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걸윤아!”
걸화가 걸윤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아잇! 깜짝이야…….”
걸화는 걸윤의 투덜대는 소리를 못 들은 척, 그의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너 내일 뭐 하냐?”
걸화가 걸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왜?”
걸윤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 내일 장에 가는데 같이 가자!”
“내가 너랑 장엘 왜? 안 가.”
“너 내가 산적들한테 쫓겨서 죽을 뻔했다는 얘기 들었지? 그런데도 같이 안 가겠다 이거야? 나 죽어서 귀신 되면, 너한테 해코지하면서 쫓아다닐 거다!”
“어휴우… 뭐? 장에 뭐 하러 가는데? 내가 대신 갔다 올게.”
“됐어! 무조건 같이 가야 돼!”
“끄응…….”
“내일 정오 지나서 가자! 너 내일 아침에 수련하고 깨끗이… 아니다! 내가 내일 아침에 올게.”
“에효… 또 왜 그러는데?”
“내일 아침에 올게. 토끼면 알지?”
걸화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는 후다닥거리며, 걸윤의 방에서 나가버렸다.
“아휴우… 저거 저거 왜 저래…….”
걸윤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새벽 수련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든 걸윤은 얼굴을 구겼다.
걸화가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고생 많았다. 씻자! 너 욕실 엄청 좋더라.”
걸화가 걸윤의 방 옆의 욕실로 앞장서면서 말했다.
연천과 모충일은 걸윤에게 고마웠다.
그래서 그가 보은장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에는 최대한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걸윤은 팔짱을 낀 채, 먼 산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쟤가 뭔가에 적극적일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인데…….’
“야! 너 뭐 해? 씻자니깐!”
걸화가 걸윤의 팔을 잡아당겨, 욕실로 끌었다.
걸윤은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로?’
보은장을 나가지 않는 이상, 걸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걸윤의 방에서 버틸 것이다.
“에효…….”
뭔지 모르지만, 적당히 해주자고 마음먹는 걸윤이었다.
“허!!”
욕실에 들어선, 걸윤은 기가 찼다.
걸화가 따뜻한 물에 색색 가지 꽃잎을 띄워놓은 것이다.
“야! 너…….”
“들어가 얼른! 이거 엄청 피부에 좋은 꽃잎이야, 얼른 들어가.”
“네가 나가야 들어가지.”
걸윤이 짜증을 누르며 말했다.
“알았어, 이 물에 한 식경 이상은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거! 여기 작은 단지에 든 것은 진주 가루하고 쌀가루하고 살구씨 가루를 섞은 거야. 이거 엄청 귀한 거다. 이걸로 얼굴 살살 문질러서 씻어. 그리고 이 나뭇가지는 이렇게 살짝 씹어서 이에 문지르는 거야. 그리고 이거 이거. 이거 창포 달인 물이야. 이걸로 머리카락 깨끗이 씻어.”
걸화가 욕실에 놓아둔 단지와 나뭇가지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하아…….”
걸윤은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뭔 짓을 하려는지 두려웠다.
“내가 방에서 기다렸다가 검사할 거니깐, 깨끗이 빡빡 씻고 와. 아! 이걸로 문질러 씻어!”
걸윤은 걸화가 내민 표면이 거칠거칠한 천을 받아들었다.
반 시진쯤 뒤, 걸윤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방으로 들었다.
아직도 자신의 방에 있는 누이를 보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할 뿐 성질내거나 도망가지는 않았다.
몇 달간 보은장을 나가 있다 올 것이 아니라면, 걸화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더 나았다.
걸화는 걸윤을 유심히 살피며,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걸윤은 포기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걸화는 말간 걸윤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너! 이제부터 수련할 때 무조건 저 무복 입어. 그리고 이건 입지 마! 내가 가져간다.”
걸화가 너절한 넝마를 둘둘 말아 싸며 말했다.
“야! 나 그거 있어야 돼!”
걸윤이 걸화를 말렸지만, 걸화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아! 그리고 이거! 향낭! 엄청 귀한 재료만 넣은 거야. 꼭 넣고 다녀라.”
“너는 나를 괴롭히려고 태어난 것 같아…….”
걸윤이 힘을 빼고 말했다.
“아마 그럴걸.”
대꾸하는 걸화의 목소리는 흥에 겨워 있었다.
“…….”
“이리와 앉아 봐.”
걸화가 자신의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 다 씻었잖아. 이제 가! 좀! 가!!”
“안 되지 내가 너 머리 빗겨줄 거야.”
걸화가 빗을 주섬주섬 꺼내며 말했다.
“어휴우우우―”
걸윤은 짜증을 내면서도, 걸화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걸화가 빗을 들어 걸윤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아파 쫌! 살살 해!”
“너 머리를 얼마나 안 빗고 산 거냐?”
“빗었어! 빗었어! 아파!”
“가만히 좀 있어!!”
“아프다니깐!”
걸화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얼마나 싸워댔는지 모른다.
점심이 되기도 전에 기운이 쭉 빠져버린 걸윤은 개방 분타에 가서 몇 달 있다가 돌아올까 하고 고민했다.
걸화는 장에 가는데 비단 장포를 입어야 한다고 빡빡 우겼다.
걸윤은 그것은 못 하겠다고 바락바락 성질을 냈다.
기나긴 입씨름 끝에 겨우 어두운 빛의 새 무복을 입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모충일이 준비해 준 것이었는데, 걸윤이 방구석에 두고 입지 않은 것이었다.
