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가주와 혼례를 올리려 합니다】
걸윤이 못 들은 척 다시 손을 올렸다.
바닥에 널브러졌던 종리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제발… 그만… 제발… 살려주십시오…….”
종리우가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종리우는 차라리 검에 베이고, 도에 맞아 피를 흘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저 맨주먹으로 두드려 패는데 죽을 만큼 아프고, 치욕스럽고, 굴욕적이고… 거지 같았다.
걸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저에게 할 말 있다면서 해.”
자신의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걸윤의 짧은 말에 종리우가 입을 열었다.
“…그게… 나는 네가 내 청혼을 거절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종리우의 말을 들은 걸윤이 소천을 쳐다보았다.
“흐음… 오라버니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오라버니는 너무 오랫동안 보아 와서 그저 친 오라비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 오라버니와 혼인을 하겠습니까?”
소천이 찬찬히 종리우를 달래며 말했다.
이것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종리우는 그것을 알기에 화가 나고, 불쾌했다.
실상은 혼담을 넣은 가문들 중 종리우보다 조건이 더 좋은 이들이 있었던 것뿐이었다.
종리우가 소천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면, 오래된 오라비 같은 것쯤은 거절의 이유가 되지 못했으리라.
“그래, 알았다.”
종리우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문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종리우는 혼담이 거절당한 이유를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선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았기에.
“그럼 할 말 다 했어?”
걸윤이 종리우에게 물었다.
걸윤은 굳이 그들의 내막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었다.
명문가인 종리세가 놈을 잘못 건드려서 어쩌겠는가?
이만큼이면 되었다.
어디 가서 얻어맞았다고 말하기 뭣한 정도.
큰 외상도 없고, 무진장 아픈 요 정도가 딱 좋았다.
“그래…….”
종리우가 작게 답했다.
걸윤이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그럼 우리 들어가 볼까?”
종리우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어깨와 등, 가슴을 손바닥으로 툴툴 털었다.
종리우는 그때마다 몸을 움찔움찔거렸다.
걸윤은 다시 그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종리우의 어깨에 손을 척하니 걸쳤다.
“들어가 봅시다.”
걸윤이 종리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연회장으로 향하자, 종리우는 어쩔 수 없이 걸윤에게 반쯤 안겨서 걸음을 옮겼다.
소천은 황당한 얼굴로 그 둘을 따랐다.
연회장에 도착하자 걸윤이 어색하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이 사람… 어디서 넘어졌기에 이리 다치셨소. 쯧쯧… 조심 좀 하시지! 너무 과음하신 것 아니오?”
걸윤의 커다란 외침에 연회장에 앉은 이들의 시선이 종리우에게 쏟아졌다.
종리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걸윤은 친절하게도 종리우를 그의 자리에까지 가서 앉혀주고 자신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연천의 주변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걸윤은 대충 비어있는 아무 자리에 앉아서 빈 잔에 술을 따라 천천히 음미했다.
오랜만에 몸을 풀었더니 술맛이 유난히 더 좋았다.
거지 같다고 흉을 봐도 얻어 가고 싶은, 아주 훌륭한 술이었다.
남궁소천은 멀리서 그런 걸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현섭과 그의 아내 백일화는 늦둥이 고명딸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너무 늦은 나이에 낳아 건강하지 못할까 늘 걱정했건만, 건강한 것뿐 아니라 아주 곱게 자라주었다.
“소천아! 네 뜻대로 종리세가의 청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만, 너도 이제 혼례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아니냐?”
남궁현섭이 다정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
소천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서 말인데 아비가 네 짝으로 마음에 드는 이가 있어 너를 불렀다.”
남궁현섭의 말에 소천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사내이니 궁금할 수밖에.
소천이 잔뜩 기대한 얼굴로 아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은상회의 가주가 어떠하냐? 너도 들었겠지? 그 가주가 종리석과의 비무에서 이겼는데 그것이 그저 이긴 것이 아니다. 서역에서 무공을 배웠는지 아주 훌륭한 실력을 갖췄더구나. 모든 것을 따져보아도 아비는 그 가주가 나무랄 곳이 없어 보인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남궁현섭은 다시 생각해도 연천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혹여 다른 가문에서 먼저 손을 뻗을까 조바심마저 일었다.
“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소천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보은상회 가주 백연천은 소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하면, 인물도 좋고 성품도 괜찮았다.
재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보은상회의 입지도 탄탄했다.
거기다 아버지가 환갑잔치 후부터 그의 무공을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대니, 그만하면 소천도 만족스러웠다.
소천은 사랑이니, 염모니 하는 감정 따위는 믿지도 않았고 우스웠다.
그저 보은상회 가주의 조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그 가주가 마음에 쏙 들어서 사람을 보내 물었더니, 아직 혼례에 대한 생각이 없다더구나.”
남궁현섭의 말에 소천이 당황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당장 정혼을 할 것처럼 하더니 이것은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무리 혼례를 올릴 마음이 없어도 상대가 남궁소천이면 마음이 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이 거절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소천은 당혹스러웠다.
