다.

걸윤은 가볍게 일어서서 소천을 추켜올렸다.

그리고, 말없이 걸었다.

소천은 스스로가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많이 걸을 것을 알면서 바보같이 마혜저를 신고 오다니… 하지만 마혜저를 신으면 키가 커 보이고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소천은 걸윤의 등에, 창피해서 들고 있기 힘든 얼굴을 묻었다.

그의 등은 단단하면서 적당히 부드러웠다.

향긋한 꽃내음과 은은한 약재 향이 섞인 기분 좋은 냄새가 풍겼다.

걸윤의 널찍한 등과 그에게서 풍기는 향기에 이끌려, 소천은 조심스레 그의 등에 뺨을 가져다 댔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일정하게 꿈틀대는 근육의 움직임이 뺨으로 전해졌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걸윤은 묵묵히 앞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대협…….”

소천이 조심스럽게 걸윤을 불렀다.

“네.”

“대협… 정말 개방도가 맞으세요?”

소천은 걸윤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내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걸윤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습니다.”

소천의 작은 목소리는 낮았다.

“거지가 따로 있습니까? 황제도 넝마 입으면 거지입니다.”

소천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을 들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대협은… 넝마를 입지도 않으시잖아요.”

비단옷과 무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거지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넝마도 입고 쪽박도 차고 다닙니다. 제가 그리 다니는 것을 소저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겠지요.”

걸윤이 덤덤하게 말했다.

소천은 걸윤이 넝마를 입고 거지처럼 다니는 것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가 불편하게 가슴 한가운데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음… 그리 다니면… 음… 어떤 기분입니까?”

소천이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가며 물었다.

“뭐… 거지가 거지처럼 다니는데 어떤 기분이 어딨습니까? 그냥 그렇지요.”

“으흠…….”

소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걸윤의 등에 뺨을 묻었다.

그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근육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지며, 꽃내음과 약재 향기가 풍겼다.

그리고, 소천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걸윤은 소천의 전각에 그녀를 내려주었다.

소천의 시녀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조금 무리를 하신 듯하니 그리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걸윤이 소천의 시녀에게 존대를 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소천이 물끄러미 걸윤을 쳐다보았다.

종리세가의 자식에게 그리 반말을 찍찍해댔으면서, 시녀에게는 존대하는 이상한 사람을 말이다.

“그럼, 소저 편히 쉬십시오.”

걸윤은 소천에게 짧게 인사하고 그녀의 전각을 나섰다.

소천의 속에서는 기분 좋은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 버린 서운함과 숨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움, 걸윤이 거지꼴을 한 불쾌한 상상들이 뒤범벅되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경한 감정이 밀려왔다.

정체가 불명확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제멋대로 소용돌이쳐, 속이 울렁거렸다.

며칠 뒤, 소천은 연천과 걸화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조용히 보은장에서 사라졌다.

* * *

봄날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만개했던 꽃의 잎사귀가 짙어지고, 따뜻함을 넘어 더워지고 있었다.

걸화는 촐랑촐랑 걸으며, 두 사내에게 재잘댔다.

“소강 대협! 대협은 무인이 아니에요?”

마철용은 확실히 검을 차고 있으니 무인인 듯한데, 소강은 아리송했다.

“뭐… 조금…….”

소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저 여인에게 모든 것을 탈탈 털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최대한 자신들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럼 마철용 대협은 무공 잘해요?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해서 엄청 힘이 셀 거 같은데.”

걸화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약간…….”

마철용이 불편하게 웃었다.

무공에 관심이 많은 것인지, 저 여인은 볼 때마다 무공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그다지 답을 못 해줄 것은 없었지만, 소강이 최대한 자신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소저! 소저는 보은장에서 뭘 하십니까?”

소강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보은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시녀만 해도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시녀부터 청소 담당과 의복 담당, 침구 담당 등… 맡은 업무도 다양했다.

저 소저가 뭘 하는지 알아야 가주에 대해서 뭘 얼마만큼 아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다.

“저야 보은장에서… 뭐… 이것저것 합니다.”

걸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의의 제자로 보은장에 있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저들에게 영단을 먹였다가 혹시라도 잘못되었다고 스승님을 찾아오면 곤란하니깐.

걸화와 소강, 마철용 세 사람은 서로의 목적이 있어 만나고 있었다.

