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남궁세가에서】
연천과 모충일 사이에 앉아있는 걸윤은 자연스러웠다.
“가주님! 그분의 팔을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모충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이 묻힌 곳에 함께 묻어드리는 것이 옳겠지요.”
연천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리해야지요. 언제쯤 가시겠습니까?”
“…내 조금만 더 있다가 묻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연천이 말했다.
스승님의 팔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가주께서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
모충일의 말에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궁세가 가주의 환갑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이레 뒤입니다.”
모충일이 익숙하게 일 이야기를 꺼냈다.
“알겠습니다.”
연천이 표정 없이 대꾸했다.
어느 가문이건, 모임의 이유가 무엇이건 연천에게는 그저 보은상회 가주의 모습으로 격식을 차려야 하는 불편한 자리일 뿐이었다.
“어? 남궁세가에? 나도 가야 하는데 같이 가면 되겠다.”
걸윤이 낭창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개방에 가지도 않고, 그런 걸 잘도 안다.”
“다 방법이 있지. 개방의 영업 비밀이야!”
걸윤이 씨익 웃었다.
연천도 피식 웃었다.
걸윤이 후원 구석에 개구멍을 만들어 거지들이 드나드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보은장은 보통 상회의 가주가 머무는 곳과 달랐다.
겉보기와 달리 경계가 유난히 삼엄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도 보은장을 지키는 이들이 숨어 있었다.
걸윤이 개구멍을 만들어 거지들이 드나든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연천이 모른 척 두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거지 하나가 찾아왔다는 보고를 들으며 뭔가 일이 있구나 하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연천과 걸윤, 두 사람을 보는 모충일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번졌다.
보은상회 가주가 된 연천은,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무명촌과 보은상회에 딸린 식솔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모두 연천을 존경하고 떠받들었다.
그들의 연천을 향한 공경심이 그를 꼼짝하지 못하게 얽어매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커다랗고 무거운 짐을 올려놓고, 백연천이라는 사람을 지우고 있었다.
연천은 웃지 않았다.
보은상회 가주라는 가면을 쓰고 웃었지만, 백연천은 웃지 않았다.
숨을 내뱉는 것조차 마음껏 하지 못했지만,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모충일은 하루하루 뭔가가 비워져 가는 연천을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연천의 속을 채우고 있는 그것들이 다 없어지면, 연천도 사라질 것 같아 불안했다.
위태로운 감정을 숨기고, 반듯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연천이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비워져 가던 백연천이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백연천의 얼굴로 웃었고, 그의 얼굴로 화내고, 말했다.
배걸윤이라는 사내 덕분에 말이다.
모충일은 연천 옆을 지켜주는 걸윤이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 * *
걸윤은 보은장 입구에서 양팔을 옆으로 쫙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았다.
“연천아! 나 어떠냐? 완전 멋있지? 보은상회가 돈이 많긴 많은가 봐. 이야― 내가 지금까지 입었던 비단옷은 비단도 아니었다. 이거 진짜 좋은 원단으로 만든 거구나. 보들보들하고 찹찹하니 옷이 몸에 착착 붙는다.”
걸윤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
연천은 걸윤을 힐끔 쳐다보았다.
걸윤이 입은 옷은 모충일이 특별히 주문해서 제작해 준 것이었다.
값비싼 옷이기도 하지만 진한 보랏빛과 어두운 옥빛이 걸윤의 그을린 피부와 잘 어울렸다.
“허성아! 어때? 형님 완전 멋있지?”
연천이 심드렁하게 반응하니, 걸윤은 옆에 있는 허성에게 물었다.
“네…….”
“그게 다야?”
“멋있습니다… 형님…….”
허성이 작게 답했다.
걸윤은 허성에게 뭔가를 묻고 답을 들을 때면 꼭 형님 소리도 같이 들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던 그 ‘형님’ 소리가 지금은 그래도 어찌저찌 나오고 있었다.
“넌 만날 이런 옷을 입고 살았구나. 그런데도 옷 태가 그렇게 안 나냐? 쯧쯧…….”
걸윤이 묻은 것도 없는 자신의 옷을 톡톡 털며, 연천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허!”
연천은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걸윤도 아이처럼 들떠서 마차에 올랐다.
허성은 마부석에 앉고, 곽림과 연천의 호위무사들은 말을 타고 마차 주위를 따랐다.
* * *
“으그그그그―”
마차에서 내린 걸윤이 기지개를 쭉 켰다.
“이야~ 좋은 옷은 구겨지지도 않구나.”
“들어가서는 예의를 차려.”
남궁세가의 입구에 선, 연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뭐든 대강대강 해치우고 마는 친우가 실수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야! 나 엄청 예의 바른 사람이거든. 쳇!”
걸윤이 샐쭉해진 얼굴로 말했다.
“…….”
보은상회의 가주 백연천은 이런 모임을 지겹도록 가졌다.
모임의 이유와 장소만 달랐을 뿐, 불편하고 어색하고 가기 싫은 건 늘 같았다.
연천은 언제나 입구부터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긴장이 되었다.
“…하암…….”