걸윤에게 무복은 편하게 함부로 입는 것인데, 새 무복은 이도 저도 아닌 것이라 불편했기에.
걸윤은 넋이 좀 나간 얼굴로 걸화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걸윤은 걸화 덕에 자신이 체력이고 정신력이고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맨질맨질한 연한 구릿빛 얼굴에 말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 하며, 깨끗한 새 무복까지 차려입은 걸윤은 귀하게 자란 도령이 비단옷을 벗고 무복을 입은 듯, 오목조목하게 잘생긴 얼굴에서 귀티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다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지금 도망가면 한동안은 보은장으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꾹 참고 있는 것이었다.
걸화가 하려는 짓거리가 어서 끝나기만을 빌면서.
“야! 야! 얼굴 풀어라! 그리고 너랑 나랑 모르는 사람이다. 너! 나한테 의원님이라고 불러!”
걸화가 보은장 정문을 향해 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미쳤냐?”
“조용히 해!”
걸화가 팔꿈치로 걸윤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너! 대체…….”
걸윤은 걸화의 높은 목소리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머! 소저! 이쪽입니다!”
걸화가 걸윤의 말을 똑 자르고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소천에게 손을 흔들었다.
“후우…….”
걸윤이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눈앞에는 장에 가는데 어울리지 않게 칠보단장을 한 소천이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소저는 여전히 어여쁘시네요.”
걸화가 소천을 칭찬했다.
그 말에 소천의 뺨이 붉어졌다.
소천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모습이었다.
하늘하늘거리는 하늘빛 의복은 소천의 깨끗한 피부 화장과 잘 어울렸다.
머리카락을 절반쯤 올려 꽂은 진줏빛 머리 장식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발바닥 중간에 굽이 높은 마혜저는 그녀의 키를 더 크고 몸이 가늘게 보이도록 해주었다.
걸윤은 소천을 보고 목 인사를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장에 가는데 저런 옷과 신발이라니…….’
소천도 걸윤을 향해 곱게 미소 지으며,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걸윤은 앞을 보고 터덕터덕 걸었다.
걸윤의 앞에선 걸화와 소천 두 사람은 언제부터 그리 친했다고, 얼굴을 맞대고 재잘거렸다.
두 사람은 하루 전, 소천이 백가장의 화영에게 받은 서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글쎄… 그 사람을 몰래 만나고 있다지 뭡니까?”
소천이 화영의 정인인 유운을 그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정말 잘 되었지요.”
걸화는 화영과 유운이 다시 만났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았다.
“어휴… 아직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려서 큰일입니다. 어찌 아버지 몰래 사내를 만난답니까?”
소천은 화영이 유운과 만나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해했다.
“…….”
걸화는 그런 소천을 께름하게 쳐다보며, 걸윤이를 데리고 확 돌아 가버릴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의녀님께서 소개해준 분이 그 사람을 백가장까지 데려왔다고 하던데…….”
소천도 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게 걸윤 대협입니다!!”
새치름한 걸화의 목소리가 높았다.
“네에? 어멋… 그랬어요…?”
대꾸하는 소천의 뺨이 붉어졌다.
“쳇!”
걸화가 찝찌름하게 소천을 쳐다보았다.
오늘 일을 벌이지 말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밀려왔지만, 걸화는 재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소천과 걸윤이 잘 되기라도 하면, 걸윤이 몽달귀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백연천하고도 좀 떨어지겠지.
“의녀님은 보은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걸윤 대협을 아셨습니까?”
뺨이 조금 붉은 소천이 물었다.
“뭐… 어쩌다 보니… 옛날부터 좀 아는 사이입니다.”
걸화가 애매하게 답했다.
장터가 가까워지자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며 그들이 내뱉는 소리와 거리에서 파는 음식 냄새가 짙어졌다.
입 다물고 걸어가던, 걸화가 음흉한 눈으로 걸윤을 쓱 쳐다보았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스승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는 것을 깜빡했네?”
걸화가 아주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걸윤이 얼굴을 구겼다.
‘또 뭔 짓을 하려고…….’
“저는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 하니, 두 분이서 천천히 구경하고 오세요.”
걸화는 재빨리 말을 마치고, 뒤로 획 돌아섰다.
걸윤이 그런 걸화의 팔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야!”
걸윤의 그 한마디에 걸화가 눈이 뛰어나올 것처럼 부라렸다.
걸윤은 올라오는 짜증을 꾹꾹 눌렀다.
“의.원.님. 지난번에 산적을 만난 건 잊으셨습니까? 혼자 가시면…….”
“산에 안 가요. 그럼 저 갑니다.”
걸화가 걸윤의 손을 확 뿌리치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걸윤은 선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장터 한가운데서 누이의 뒤통수를 향해 욕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대협! 그럼 저희끼리 가시지요.”
소천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떨잠이 경망스럽게 떨렸다.
“먼저 가신 의원이 걱정되어…….”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보은장 가는 길은 그리 위험하지 않을 듯싶습니다만.”
소천의 말에 걸윤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소천의 말이 맞긴 했다.
지난번 걸화가 산적에게 당할 뻔한 곳은 무명촌 밖이었다.
무명촌 안에서, 신의의 제자인 걸화를 해할 이가 있겠는가.
‘저걸 누가 말려. 에라, 모르겠다… 없어지면 연천이 찾겠지, 아으흐…….’
걸윤은 마음에 안 드는 상황과 걸화에게 이는 화를 삭이며, 소천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