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아, 걸화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이그… 배걸윤! 눈치 없는 놈!”
걸화가 허공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걸윤과 소천을 생각하던, 그녀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며칠 전부터 생긴 고민이었다.
스승님이 영단을 만든다는 사실에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몸과 눈이, 그리고 귀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곳에 가 있었다.
연구의 일환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육구만달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을 만들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영단 하나가 완성되어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눈과 판단력이 걸부에게 좋은 영단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걸부의 영단을 훔친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그것을 갚고 싶은 마음이 신의의 제자 배걸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영단의 효과를 알고 싶은 마음이 하루하루 커졌다.
누군가에게 그것을 먹이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번 영단의 기본 바탕은 신의의 비법을 따랐지만, 중요한 재료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변형이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만든 약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부작용이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죄책감과 스승님께 들키는 날에는 정말 꼼짝없이 쫓겨날 것이라는 두려움보다, 약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서 내공을 증진하고 무공의 능력을 향상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컸다.
누군가에게 영단을 꼭 먹여보고 싶었다.
스승님 모르게 영단의 효과를 보여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더 좋았다.
‘내가 먹을까? 내가 먹고 스승님께 안 들킬 수 있을까?’
안타까운 얼굴로 혼자 주억거렸다.
‘걸윤이를 어디다 가둬놓고 영단을 멕여?’
걸화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며 걸었다.
마철용과 소강은 오늘도 보은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저, 저기… 그 미친년 아니야?”
소강이 멀리서 걸어오는 걸화를 보고 마철용을 툭툭 쳤다.
마철용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강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맞다. 그 이상한 여인이 맞았다.
“허! 오늘은 멀쩡하네…….”
처음 무명촌에 든 마철용 일행은 보은장에서 멀지 않은 객잔에 묵었다.
마철용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은상회 가주와 혈영천마와의 관계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뭔가가 찜찜하고 개운하지 못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자신을 소강이 힐끔거렸지만, 모른 척했다.
그때.
자신들의 탁자 옆으로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그들 옆에 섰다.
음식이 놓인 탁자를 잡고 겨우 서서, 작게 속삭였다.
“…난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나는 쓸모가 없어요… 딸꾹…….”
마철용 일행은 속삭이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술을 들이부었는지, 아니 얼마나 오랫동안 술독에 빠져 산 것인지 코와 뺨이 붉었다.
옆에 서 있기만 하는데도 자신이 술을 마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산발한 긴 머리카락은 구역질 나게 더럽고, 때가 끼어 색이 바랜 옷에는 술과 음식이 줄줄 흐른 자국이 선명했다.
중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술주정뱅이 한둘쯤 마주치는 것은 예사였다.
세상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고,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마음을 술로 달래다가 그만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젊고 여린 여인이 술에 빠진 것은 처음 보았다.
“허!”
마철용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젊은 술주정뱅이 여인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여인은 술 냄새 풍기는 입으로 계속 속삭였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딸꾹… 딸꾹… 쓸모가 없어… 딸꾹…….”
마철용 일행은 식사도 멈추고, 여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내라면 끌어다 객잔 밖으로 쫓아내 버릴 텐데, 마르고 작은 여인에게 함부로 손을 대기가 뭣했다.
그저 여인의 술내 풍기는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음식을 나르던 점소이가 걸화를 보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고! 이 소저 또 이러네. 손님들 귀찮게 하지 말고 술 드셨으면, 방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그녀를 붙잡아 2층으로 데리고 갔다.
마철용 일행은 눈을 끔뻑이며, 그녀가 남긴 잔향과 같은 역한 술 냄새에 밥맛을 잃어갔다.
그들이 객잔에 묵는 동안, 그녀는 종종 그들의 탁자로 와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몇 번 마주하다 보니, 의자나 기둥같이 객잔에 속해 있는 기물을 보듯 익숙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객잔에서 사라져버리자, 식사 시간에 허전한 느낌마저 들면서 그녀가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 여인을 보은장 입구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소강과 마철용은 보은장으로 향하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은장으로 가나 본데. 가서 알은체 해볼까?”
소강의 말에 마철용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목을 가다듬은 소강이 사람 좋은 미소를 걸치고 걸화에게 다가갔다.
마철용도 소강을 따랐다.
“소저! 안녕하세요!”
소강이 밝은 목소리로 걸화를 불렀다.
원체 표정이 없는 마철용도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걸화가 우뚝 서서 마철용과 소강을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소강은 걸화의 의아한 눈길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붙였다.
