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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52화 (152/230)

152화

걸윤은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다.

그의 얼굴은 아이처럼 개구진 구석이 있었다.

그의 표정과 몸가짐은 늘 그랬다.

세상에 아무런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가볍고,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넉살 좋게 연천 같은 친우를 만들어 지금처럼 그 집에서 먹고 자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개방의 아무 분타나 찾아갔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길에서 대충 자고 적당히 주워 먹었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고, 흥미로운 것을 찾는 눈은 반들거렸다.

그는 자신이 개방도라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신나는 일이 잔뜩 벌어지는 세상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는 삶이 즐거웠다.

오늘은 개방의 복건 분타에 갔다가, 보은장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보은장 후원 구석에 만들어놓은 개구멍으로 가볍게 기어들어 와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앗! 깜짝이야!”

걸윤은 자신의 전각으로 들어오다, 허연 게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걸화가 앞으로 축 처진 고개를 들어 올리며 걸윤을 쳐다보았다.

“넌 이 시간까지 어딜 그렇게 쏘다녀?”

오래 기다렸는지, 그저 힘이 없는지 걸화의 낮은 목소리는 늘어져 있었다.

“내가 너처럼 한가한 사람이냐? 나 할 일 많아.”

개방의 일이라는 것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몸을 굴려야 하는 일이었다.

후계도 아니고 방주의 차남쯤 되었으면 좀 편하게 있어도 됐지만, 걸윤은 가만히 앉아 있는 성격이 되지 못했다.

본인이 궁금한 일도 많았고 천상이 시킨 일을 하거나,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분타에 흥미로운 일에 끼어들어 도왔다.

“…….”

걸윤의 말에 뭐라고 받아칠 법도 한데, 걸화는 대꾸 없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걸윤을 보기만 했다.

“야!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산송장 같다.”

걸윤이 축 늘어진 걸화를 보고 말했다.

“너 안 바쁘지? 나랑 술 한잔하자.”

걸화는 걸윤이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술?”

“응.”

대답하는 걸화가 옆에 있는 망태기를 열어 보였다.

어떻게 들고 왔는지 어른의 한 아름쯤 되는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걸윤이 뜨악한 얼굴로 걸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걸 다 마시게?”

“…….”

걸화는 말없이, 길 잃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걸윤을 쳐다보았다.

“들어와.”

걸윤이 방으로 앞장섰다.

걸화가 술동이가 든 망태기를 번쩍 들고, 걸윤의 방으로 따라 들었다.

걸윤은 선반을 뒤적거리더니 말린 고기를 내어놓았다.

둘은 말린 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꼬질꼬질한 쪽박으로 항아리의 술을 퍼마셨다.

“걸윤아! 너 보은장에 남궁소천 소저가 들어와 있는 거 알았냐?”

“응.”

걸윤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대며, 답했다.

“넌… 백연천이랑 소천 소저랑 혼례를 치러도 괜찮아?”

걸화는 연천과 걸윤이 각별하다고 생각해서 물었다.

“그럼! 난 괜찮지!”

걸윤이 남궁소천을 곱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가주랑 정혼해서 온 거라던데?”

말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소천에게서 걸화를 거치면서 이제는 아예 정혼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무슨 소리야? 소천 소저 아버지가 하도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보은장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한 건데. 남궁세가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곳도 아니잖아.”

“진짜? 진짜 정혼한 거 아니야?”

“아니야. 연천인 소천 소저한테 관심도 없어.”

“진짜? 아… 그렇지? 여인한테 관심도 없지?”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음… 응… 여인들한테 관심이 없지…….”

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가 본 연천이 신경을 쓰는 여인은 배걸화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게 여인으로 보는 건지, 아우로 정이 든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잇!”

걸화는 걸윤을 노려보고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야! 천천히 마셔! 너 또 주정하면 갖다 버린다!”

“쳇!”

걸화가 걸윤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술을 퍼마셨다.

“어이그… 나도 모르겠다.”

걸윤도 걸화를 따라 술을 들이켰다.

걸화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다가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으로 걸윤을 쳐다보았다.

“야! 소천 소저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자기는 돈 많은 구파일방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고 해서 내가 개방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주 펄쩍 뛰더라. 어디서 거지들을 갖다 붙이냐고. 다른 데서 그런 말 입도 뻥끗 말라더라. 뺨 맞는다고.”

걸화는 다시 생각해도 불쾌했다.

“그래서 속상했어?”

“그럼 기분 좋겠냐?”

“어쩔 수 없지, 개방이 거지인 건 사실이니깐.”

걸윤은 가볍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넌 기분 안 나빠? 대놓고 욕하는데?”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그것보다 더 무시하는 데도 많아.”

걸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개방의 세가 워낙 크고, 언제 그 정보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구파일방의 하나이니 앞에서야 예를 다하는 척하지만, 거지라고 무시하는 이들도 많았다.

걸윤처럼 이 문파 저 문파,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치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었다.

은근한 멸시는 모른 척, 대놓고 못마땅해하는 데는 특유의 넉살로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치이… 개방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서 걸부 형이랑 너는 장가나 갈 수 있어?”

걸화가 갑자기 걱정되어 물었다.

“아버지나 되시니깐 어머니를 만난 거지, 개방도는 원래 장가가기 힘들어.”

걸윤이 태평하게 말했다.

“뭐어?”

걸화는 그것이 새로운 사실이라도 되는 양 놀라며 물었다.

