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종리석은 좋은 비단옷을 걸치고 자신의 말에 따박따박 대꾸하는 연천을 쳐다보았다.
깨끗한 얼굴은 척 봐도 세상 편하게 산 모습이었다.
종리석이 가장 역겨워하는 부류였다.
부모 잘 만나서 힘든 것 모르고 사는 족속들.
돈으로 사람을 부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해결되는 줄 아는 것들.
종리석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의 눈에 연천의 검이 들어왔다.
“좋소! 그럼 나도 그대에게 비무를 청하겠소! 예의에 어긋난 것은 아니겠지요?”
종리석의 말에 연회장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종리세가는 명문이기는 하나 오대세가에는 오르지 못한 가문이었는데, 최근 오대세가의 자리를 노리며 콧대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종리석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가문이 그렇듯 종리세가도 직계와 방계의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멀었다.
가문에서 내려오는 주요 비급이나 무공, 재력 그 모든 것은 직계를 위한 것이었고 방계는 그저 종리세가의 이름만 얻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계였던 종리석이 뛰어난 무공 실력을 보이더니, 20이 겨우 넘은 지금 무림의 백대 고수에까지 들게 된 것이었다.
비록 무림 백대의 말석에 겨우 든 것이나, 종리석의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얼마나 높은 경지까지 올라갈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림을 통틀어서 백대 고수 안에 겨우 든 것이지만, 후기지수들로만 따지고 본다면 종리석을 으뜸으로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종리세가의 가주 종리진성은 종리석을 집안으로 불러 자신의 아들, 종리우와 함께 집안의 무공을 가르치고 종리우의 호위 역할도 맡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종리석이 연천에게 비무를 청하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상대는 지금 한창 중원에서 유명해진 보은상회의 가주였다.
돈 많고 인물 좋은 보은상회의 가주였지만, 상회의 가주라는 자리가 딱 그만큼이었다.
돈이야 넘쳐나게 많으니 무공을 배우려고 한다면 배울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어디 무인 집안의 발뒤꿈치나 따라갈 수 있겠는가.
돈을 퍼붓는다고 해도 배울 수 있는 무공의 한계는 극명했다.
무인이라는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공, 그다음이 목숨, 그리고 그 뒤가 돈이 될까 말까 한 것이니 정작 엄청난 무공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연천은 그제야 주위의 이목이 자신과 종리석에게 집중된 것을 눈치챘다.
“끄응…….”
조용히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던 연천이 불편한 신음을 내었다.
종리석은 그것을 자신과의 비무에 자신이 없어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거절하여도 좋소! 하나, 정식으로 사과하시오!”
종리석이 자신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일순, 두 사람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보은상회 가주가 무슨 대답을 할지, 연천의 입에 시선들이 들러붙었다.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은 오늘의 주인공인 남궁현섭이었다.
“그만하시게. 어찌 무인이 되어 상인에게 비무를 청하는가?”
남궁현섭이 종리석을 말리며 말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 중 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몇은 아쉬운 얼굴로 종리석을 바라보았다.
그리도 대단하다는 종리석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였으나, 이자가 연회장 밖에서 마음 맞는 이들끼리 비무를 할 수도 있는 일이라 말하는 바람에… 범이 어찌 토끼를 상대하겠습니까? 토끼가 자기 주제를 알고 그에 맞게 처신한다면 범이 나설 필요가 없지요.”
종리석이 연천을 토끼라 비꼬며 말했다.
종리세가의 가주 종리진성이 나섰다.
“물론 가주가 상인이고 석이의 무공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겠지만,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뜻이 맞아 비무를 하겠다는 것을 말리기만 해서야 되겠소? 가주도 사내인데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소? 정 힘들면 석이가 몇 초식 접어줘도 되는 일 아니오? 어찌 생각하시오. 가주?”
연천에게 묻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존심 운운하며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응하지 않으면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 될 테니.
종리진성은 지금 상황이 종리석의 무공을 많은 이들 앞에 내보이기에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도 많은 가문에서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상대는 유명한 보은상회 가주였다.
가주라는 자의 무공이 별 볼 일 없는 것은 뻔할 것이니, 종리석에게 굴욕을 당한 것이 그의 유명세와 더해진다면 종리석과 종리세가의 이름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어떻게든 이 비무를 성사시키고 싶었다.
“으흠…….”
연천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속으로 걸윤을 욕했다.
‘그냥 적당히 좀 있지. 괜히 나서서 나까지 이런 귀찮은 꼴을 당하게 만들고!! 쯧…….’
“토끼에게 자존심은 과분한 것이지요. 내게 정식으로 사과한다면 없던 일로 하겠소.”
종리석이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무공에 자신 없는 보은상회 가주는 자존심 같은 것 세우지 말고, 곱게 꼬리 접고 얌전히 있으라고 말이다.