“서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은상회라는 큰살림을 맡았으니 아직은 신경 쓸 곳이 많은 모양이더구나. 그렇다고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느냐? 내 마음에 드는 자이니, 다른 이들도 그렇겠지. 가주를 사위로 점찍은 가문이 한둘이 아닐 게다.”
아버지의 말에 소천은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보은상회 가주라면 돈도 많고 인물도 좋고 거기다 무공까지 받쳐주니 훌륭한 신랑감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소천도 가문이며 미색과 품행, 무공 등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거절하다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보은상회로 보낸 표사 관리를 빙자해서 너를 보은장에 지내게 하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낙하더구나.”
“…….”
소천이 얼떨떨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표사 몇을 관리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표사를 관리할 것 같으면 보은상회로 가야지 가주가 있는 보은장에 묵는 것은 어디 말이 되느냐? 뻔히 핑계인 것을 알면서도 가주가 허락한 것을 보면 가주도 네게 마음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막내딸에 대한 자부심이 과한 남궁현섭이 마음대로 넘겨짚고 있었다.
소천도 가주가 싫지 않으니,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마음을 정했다.
‘그래. 가주가 훌륭하기는 하지만 나 또한 어디에 내어놓아도 모자람이 없지.’
“사내와 여인은 계속 보아야 정이 돈독해지는 법이다. 너는 그리 알고 보은장으로 갈 채비를 하거라.”
“네, 아버지. 그리하겠습니다.”
소천이 곱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 *
걸화는 채취해 온 식물을 깨끗이 씻어, 너른 채반에 펼쳐 말렸다.
보은장에 온 이후 늘상 하는 일이었다.
“의녀님! 의녀님 맞지요?”
보은장에서는 대부분 걸화를 의원이라고 불렀다.
처음부터 그렇게 불렀기에 여장을 하여도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걸화는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몸을 돌렸다.
“의녀님 맞군요. 저 모르시겠습니까? 백가장에서 뵈었는데… 화영이 친우 남궁소천입니다.”
소천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에…….”
걸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소천을 쳐다보았다.
왜 모르겠는가?
어떤 신랑을 골라야 하는지 따박따박 설명하던 그녀.
구파일방, 구파일방을 입에 달고 있던 그녀.
개방의 사내는 신랑으로 어떠냐는 걸화의 물음에 펄쩍 뛰었던 그녀를 똑똑히 기억했다.
“신의님이 여기 계신다고 하여 혹시나 해서 왔더니 역시 의녀님도 계셨군요.”
소천이 반갑게 말했다.
“에… 여긴 어쩐 일입니까?”
걸화가 뚱하게, 인사도 건너뛰고 물었다.
“어머, 역시 여장을 하시니 너무 곱습니다. 어찌 이런 것을 숨기고 사셨습니까?”
걸화의 반기지 않는 표정을 못 본 것인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알랑거리는 목소리는 밝았다.
“뭐…….”
“너무 잘 되었습니다. 보은장에 아는 이도 없고 적적했는데 의녀님이 계셔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네……?”
“바쁘십니까?”
“뭐… 별로…….”
“잘 되었습니다. 그럼 제 전각으로 가서 차라도 한잔하세요.”
소천이 걸화의 팔을 잡고 끌었다.
“소저의 전각요?”
소천에게 이끌려 터덜터덜 걸어가던 걸화가 물었다.
“모르셨어요. 저 보은장에서 지냅니다.”
“보은장에는 왜요?”
내내 시큰둥하던 걸화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가세요. 가서 말씀드릴게요.”
소천이 차를 내어오는 동안 걸화는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딱히 소천에게 할 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었다.
아니, 소천과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찌 전각까지 하나 내어 받고 보은장에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보은장에 며칠씩 묵어가는 타 문파의 객은 많았다.
그저 그러려니 했다.
“드셔 보세요. 가주께도 선물한 차이온데, 맛이 아주 그만입니다.”
소천이 찻잔을 들어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
걸화가 대충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걸화는 찻잎을 우린 물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오늘도 머리 장식부터 신발까지 완벽하게 맞추어 치장한 소천이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네… 뭐…….”
쪼끔 궁금하긴 했지만, 보은상회와 남궁세가 간의 무슨 일이 있겠지 싶었다.
“저 가주와 혼례를 올리려 합니다.”
소천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네에?”
걸화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소천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가주께서 상회 일에 조금 더 익숙해지시면요.”
소천은 연천이 혼례를 올릴 생각이 없어, 표사를 핑계로 보은장에 와 있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의 자존심에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네…….”
걸화가 멍한 얼굴로 무슨 맛인지도 모를 차를 들이켰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혼담이 많이 들어온다고 했으니.
‘씨이… 뭐 혼례를 올리고 싶은 여인이 없다더니. 거짓말!!’
기분이 나쁘기는 한데, 뭔가가 무겁게 가슴을 눌러 내리는 통에 화가 크게 일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머리가, 온몸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