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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50화 (150/230)

150화

화려한 초식을 펼치느라 이마가 촉촉이 젖은 종리석과 반대로 무심한 듯 귀찮은 듯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연천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비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 삼아 나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참다못한 종리석이 검을 양손에 잡고 앞으로 내밀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가 그린 원형을 따라 바람이 불었다.

반질반질한 연무장의 돌바닥에 바람이 일며, 종리석과 연천의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종리석이 큰 원형을 계속 그려대자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급기야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에 나뭇잎과 작은 돌가루 같은 물체들이 회오리를 이루며 맴돌다 바람에 나부끼어 날아갔다.

종리석이 원을 그리는 것을 멈추고 뿌연 공기 중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양검!”

회오리치는 바람에, 어수선하던 관중의 시선이 그 한마디에 종리석에게 쏟아졌다.

종리석의 무공이 다방면에서 출중했지만, 저 일양검이 종리석에게 지금의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관객들은 숨도 쉬지 않고, 종리석의 눈부신 검세를 바라보았다.

검끝은 그림을 그리듯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움직였고, 검날은 빛이 났다.

종리석의 가벼운 움직임은 우아했고, 눈매는 날카로웠다.

홀린 듯 바라보는 사이, 강한 듯 유연하고 매끄러운 듯 날카로운 한 마리의 짐승이 완성되어 있었다.

전설 속의 동물 일양.

날렵하고 거친 표범의 머리에 근육이 불거진 말의 다리를 가진 짐승.

이제 막 탄생한 일양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였다.

일양이 연천을 향해 으르렁거리자, 불쾌하게 날 선 짐승의 이빨과 시뻘건 혀가 드러났다.

홀린 듯 일양을 바라보던 관중의 시선이 연천에게로 향했다.

남궁현섭은 종리석과 백연천을 번갈아 보며 조바심이 들었다.

짐승이 연천에게 달려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날 선 수십 개의 치아가 연천의 몸속으로 파고든다면, 어찌 될지 뻔했다.

지금이라도 달려들어 종리석을 말려야 하는지, 연천에게 달려드는 일양을 막아야 하는지…….

무인으로서 종리석이 만들어낸 일양에게 매료되면서도, 한 가문의 가주로서 자신의 집안에 초대된 객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때, 종리진성이 남궁현섭의 심중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남궁 가주, 석이가 흥분했다 할지라도 쉬이 피를 보지는 않을 겁니다.”

말을 끝낸 종리진성은 다시 비무장 한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종리진성은 이 비무의 끝을 반드시 보아야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연천의 나부끼는 옷자락을 바라보는 남궁현섭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연천은 덤덤하게 눈앞의 짐승을 응시했다.

일양이 날듯이 연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섬뜩한 치아를 드러내며, 강하게 달려드는 움직임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종리석이 조소를 흘렸다.

오늘 만들어낸 일양은 완벽했다.

저 잘난 보은상회 가주의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관중은 일양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안력을 돋우었다

“쯧!”

여차하면 연천의 앞을 막으리라 다짐하며, 연천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남궁현섭은 보은상회의 가주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연천이 뒷짐을 풀고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검집에서 빼지도 않은 검을 앞으로 쭉 뻗어 일양의 시뻘건 입속으로 찔러 들었다.

연천의 기운에 공력으로 만들어진 일양이 일그러지더니 날리는 꽃잎처럼 공중으로 흩어졌다.

일양을 관통한 연천의 검이 그대로 종리석에게 향했다.

워낙 빠른 움직임이라 제대로 보지 못한 이들도 태반이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만들어낸 일양 사이로 회색빛 물체가 쑥 튀어나오자, 종리석은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쭉 뻗은 연천의 검이 종리석의 목 옆에 자리 잡았다.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쉬는 종리석과 다르게, 연천의 얼굴은 권태로워 보였다.

연천을 보는 종리석이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종리석의 완벽한 패배였다.

덤덤한 눈으로 종리석을 바라보던 연천이 검을 내렸다.

진한 회빛의 검집이 종리석의 목에서 내려왔다.

“잘 배웠소.”

연천이 포권을 하여 예를 갖추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종리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저 비리비리한 샌님이 뭘 어찌한 것인지 얼떨떨했다.

종리진성은 종리석을 노려보았다.

‘어찌 깔아준 멍석인데 저 멍청한 놈이 종리세가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눈을 껌뻑이며 멍하게 있던, 남궁현섭이 정신을 차리고 연천을 따라갔다.

“가주! 내 가주가 이리 무공이 훌륭한 줄 지금껏 몰랐소.”

이것은 진심이었다.

남궁현섭이 연천에게 아쉬웠던 점이 바로 무공이었다.

상회의 가주가 무공이 뛰어나 봤자 무인의 집안에 비할 바 못 될 것이고, 연천의 외관도 무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데, 비무에서 보여준 모습은 남궁현섭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그는 자신의 고명딸 소천의 짝을 방금 정했다.

바로, 보은상회의 가주 백연천으로 말이다.

“과찬이십니다.”

남궁현섭과 연천이 대화하며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고, 멍하게 종리석을 보고 있던 남궁세가의 객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남궁현섭과 연천을 따라 연회장으로 들었다.

연천은 반듯한 얼굴로 자신에게 칭찬과 술을 퍼붓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를 다했다.