시간을 정해 놓지 않고 소강과 마철용이 보은장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걸화가 그들이 묵고 있는 객잔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만나서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식당에서 차나 간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각자 자기에 대한 것을 숨긴 채, 상대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하다 보니 질문만 있고 답은 없는 이상한 대화만 이어지고 있었다.

질문하면, 상대가 대답을 얼버무리고 또 질문하고 답을 흐리는 식으로 말이다.

셋의 기묘한 만남은, 더 이상한 대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소저, 이리 빨리 헤어져서 너무 아쉽습니다.”

소강이 보은장 입구에서 맘에 없는 소리를 해댔다.

‘보은장에 산다면서 뭐 아는 게 없어…….’

소강은 계속 이 만남을 유지해야 하는지, 저 쓸모없는 소저를 버리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걸화도 크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무공을 익혔다는 거야 말았다는 거야. 뭘 물어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고 얼버무려… 아우 속 답답해.’

자신을 위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과의 관계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리지 않고 있었다.

걸화는 답답한 마음으로 두 사람과 작별하고 보은장으로 향했다.

보은장 입구까지 걸화를 배웅한 소강과 마철용은 걸화가 보은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은장에서 뭘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그녀가 진짜 보은장에 사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되어서 말이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보은장 입구를 쓸던 옹충은 두 사람과 작별하고 걸어오는 걸화에게 인사했다.

“어… 옹충아! 수고 많다.”

걸화가 씨익 웃어주고, 보은장으로 들어갔다.

옹충은 보은장 입구를 다 쓸고, 담을 따라 주위를 쓸어댔다.

걸화의 탕약 소동이 있은 후, 신의가 제대로 치료를 해주어서 더 이상 허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바닥을 쓸던 옹충이 헤벌쭉 입을 벌려 웃었다.

오늘 저녁에 은의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걸화 덕분인지, 그들이 운명이었는지 탕약 소동으로 휴신각에서 마주친 은의와 저녁마다 몰래 만나고 있었다.

옹충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소강이 조심스럽게 옹충에게 다가갔다.

“아휴우! 수고가 많습니다.”

소강이 넉살 좋게 옹충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옹충은 걸화를 데려다주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두 사내에게 적당히 인사했다.

“우리는 소저의 친우입니다. 지금 소저를 데려다주고 가는 중이지요.”

소강이 슬그머니 옹충을 떠보고 있었다.

자신이 보은장에서 무얼 하는지 말하지 않고, 상태가 이상한 여인이 진짜 보은장 사람이 맞는지 말이다.

“아― 의원님의 친우분이세요? 어쩐지 의원님이 요즘 외출이 잦다 싶었습니다. 친우분을 만나러 나가느라 그랬군요.”

옹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옹충은 매일 보은장 입구와 그 주변의 바닥을 청소했다.

비슷한 시간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걸화와 요 며칠 새 몇 번이나 마주치고 있었다.

“…의, 의원님요… 그렇죠… 의원님…….”

소강이 뜨악한 얼굴이 되었지만, 놀라지 않은 척 그 이상한 여인이 의원인 것을 알고 있었던 척했다.

“여인이신데도 대단하지요? 신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보면.”

옹충은 비질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허걱…….”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저런 여인이 신의의 제자라니.

“거기다 약은 또 얼마나 잘 만든다고요. 의원님이 만든 약의 효과는 제가 보증합니다. 제가!! 정말 엄청나다니깐요.”

옹충이 자신의 가슴을 쳐대며 말했다.

“그렇죠… 약을 엄청 잘 짓죠… 하하하하.”

소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옹충의 말에 동조했다.

소강과 마철용은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보은장에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야. 상회 가주가 기거하는데 방비가 지나치게 삼엄한 것도 그렇고, 그 이상한 여자가 의원으로 있는 것은… 더 이상해.”

소강이 말했다.

“그냥 의원도 아니고 신의의 제자라면서?”

마철용이 기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은장 주변을 돌아다닌 지 몇 달이 되었는데, 알아낸 것이라고 신의의 제자라는 이상한 여자가 보은장에 산다는 게 고작이었다.

“난 지금껏 신의를 본 적은 없어.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중원의 소문 중에 헛소문이 많긴 한가 봐. 그런 주정뱅이를 제자로 들이다니, 신의라는 사람도 제정신은 아닌 게지!”

소강의 말투에는 신경질이 묻어났다.

소강도 나름대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교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다시 검을 찾을 방법을 모색해 교에 보고해야 했다.

계속 저 이상한 여자에게 휩쓸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기분이 불쾌하고 찝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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