“어떤 여인이 거지랑 결혼하려고 하냐?”

“어머니는 했잖아.”

“그게 특별한 거야. 너 역대 방주님들 중에 결혼한 분 봤어?”

걸윤의 말에 걸화가 눈을 껌뻑이며 생각했다.

“…….”

없다. 아버지 말고는 없었다.

“방주님도 그런데 일개 거지들이야 오죽하겠어? 인연이 되면 만나는 거고, 아님 마는 거지. 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의술이나 잘 배워.”

걸윤은 느른하게 늘어져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쓰읍… 훌쩍… 흡…….”

걸윤을 빤히 쳐다보던 걸화가 코를 훌쩍이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야! 야! 너 왜 그래? 왜? 갑자기 왜 울어?”

걸윤이 놀라서, 고개 숙인 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으아앙― 우리 걸윤이 불쌍해서 어떻게 해… 평생 저렇게 장가도 못하고 혼자 살아야 하는구나, 아이구… 불쌍해라… 훌쩍…….”

“에이씨…….”

“몽달귀신은 승천하기도 어렵다고 하던데… 으흐흑… 너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고 그러면 어떡하냐…….”

“야!!”

“걸윤아아아… 내가 미안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흑… 너 몽달귀신 되면 내가 제사는 잘 지내줄게에에에… 불쌍한 우리 걸윤이… 으아아앙…….”

“아! 그만해!”

“으으으흑… 내가 처녀 귀신이라도 찾아서 짝지어 줄까아…? 흑…….”

“에잇! 저거!”

걸윤은 화를 내다가, 대충 못 들은 척하고 술을 퍼마셨다.

“훌쩍… 으으으응…….”

걸화는 얼굴만 보면 원수처럼 물어뜯어 대던 오라비 걸윤을 안타까워하며,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 * *

달이 유난히 크고 밝은 밤이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 고고하게 비치는 달빛은 세속을 초월한 듯 찬란한 빛을 쏟아냈다.

남궁소천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은장에 들어오면 연천과 함께 달구경도 하고 차를 마시며 돈독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연천의 코빼기도 보기 어려웠다.

연천의 전각으로 찾아가면, 늘 무슨 일로 전각을 비우거나 손님과 함께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연천이 혼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소천은 무거운 마음으로 보은장 내를 걸었다.

보은장이라는 옥에 갇힌 것 같아 외롭고 쓸쓸하고 서글펐다.

낡은 무복을 걸친, 걸윤은 목을 양쪽으로 꺾으며 걸었다.

오늘도 분타에 가서 실컷 놀다(?) 오는 길이었다.

걸윤은 이렇게 움직여대야 몸이 개운하고, 마음도 편했다.

익숙하게 담을 따라 걷던 걸윤은 어둡고 컴컴한 곳에 이르러서 바닥으로 몸을 구부렸다.

잎이 큰 덩굴을 헤치고 바닥에 붙어서 꿈틀거리며, 작은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보은장의 시종이나 호위 중에 걸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정문으로 들어가면 될 텐데 걸윤은 그답게 편한 지름길을 택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심부름을 하는 거지들이 이용하라고 만든 개구멍이었는데, 이제는 걸윤도 편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아!”

몸을 절반쯤 밀어 넣은 걸윤은 당황했다.

“아… 며칠 전에 비가 와서 축대가 무너졌구나…….”

별생각 없이 평소처럼 개구멍으로 들어오다가 중간쯤에서 몸이 꽉 끼어버린 것이었다.

쬐끄만한 개구멍의 축대가 이리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엥… 에휴… 아고고고…….”

몸의 절반인 상체는 보은장 내의 후원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밖에서 버둥거렸다.

“아휴… 이거… 어째…….”

보은장의 담 밖으로 삐져나온 발을 굴려 안으로 밀어도 몸이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내공을 써서 힘으로 빠져나가려 했다가 담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이 밤에 자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이리저리 꿈틀대도, 끼인 몸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한참을 버둥거리다 피곤해진 걸윤은 상체는 보은장 후원에, 하체는 보은장 담 밖에 둔 채로 엎드려서 졸았다.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에서도 잘 자는 걸윤에게 몸을 절반쯤 길 밖에 내어두고 자는 것은 큰일도 아니었다.

아침이면 누구에게든 발견될 것이고, 그때는 조금 소란스러워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걸윤은 흙과 자잘한 돌이 깔린 후원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엎드려서 자던 걸윤이 무슨 기척이라도 낸 것일까, 절반쯤 나와 있는 몸이 눈에 띈 것일까?

누군가 걸윤을 향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누구요!”

“쓰읍…….”

잠들어 있던 걸윤은 부스스 깨어나서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잠들기 전에 처한 상황을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계심 가득한 발자국 소리가 더없이 반가웠다.

“거!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저 좀 도와주시오. 몸이 껴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소.”

걸윤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보은장 안에 있는 사람인데, 위험할 리는 없었다.

아! 연천이 알면 욕을 좀 먹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찌 밤손님을 도와준단 말이에요!”

매섭게 쏘아대는 사람은 보은장 후원에서 달빛을 구경하던 소천이었다.

“밤손님이 아니오. 나는 개방의 배걸윤이라고 하오. 이곳 가주와는 친우이고 이곳에서 지내고 있소.”

걸윤이 얼굴을 바닥으로 향해 엎드린 채, 자기소개를 해댔다.

“푸웃…….”

소천은 그 모습이 우스워 실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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