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잠시 생각하던 소강이 또 물었다.
“보은상회 가주도 가주지만, 그 파월산에서 기절할 때 맞은 것이 뇌전신공이 확실해? 그게… 네가 당하면서 충격을 받았다던가 해서 착각한 건 아니야?”
“아니야, 착각이 아니야. 보은상회 가주의 검법에 쓰러지는데, 파월산 동굴에서 쓰러지기 전에 맞은 그것과 똑같은 것이었어.”
“전대 교주님의 뇌전신공은 실전되었는데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된다고?”
“응!”
마철용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알았어…….”
소강은 전에 없이 고집을 부리는 마철용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고 생각했다.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일단 가주에 대해서 알아보자.”
소강은 지금은 마교의 안가든 어디든 더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철용의 말은 앞뒤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그럼에도, 마철용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둘의 관계가 그랬다.
모르는 이의 눈에는 마철용이 소강에게 끌려다니고 그가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를 때에는 무조건 마철용의 결정에 따랐다.
그것이 아무리 소강의 생각과 다르다 해도.
* * *
“어허! 되었다니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신의의 목소리에는 역정이 묻어났다.
걸화는 신의의 눈치를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찌 제자가 되어서 스승님께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제가 돕겠습니다. 돕게 해주십시오.”
“으흠…….”
신의는 눈을 감고 낮고 긴 숨을 내뱉었다.
“스승님!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이 한 몸이 부서지도록 스승님을 돕겠습니다!”
걸화의 결의에 찬 말에 신의는 천천히 눈떴다.
“혼자 할 것이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아라.”
신의가 낮고 엄중한 목소리로 명했다.
“네에…….”
걸화는 작게 대답하고 신의의 방을 나왔다.
방에 들 때의 넘치던 흥분과 열의는 온데간데없이 기운이 쪽 빠진 모습이었다.
얼마 전.
보은장 의약당에 약재를 대주는 약방의 주인장이 직접 찾아왔었다.
주인장은 허옇고 비리비리해서, 갖다버려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게 생긴 풀뿌리 하나를 조심스럽게 내어 보였다.
차를 내어온 걸화는 표정이라고는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체 알 수 없는 스승님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허허… 이리 귀한 것을…….”
신의는 매우 신중한 얼굴로 바라만 볼 뿐,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신의님께 귀하게 쓰일 것 같아서 바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장이 예상했다는 듯이 신의의 반응에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하… 이것은… 영단을 만들면 그만이겠구먼…….”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는 신의의 말속에 ‘영단’이라는 그 한 단어가 걸화의 걸음을 붙잡았다.
걸화는 차를 내어놓고도 방에서 나가지 않고 뭉그적거리며 신의와 주인장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 쬐끄만한 풀뿌리는 육구만달이라는 것으로, 좀처럼 볼 수 없는 아주 귀한 약초라 했다.
약초 자체만으로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다는 엄청난 영약인데, 스승님이 그 약초를 가지고 영단을 만들 것이라는 엄청난 정보도 알아냈다.
걸화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이번 기회에 스승님의 영단 만드는 비법을 알아내리라 결심하며, 옆에서 돕겠다는데 저리 단칼에 잘라버리니… 우울했다.
* * *
신의는 느긋하게 약재 방으로 들었다.
처음 육구만달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연천밖에 없었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영약이 필요치 않았다.
이미 복용한 것이 많아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육구만달을 줄 만한 자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아무리 효과가 좋은 약초라고 하지만 생것을 오래 보관하면 효력이 떨어지기에.
하지만, 모처럼 손에 들어온 귀한 약재를 다른 이의 손에 넘겨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단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약재 방에는 수만 가지 종류의 약재가 어우러져 하나의 웅장한 향을 만들어냈다.
신의는 흙냄새 섞인 그 씁쓸하고 구수한 향기가 좋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잔뿌리 한 가닥도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육구만달을 다듬고 손질하고, 다른 약재를 꺼내어와 신중하게 무게를 쟀다.
신의의 느릿한 작업은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거나 잠깐씩 눈을 붙이는 것 외에는 거의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떤 약초는 가루를 내고, 또 어떤 것은 여러 번 찌고 말리기를 반복했다.
잘게 두드려 즙을 내기도 하고, 표면이 거친 판에 갈아내기도 했다.
며칠에 걸쳐 저마다 다르게 손질한 재료를 작고 견고한 단지에 넣어 단단하게 밀봉을 한 후 더 큰 단지에 담았다.
그리고 다시 커다랗고 단단한 솥에 넣었다.
신의는 적당하게 불을 올려놓고, 약재 방의 문을 잠그고 나갔다.
힘든 작업은 거의 끝이 났다.
이제는 시간과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30년 된 사과나무를 껍질 채 베어 잘 말린 장작은 센 불의 힘을 오래도록 유지했고 연기도 거의 없었다.
