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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57화 (157/230)

157화

한참 만에 소천이 입을 열었다.

“의녀님! 혹여 배걸윤이라는 사내를 아세요?”

“알죠.”

걸화가 대꾸했다.

‘그럼 알다마다.’

“어떤 분이세요? 내 전각에 있는 시녀에게 물으니 개방도라고 하던데, 진짜 개방도 맞아요? 전혀 거지 같아 보이지 않던데…….”

소천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거지가 뭐 따로 있나요? 황제도 넝마 입으면 거지가 되는 거죠.”

걸화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소천은 보은장에 오가는 사람들이며, 가끔 묵어가는 손님들에 대해서 걸화에게 묻곤 했다.

걸화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소천은 보은상회의 인맥이나 연천이 무슨 일을 하는지 꽤나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걸화는 그녀가 걸윤에 대해 묻는 것도 그런 호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대충 흘려 넘겼다.

“아니, 의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그분은 무공도 출중하시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울 줄도 아시고, 또… 비단옷을 입은 모습에 기품도 있으시던데…….”

“네에?”

걸화가 하던 일을 멈추고, 뜨악한 얼굴로 소천을 돌아보았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도 정도가 있어야지.

‘걸윤이한테 기품? 저 소저가 진짜 어디가 아프긴 아픈가 보다.’

“걸윤 대협을 본 적 있으시죠?”

“당연히 많죠.”

‘같은 부모에게 나서, 같이 자랐는데.’

“거지가 어찌 그리 생길 수 있겠어요? 피부색이 좀 어둡기는 하지만 거지라고 하기에는 그… 인물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허!”

걸화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들은 말 중에 가장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사내답게 시원시원하게 생긴 연천과 다르게, 걸윤은 얼굴이 자그마하고 눈이 큰 것이 오밀조밀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무공을 익힌 탓에 몸에 근육이 붙고, 워낙 돌아다녀 피부가 그을려서 사내다운 풍모를 풍기는 것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딱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이었다.

걸화는 떠름한 얼굴로, 넋이 좀 나가 보이는 소천을 찬찬히 살폈다.

의서에 따르면,

누군가를 염모 할 때는 동공이 커지고 낯빛이 꽃분홍색을 띠며, 이성이 무뎌지고 감성적으로 변한다고 했다.

그리고,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고 맥박 또한 균일하지 못하다고 했다.

“제가 잠시 맥 좀 짚어보겠습니다.”

걸화가 소천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 후, 소천의 손을 내린 걸화는 조금 멍한 듯한 소천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천의 상태는 의서에서 꺼내 온 사람처럼, 누군가를 염모 할 때 나타나는 모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배걸윤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걸화는 신랑감으로 개방도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소천이 펄쩍 뛰었던 것을 기억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잘못하면 뺨 맞는다고 경고까지 했었다.

‘에이… 설마…….’

“…….”

소천은 허공 어딘가의 뜬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께름한 얼굴로 소천을 쳐다보던, 걸화가 입을 열었다.

“걸윤 대협은 새벽마다 후원 오른편에 있는 작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합니다.”

연천에게 자극을 받은 걸윤은 열심히 단련 중이었다.

걸화는 자신의 말에 소천의 눈이 잠시 반짝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의녀님 고맙습니다. 또 놀러 올게요.”

소천이 벌떡 일어나서 급하게 인사를 하고는 의약당을 나가버렸다.

눈을 껌뻑이며 잠시 생각하던, 걸화는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 육구만달과 비슷한 그것… 그건 약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그냥 연구야, 연구…….’

걸화의 마음이 자꾸 한곳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 * *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걸윤은 손날로 두툼한 한철을 내리쳤다.

매일 기초 검법만 우직하게 반복한다고 연천을 비웃었다.

그런 연천의 뇌전에 맞고 기절까지 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만심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날 이후, 걸윤도 가능하면 새벽마다 일어나서 권법과 장법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걸윤은 청동 덩이 위에 한철이 두껍게 깔린 것을 맨손으로 내리쳤다.

그것은 연천이 지시해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열심히 수련하라든지 자신이 주는 선물이라든지 그런 말도 없이, 어느 날부터 걸윤이 수련 중인 이곳에 슬그머니 놓여있었다.

덕분에 개방에서 황동이나 두드려대던 걸윤의 손은 값비싼 한철의 타격감을 느끼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단단한 한철이 손에 닿는 감각은 황동과는 확실히 달랐다.

손이 욱신대는 감촉이 처음 황동을 두드릴 때처럼 진한 통증으로 남았다.

손끝에서부터 손바닥과 손등, 손목을 타고 팔뚝과 어깨, 전신으로 충격이 전해지며 그의 손이 더 강력하게 단련되고 있었다.

한참을 내리치던 걸윤은 땀에 전 윗옷을 벗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쫙 펴서 내리쳤다.

근육이 불거지고, 땀이 흘렀다.

소천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걸윤의 번들번들한 등이 어렴풋이 보였다.

정성을 들여 화장하고 색이 곱고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소천은 어깨를 쭉 펴고 고상한 걸음으로 후원 한 편을 거닐었다.

그러니깐, 후원의 오른편인 걸윤이 수련하는 곳 근처를 걷고 또 걸었다.

거의 반 식경을 빳빳한 자세로 걷던 소천은 발도 아프고 몸도 피곤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자괴감마저 들었다.

“에효오…….”