“기억 못 하시겠어요? 저기 밑에 객잔에 묵으면서 소저랑 종종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 정도면 제법 대화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아…….”
대꾸하는 걸화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객잔에서 술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기억도 거의 없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를 아는 사람과는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저희가 외지에서 와서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객잔에서 친분을 만든 분을 다시 뵈었더니, 반가워서 인사나 하려고 불렀습니다. 여기 보은장에 사시나 봐요?”
소강은 걸화의 떠름한 표정을 모른 척 싹싹하게 말을 말했다.
“네…….”
마지못해 대답하던 걸화의 눈에 마철용의 허리에 찬 검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무인이세요?”
걸화가 마철용에게 물었다.
“네… 뭐…….”
마철용이 적당히 대꾸했다.
데면데면하게 두 사람을 보던, 걸화의 눈이 반짝였다.
“아아― 아랫마을 객잔!! 기억이 나는 것도 같습니다.”
걸화가 안면을 싹 바꾸어 아주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영단이 완성된 이 시점에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람.
무인이고 외지인이었다.
걸화는 짧은 순간, 그들을 하늘이 자신에게 보내준 선물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만들기만 했지 임자 없는 그 영단의 주인으로 말이다.
걸화가 두 사람을 보고 씨익 웃었다.
소강과 마철용도 걸화를 보고 웃었다.
보은장에 사는 여인이다.
보은상회의 가주에 대해 알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 * *
장터를 두리번거리던 소천은 장신구를 구경하다가, 면경을 고르고 꽃신을 보다, 연지를 손등에 발라보았다.
걸윤은 이 성가신 장터 구경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소천의 뒤를 따랐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장터에 나와 있던 장사치들도 좌판을 하나, 둘 걷기 시작했다.
“소저! 시각이 늦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실까요?”
묵묵히 소천의 뒤만 따라다니던 걸윤이 말했다.
“네… 그리해요…….”
소천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답했다.
그녀는 걸윤과 둘이 시간을 보내면, 뭔가 제대로 대화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다.
한데, 자신만 들떠있고 걸윤은 마지못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적당히 거리까지 두고 말이다.
서운했다.
걸윤은 소천의 표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얼른 가서 쉬고 싶었다.
장터 구경 따위 피곤하고, 재미도 없었다.
소천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보은장 방향으로 돌렸다.
장이 파하는데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걸윤이 가자고 하지 않는가.
맥이 빠진 그녀는 터덜터덜 걸었다.
걸윤은 여전히 소천의 등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그녀를 따라 걷던 걸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앞서는 소천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북적거릴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소천이 미세하게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소저! 어디 불편하십니까?”
걸윤이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아니요. 불편하지 않습니다.”
소천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걸었다.
다시 보아도 소천의 걸음은 뒤뚝거렸다.
“소저! 잠시만 앉아보십시오.”
걸윤이 앞서 걷는 소천을 잡아 세웠다.
“아니… 저는 괜찮은데…….”
소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걸윤이 이끄는 대로 장터 한편에 놓인 평상에 앉았다.
“발이 불편해 보입니다. 제가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걸윤이 평상에 앉은 소천 앞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안 불편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소천이 얼굴을 붉히며, 발을 뒤로 숨겼다.
“…….”
소천 앞에 앉아 있는 걸윤은 짧은 순간, 마혜저 위로 통통 부은 발등을 보았다.
굽이 높고 무거운 신을 신고 그리 오랫동안 걸었으니, 발이 힘들었으리라.
‘조금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는데…….’
“소저… 조금 쉬었다 갑시다.”
걸윤이 소천에게서 떨어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신발을 벗기고 발이라도 주물러주고 싶었지만, 사내가 여인의 발을 함부로 만지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명문가라고 하는 남궁세가의 여식을 대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평소 여인을 상대해 본 적이 거의 없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소천이 개방의 사내를 특히나 싫어한다는 걸화의 이야기를 들은 뒤라 소천을 대하는데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앉아 있던 소천이 일어났다.
“이제 괜찮습니다.”
소천이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쉬어서 그런지 부었던 발이 조금 진정되자,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몰려왔다.
소천은 좀 전보다 더 심하게 발을 절었다.
“소저… 조금만 더 쉬었다 갑시다.”
걸윤이 앞서가는 소천을 만류하자, 그녀는 다시 평상에 앉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사위가 어둑어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어났지만, 소천의 발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