신의마저 나가버린 약재 방에는 타닥타닥 사과나무 장작이 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사과나무가 타는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가 약재의 향을 덮고 약방을 가득 채웠다.
넓은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선반에는 걸화가 잘 손질해서 넣어놓은 약재가 종류별로 보기 좋게 정리되어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많이 사용하는 약재가 담긴 커다란 가마니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그 가마니 중 하나가 작게 흔들리더니, 저절로 입구가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열린 가마니 입구로 걸화의 머리가 쑥 튀어나왔다.
“흐흐흐…….”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은 신의가 끓이고 있는 커다란 솥에 꽂혀있었다.
푸석푸석하고 볼이 쑥 들어간 얼굴에 붉은 눈동자만 번들거렸다.
입을 절반쯤 벌리고 웃는, 광기 어린 모습은 장작이 타오르는 불빛이 반사되어 섬뜩하게 일렁거렸다.
“저런 방법이 있었단 말이지… 으흐흐흐…….”
걸화는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퀭한 몰골로 아주 흡족하게 웃어댔다.
작은 인기척이 들리자 다시 가마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걸아는 어딜 간 게야… 약재 방 근처에도 오지 말랬더니 어디까지 간 겐지 원…….”
신의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와서 불을 살피고 다시 자리를 떴다.
신의가 나가고 얼마 후, 가마니 밖으로 머리만 나온 걸화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 * *
활짝 열어젖힌 약재 방의 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비추었다.
치마를 훌쩍 걷어 올리고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허연 살을 드러내놓은 걸화의 다리에는 미묘하게 색이 다른 풀 덩어리들이 올려져 있었다.
걸화가 그중 한 뭉치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아래의 하얀 살결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아… 이건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걸화는 다른 뭉텅이를 다리에서 치웠다.
허연 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건 전혀 효과가 없네… 음…….’
걸화는 다리에 올려놓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치우며 종이 위에 뭐라고 끄적였다.
풀을 다 치운 그녀 다리의 한 부분은 벌겋고, 다른 부분은 퍼렇고 또 한쪽은 시커먼 것이 얼룩덜룩 흉하게 변해 있었다.
걸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요즘은 연천이 보은장에 거의 없어서, 탕약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신의도 연천과 함께 간 것인지, 아니면 따로 어디론가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여유롭게 약재를 시험하고 있었다.
몰래 훔쳐본 영단을 만드는 비법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적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신의가 만든 영단을 만들 수는 없었다.
영단의 주요 재료인 육구만달이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던 걸화는 육구만달이라는 약초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말라비틀어진 약초에 대해서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다 찾아다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육구만달과 똑같이는 힘들더라도 몇 가지 약재를 배합해서 그와 비슷한 효능을 내는 것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의원이 될 때까지는 참아야 돼! 뭘 만들면 안 돼. 또 쫓겨나기 싫으면…….’
‘뭘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공부만 하는 거지. 난 의원이 될 몸이니…….’
육구만달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그것을 만들고 싶은 마음과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속에서 싸워대고 있었다.
고민하는 걸화의 눈앞에 그림자가 지더니, 누군가 그녀의 앞에 털썩하고 앉았다.
걸화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 자리한 사람은 소천이었다.
늘 예쁘게 웃으며, 품행을 단정히 하던 소천이 웬일로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흐트러졌다고 해서 아주 몹쓸 꼴인 것은 아니고, 평소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그려낸 것 같은 미소를 보이지 않는 정도였다.
걸화는 처음 보는 소천의 모습이 조금은 인간답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의 반듯한 품행과 말투는 참 정떨어지는 모습이었기에.
소천은 뭔가 어두운 그림자를 뒤집어쓴 것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몸은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지금 소천의 마음이 그랬다.
무진장 헝클어지고 어수선했다.
“오셨어요?”
걸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알은체를 했다.
소천은 보은장에 온 이후, 종종 걸화를 찾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전각으로 불러서 차나 간식을 함께 먹기도 했다.
하지만, 걸화는 소천이 싫었다.
뭐가 좋겠는가?
개방을 뭣같이 생각하는 데다가, 연천을 꼬시려고 작정하고 들어 온 여인인데.
“…….”
소천은 퀭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걸화가 찝찌름한 표정으로 소천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영 좋지 못했다.
“소저! 어디 아파요? 내가 맥 좀 짚어볼까요?”
의원이 되려는 자로서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에요. 그냥…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그래요.”
소천이 적당히 얼버무리며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코앞에 와서 저리 우울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음… 뭐… 없어요.”
소천이 무슨 일 있는 얼굴로, 아무 일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걸화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소천을 살폈다.
“뭔 일 있는 거 같은데…….”
중얼거리며,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약재 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