입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게 하품을 하는 걸윤을 보며 뻣뻣하던 연천의 몸이 조금 풀렸다.
걸윤과 걸화, 두 사람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조심성도 긴장감도 없이 풀어져서 연천의 마음도 느슨하게 만들었다.
“우리 허성이는 같이 못 들어가서 어떡하냐?”
걸윤이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안타까운 척 말했다.
“저야 괜찮습니다.”
허성의 대답에 걸윤이 께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형! 님!”
허성이 뒤에 그 한마디를 힘주어 붙였다.
“쉬고 있어. 가자!”
걸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하곤 몸을 돌렸다.
긴장한 표정으로 심호흡하고 있는 연천의 눈앞에 걸윤이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남매는 참…….’
연천이 피식 웃으며, 걸윤을 따랐다.
연천과 걸윤은 남궁세가의 시종을 따라 연회가 준비된 방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방, 여러 개의 탁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있었다.
연천은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연회나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고 해도 언제나 적응이 안 되고 불편했다.
연천은 입을 다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게 하면 꽉 막힌 것 같은 속이 조금 편해졌기에.
그때, 걸윤이 연천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쳤다.
“야! 저기 봐봐. 저 소저가 그 유명한 남궁소천 소저야.”
연천은 걸윤이 턱짓을 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궁세가의 막내딸 남궁소천이 손님들에게 예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남궁소천은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현섭이 늘그막에 낳은 늦둥이로 그의 고명딸이었다.
그녀의 미색은 중원에 소문이 자자했다.
집안도 좋고 영특했기에,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그녀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혼담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문만큼 예쁘긴 하다… 근데 저 영감이 너무 꼬장꼬장해.”
걸윤이 남궁현섭을 슬쩍 턱짓하며 말했다.
남궁현섭은 밀어닥치는 혼담에도 아직 남궁소천을 시집보낼 곳을 정하지 못했다.
혼담이 들어오는 곳은 모두 명문가에, 재력이며 권력이며 모자란 곳이 없었지만, 남궁현섭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남궁현섭은 가문의 덕망과 재력, 사윗감의 인물과 됨됨이, 무공과 시부모 될 자들의 인품… 아무튼 그 어느 것 하나도 모자란 곳 없는 곳으로 여식을 보내고 싶었다.
“…….”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연천은 걸윤의 실없는 얘기에 피식 웃었다.
심호흡했을 때 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긴장이 풀렸다.
“니 눈에는 저 소저가 곱지 않아?”
걸윤이 남궁소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유난히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는 멀리서도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중원의 수많은 남정네들이 선망할 만했다.
“뭐?”
“여기서 가문 좋고 예쁜 소저를 찾아봐.”
형님 소리를 하기 싫어서 걸화를 책임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딴소리하는 걸윤이었다.
보은상회 가주라면 충분히 마음에 드는 여인과 혼례를 치르고 예쁘게 살 수 있었다.
걸윤은 연천이 무고한 이들은 살인멸구했다는 스승의 오명을 벗겨드렸으니, 그것이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천마가 되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접고, 이제는 그만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넌 중요한 일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연천이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걸윤에게 말했다.
“중요한 일 뭐? 맛있는 거 먹는 일? 술 마시는 거?”
연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걸윤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남궁세가 가주의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잖아.”
연천은 그걸 또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축하 안 줘도 돼! 그게 뭔 중요한 일이냐? 암튼 앞뒤가 꽉꽉 막혔어. 이 자리가 진짜 환갑 축하 자린 줄 아냐? 이런 자리에서 맘에 드는 가문끼리 사돈 맺고 그러는 거야. 모르긴 해도 오늘 남궁세가에 엄청나게 혼담이 들어갈 거다.”
“…….”
연천은 뻥한 표정으로 걸윤을 쳐다보았다.
“머저리! 그리 돈을 뿌리고 다니면서 실속 없기는… 쯧쯧.”
“아니! 내가 무슨…….”
“가자! 아무도 없다.”
걸윤은 남궁현섭에게 인사하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연천이 걸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그를 따랐다.
“개방의 차남 배걸윤입니다. 가주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걸윤이 반듯한 자세로 포권지례하며 말했다.
누가 봐도 예의 바르고 격에 맞는 모습이었다.
“개방에서 오셨구려, 고맙네. 개방의 자제가 이리 준수하였구먼.”
남궁현섭은 비단옷을 차려입은 개방 차남의 모습에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걸윤이 웃으며 답했다.
“축하드립니다. 보은상회의 가주 백연천입니다.”
연천도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아이고! 보은상회의 가주께서 이리 직접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남궁현섭이 얼굴을 활짝 펴고, 과장되게 인사했다.
걸윤에게 하는, 뻔한 인사와는 달랐다.
“가주님의 생신인데 당연히 직접 와서 축하드려야지요.”
연천도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하하하, 고맙소. 차린 것은 없지만 부디 즐기다 가시오.”
남궁현섭이 연천에게 친근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연천이 답했다.
“소천아! 손님들을 안내해 드리거라.”
남궁현섭이 콕 찍어서 보은상회 가주를 안내하라고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은 그랬다.
가까이서 보은상회 가주 백연천을 잘 봐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