소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쉬는 숨을 따라 몸에 기운도 다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힘없이 털레털레 걸어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코앞에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치기 직전에 겨우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이 벗은 걸윤의 상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미, 미안하오. 내가 땀을 많이 흘려서…….”

걸윤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대충 걸치며, 사과하고 지나갔다.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던 소천이 걸윤을 불렀다.

“이것 보셔요!”

소천의 목소리에 걸윤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여미지 않은 윗옷 사이로 울룩불룩한 근육이 땀에 번들거렸다.

“제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아버지 남궁현섭의 생일날 종리우를 두들겨 팰 때도 같이 있었고, 얼마 전에 보은장 담에 끼인 것도 구해주었다.

그 정도 안면이 있으면, 좀 더 알은체할 법도 하지 않는가?

“어찌 남궁 소저를 모르겠습니까?”

걸윤이 담담하게 답했다.

“…….”

소천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을 아는데도 저렇게 지나친다는데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걸윤은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가던 길을 가버렸다.

“…….”

소천은 걸윤과 마주하면, 아버지의 생신 잔치에서처럼 가슴 떨리는 일이나, 며칠 전 보은장 담에 끼어있던 것처럼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까딱이고 지나가는 게 고작이었으니 아쉽고 서운했다.

왜 저 개방도한테 이런 마음이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섭섭하고 허탈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소천은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갔다.

* * *

마철용과 소강은 며칠째 보은장 주변을 얼쩡거렸다.

처음에는 너무 평범하기만 한 마을과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원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보은장이 은밀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보은장의 담 옆으로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정문 앞을 지키는 위사가 둘 있었지만, 그것은 돈 많은 집에서는 의례적으로 세워놓는 것이었다.

한데, 몰래 들어가서 뭐라도 알아내려 했더니 들어갈 만한 곳이 없었다.

높지 않은 담을 넘으려고 살피면, 그 곳곳마다 담 안을 지키는 이들의 숨은 기척이 느껴졌다.

워낙 돈이 많은 상회라 보안이 탄탄한 것인지 아니면, 예사 상회가 아닌 것인지.

확실한 것은 함부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마철용의 말대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소천은 의약당 앞마당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앉아 있었다.

사악한 술법에 걸려 소천의 주변으로만 시커먼 기운이 꿈틀대고 있는 것 같았다.

걸화는 소천이 신경 쓰였지만, 가까이 가기는 영 껄끄러웠다.

“왜 여기 와서 저러고 있데… 쩝…….”

한참을 힐끔거려도 소천은 같은 곳에서 같은 자세로 있었다.

걸화가 마지못해 소천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소저, 여긴 어쩐 일이세요?”

소천이 말을 거는 걸화를 올려다보았다.

걸화는 모른 척할 것을 괜히 불렀다고 후회했다.

소천의 얼굴은 더욱 가관이었다.

푸석푸석한 얼굴에 눈은 쑥 들어가서 며칠 사이 사람이 몇 년은 늙은 것 같았다.

“의녀님… 그냥 좀 반갑게 인사나 하자는 건데…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소천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반가워요. 소저.”

걸화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내가 너무 싫은 티를 냈나?’

소천이 저렇게까지 말을 하니 좀 미안하기도 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생신 잔치에서도 봤고, 내가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힘없는 소천의 목소리에는 섭섭함이 묻어 있었다.

“…….”

걸화가 소천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가득 차 있었다.

걸화는 그제야 소천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그것을 하지 못해 저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한테 기분이 나쁜 것인데?’

걸화는 이상하게도 그 상대가 연천이 아닌 걸윤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으으으흠…….”

소천이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늘어트렸다.

걸화가 소천을 가만히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걸윤 대협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네…….”

불만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헉…….”

걸화가 떠름한 얼굴로 소천을 쳐다보았다.

소천은 말없이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대협이 뭐라고 했어요?”

“아뇨… 그냥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갔어요… 내가 누군지 안다면서 어찌 그럴 수 있어요?”

소천은 눈앞의 걸화가 아닌 다른 이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참… 뭐라고 하는 건지…….”

걸화가 답답한 얼굴로 말했지만, 소천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혼자 자신이 만든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소저! 왜 그리 걸윤 대협을 생각하는 겁니까?”

걸화가 진짜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음… 뭐… 그 대협이 좀 특이하고 재미있고 하여… 요즘 좀 적적해서 말벗이나 되어보려는 것이지요.”

걸화에게 답을 하면서 소천 스스로도 왜 배걸윤이라는 사내가 신경이 쓰이는지 생각했다.

소천만 나타나면 가까이 와서 말이라도 한마디 더 붙여 보려는 사내들만 보다가, 걸윤처럼 데면데면하게 구는 사내를 보니 뭔가 어색하고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 떠나서, 사람이 좀 즐거워 보인다고 해야 할까?

옆에 있으면 뭔가 신나는 기운이 옮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은장에 들어와서 답답하기만 했으니, 그런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지.

‘맞아, 그런 거야.’

소천이 나름대로 걸윤을 생각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있었다.

‘뭐가 있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걸화가 입을 열었다.

“소저! 보은장에 와서 장터 구경 가보셨어요? 걸윤 대협한테 호위를 부탁해서 갈까 하는데 소저도 같이 가실래요?”

“네? 장에? 대협이랑? 네! 가요! 저도 가요! 저 장터 구경 엄청 좋아합니다. 저도 같이 가요.”

내내 어둡던 소천이 생기 있게 말했다.

“그럼 제가 언제 갈지 날짜를 정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걸화는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정신이 나가 있는 소천을 살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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