“…좋소…….”
연천은 크지 않게,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 아니… 가주!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오. 종리대협! 그만하시게.”
자신의 잔치에서 무슨 사고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는 남궁현섭이 연천과 종리석을 말렸다.
“젊을 때는 자신보다 강한 자와도 검을 겨뤄보고 해야 크게 성장하는 법입니다. 가주가 비무를 하겠다 한 것을 말리는 것도 가주를 무시하는 겁니다.”
종리진성이 남궁현섭을 막으며 말했다.
더 이상 이 비무를 못하게 하는 것은 보은상회 가주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그럼 나가시죠.”
종리석의 말에 연회장의 의자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들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끄응…….”
연천은 다시 한번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옆에 섰던 종리석이 그런 연천을 비웃고는 앞장서서 연회장을 나섰다.
남궁현섭은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불안한 얼굴로 연천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시오! 이쪽에 제일 큰 연무장이 있으니 이리 오시오!”
남궁세가에 종종 들르는 종리진성이 나서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연천은 이 기막힌 상황에 휩쓸려, 연무장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연천의 주변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피며 자기들끼리 뭐라 속닥거렸다.
남궁세가를 찾은 손님들 입장에서는 뜻밖에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후기지수 중 으뜸이라는 종리석의 무공도 구경하게 생긴 데다가, 무림에서 제일 돈 많은 가주가 어찌 나올지 흥미진진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서역에서 공부만 하던 샌님인 보은상회의 가주가 너무 무력하여 종리석이 무공을 제대로 펼쳐볼 수도 없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보은상회 가주의 표정으로 보건데 정말 시시하게 끝날 수도 있을 듯하기는 했다.
제법 많은 구경꾼들이 연무장을 삥 에워쌌다.
반들반들한 눈으로 연천과 종리석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연무장 한가운데 서게 된 연천은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흘리는 종리석과 마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쩌다가 이곳에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불편하고 짜증스러웠다.
상황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들을 에워싼 구경꾼들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연천과 종리석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종리세가의 종리석이요.”
종리석이 포권하며 예를 갖추었다.
“백연천이오.”
연천도 예를 갖추었다.
“내 3초식을 양보해 드리리다. 그리해도 되겠소?”
말하는 종리석의 입가에 조소가 걸려있었다.
단정하고 반질반질하게 생긴 상회 가주 따위에게 3초식 아니라 30초식을 양보하고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니, 저런 자와 비무를 하는 것 자체가 종리석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가 유명세를 얻고 있는 보은상회 가주가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종리석은 이 기회에 그를 발판으로 더욱 유명해지고 싶었다.
유명한 보은상회 가주에게 치욕을 안겨주면 이름이 알려질 수밖에.
“아니오, 되었소.”
연천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하!!”
종리석이 연천을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저자가 돈깨나 있다고 주변에서 오냐오냐해 주니 자기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구나.’
적당히 굴욕감을 줄 만큼만 상대해 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제대로, 확실하게 밟아주리라. 부모 잘 만나 돈이나 써대면서 잘난 척하는 보기 싫은 녀석이 비무 중에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어도 어쩔 수 없고.’
종리석의 연천에 대한 불쾌감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 저변에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었다.
종리세가의 방계로 살면서 겪은 차별과 내밀한 모욕.
죽도록 노력해도 갖지 못하는 것을 양손에 쥐고 태어나, 자신을 은근히 깔보는 종리우와 직계에 의해 거의 평생 구축되어 온 뒤틀린 마음이었다.
종리석이 연천에게 보란 듯이, 검을 뽑아 화려한 자세로 기수식을 취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종리석의 검날이 연천의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오호…….”
구경꾼들이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종리석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연천을 향해 칼끝을 까딱거렸다.
그의 도발에도 연천은 뒷짐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종리석을 가만히 쳐다보는 연천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흥!”
종리석은 자신의 도발에도 꼼짝하지 않고 있는 연천을 향해 콧방귀를 날렸다.
‘언제까지 그리 여유만만하게 서 있을 수 있는지 보자.’
종리석이 연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추듯, 연천을 베어나갔다.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위협적인 종리석의 검에 박수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연천은 서 있는 자리에서 반보 오른쪽으로 뒤쪽으로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뿐, 검을 뽑지도 뒷짐을 풀지도 않았다.
종리석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종리석은 다채로운 몸놀림을 선보이며, 쉬지 않고 연천을 공격했다.
몇 초식 안에 때려눕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상대가 제대로 공격도 하지도 않고, 미꾸라지처럼 슬쩍슬쩍 피해대는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멈춰선 종리석이 검을 다잡았다.
“비무에서 검도 뽑지 않다니, 이 무슨 무례요!”
종리석이 불쾌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필요하면 사용하겠소.”
연천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덤덤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