속에서는 불편함과 짜증이 솟구쳐,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걸윤을 욕했다. 속으로…….

* * *

같은 시각, 남궁세가 외각의 연무장에서는 또 다른 비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은 남궁소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종리우는 걸윤의 얼굴을 뚫어버릴 듯 노려보았다.

걸윤은 종리우를 향해, 천연한 웃음을 흘렸다.

걸윤을 매섭게 쏘아보던 종리우는 예고 뭐고 할 것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만하세요! 오라버니! 어찌 무기도 없는 이에게 검을 뽑습니까?”

남궁소천이 놀라 종리우를 말렸다.

“흥! 너는 가만히 있거라. 내 이자에게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면 어찌 되는지 가르쳐 주어야겠다. 그런 후에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 잠자코 지켜보거라.”

“오라버니!!”

종리우의 짧은 기합 소리는 소천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묻혔다.

종리우가 날듯이 뛰어, 걸윤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걸윤이 종리우의 검을 맨손으로 쳐냈다.

종리우는 멈추지 않고, 혈 자리만을 골라 찔러왔다.

걸윤은 손바닥과 손등으로 검면을 쳐냈다.

종리우의 검이 휘며, 검로를 이탈해 위력을 잃었다.

이를 바득 갈며, 검을 다잡은 종리우의 검로가 변했다.

처음에는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혈 자리를 찌르던 검이 부드럽게 휘며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디든 상처를 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베었다.

걸윤도 손바닥에 내공을 끌어올려 기민한 동작으로 검을 쳐냈다.

오른쪽 손바닥으로 밀어낸 검을 왼쪽 손등으로 받아 다시 밀었다.

걸윤의 옷소매가 펄럭이며 바람 소리가 일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과 달리, 그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민첩하게 검을 쳐내던 걸윤의 손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종리우의 검로를 뚫고 그에게 향했다.

쇠붙이처럼 강한 걸윤의 주먹이 종리우의 가슴을 가격했다.

걸윤은 종리우의 가슴을 짧게 밀어치고 뒤로 쭉 물러났다.

종리우가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화려한 은빛 장포에 검붉은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종리우가 눈에 불을 뿜을 듯 걸윤을 노려보았다.

“하! 아직 덜 맞았구만. 말 안 듣는 거지들을 어찌 교육시키는지 보여주지.”

걸윤이 열 개의 손가락을 깍지 껴 반대쪽으로 꺾었다.

우드득 우드득―

걸윤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종리우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던 걸윤이 걸음을 멈추고, 굳은 듯 서 있는 소천을 돌아보았다.

“아… 소저는 안 보는 것이 좋을 텐데… 참! 너 소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그랬나…?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걸윤이 종리우에게 찍찍 반말을 해댔다.

“…….”

종리우는 걸윤을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기회를 줬다. 나 원망하지 마라.”

종리우에게 껄렁하게 말하고는 소천을 돌아보고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소저는 그만 들어가 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이자와 나는 아직 볼일이 남아 있습니다.”

“……..”

소천이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을 했다.

“소저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걸윤이 다시 한번 소천에게 예를 다해 말했다.

“아니요. 저는 괜찮으니 볼일 보십시오.”

소천이 꼼짝도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걸윤이 소천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몸을 돌려 목을 양옆으로 꺾으며 종리우에게 다가갔다.

걸윤을 노려보던 종리우는 다가오는 걸윤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바닥에서 일어선 종리우는 양손에 힘을 꽉 주고 검을 잡았다.

걸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가 종리우의 검면을 손으로 쳐댔다.

종리우의 몸도 검을 따라 일렁이는 사이 걸윤이 주먹을 쥐고 종리우의 한쪽 눈을 향해 내리꽂았다.

종리우가 ‘이렇게도 별을 볼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온몸을 향해 걸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내공을 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단한 주먹이었다.

걸윤은 인정사정없이 종리우의 몸 곳곳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걸윤의 주요 무공은 장법이나 권법 중심이었다.

애병 없이 장법과 권법을 익힌다는 것은 손바닥이나 주먹을 상대의 병기 못지않게 단단하게 만드는 피나는 수련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강철보다 강한 손바닥과 주먹을 만들어야, 비로소 장법이나 권법을 배울 기본이 준비되는 셈이었다.

걸윤의 강룡18장은 개방 내에서도 유명했다.

권각술과 장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예리하고 기민하고, 또 강했다.

살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개방도 행세를 하며 사기를 치던 거지 하나가 잡혀 걸윤에게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그는 두 손이 발이 되게 빌며,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그만큼 걸윤의 맨손은 강렬하고 매서웠다.

걸윤은 평온한 얼굴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바닥에 드러누운 종리우의 입에서 겨우 새어 나온 말이었다.

종리우는 바닥을 뒹굴어 온몸이 흙투성이고 옷이 심하게 구겨졌을 뿐이었다.

걸윤의 권법에 맞아 각혈한 것과 걸윤이 작정하고 내리꽂은 한쪽 눈탱이가 부은 것 외에 다른 상처는 없었다.

피를 흘리지도 멍이 들지도 않았다.

그것이 또 걸윤의 능력이었다.

죽을 만큼 아프게 패면서도 외상은 없는 구타.

말 안 듣는 거지에게는 최고의 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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