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화산의 제자들은 기운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육신의 피로보다 섬서에서 본 광경이 더 충격이었다.
자신들이 화산의 제자인 것이 밝혀졌다면, 섬서에 있던 무인들이 어찌 나올지 생각하면 더욱 우울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그저 보은상회의 표사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나마 보은상회에 나와 있는 자신들은 나았다.
화산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을 사형제들을 생각하면 답답했다.
청은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타오르는 장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답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돌았다.
표행을 나가면 기운이 떨어진다고 하여 쟁자수들이 작은 짐승이라도 잡아 굽거나 삶았지만, 오늘은 화산 제자들의 초상집 같은 분위에 쟁자수들도 적당히 있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표사님 좀 드십시오.”
쟁자수 하나가 청은에게 음식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청은은 정말이지 물 한 모금조차 마시고 싶지 않았다.
“기운이 없는 것은 알겠으나 내일도 표행을 나서야 합니다. 혹여 도적이라도 나타나면 어찌합니까? 저희는 표사님들만 믿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셔 보십시오.”
쟁자수의 말에 청은이 그릇을 받아들었다.
“고맙네.”
쟁자수는 청은이 몇 숟가락을 뜨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그의 작은 배려가 고마운 청은은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음식 그릇을 비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쟁자수들이 화산의 제자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나, 하나같이 먹기 싫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속상하다고 먹지 않으면, 상황만 더 나빠질 뿐이었다.
표물을 무사히 운반하려면, 싫어도 힘을 내야 했다.
청은이 일어났다.
“모두 힘든 것은 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표행을 완수해야 한다. 먹기 싫더라도 그릇을 비우도록 하여라. 저녁을 먹고 나서 청수와 청해부터 번을 서거라.”
청은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기운 없는 화산의 제자들은 숟가락을 들어, 음식을 입으로 떠 넣기 시작했다.
쟁자수들은 빈 그릇을 모아 씻고, 모닥불에 더 많은 장작을 넣었다.
커다란 모닥불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청은은 생각했다.
그저 주어진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금은 혈영천마의 팔을 운반하는 표행이 중요했다.
멍청하게 있어보았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힘을 내야 했다.
이번 일의 책임자는 자신이었으니.
머리를 흔들어, 섬서에서 보았던 것들을 떨쳐냈다.
* * *
“누구냐?”
번을 서던 청수의 목소리에 청은이 벌떡 일어섰다.
다른 표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을 향해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볍고 일정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자의 걸음이었다.
청은은 당장이라도 출수할 자세를 취하며, 소리 나는 곳에 집중했다.
검은색 무복을 입고, 검은색 복면을 한 자들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걸어왔다.
“화산인가?”
검은 복면의 사내가 당당하게 물었다.
“누구냐!!”
청은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내에게 호통을 쳤다,
“교주님의 팔을 가지러 왔다.”
복면의 사내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주? 마교인가? 지금의 교주는 상관량일 텐데, 여기서 그놈의 팔은 왜 찾아?”
청은이 비꼬며 말했다.
“흥!”
검은 복면 아래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교주님의 팔을 내놓고 썩 물러가라!!”
“주지 못하겠다면?”
청은의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복면 일당을 쏘아보았다.
“피를 흘려야 되겠지.”
복면을 한 사내가 말을 하고, 검을 뽑아 청은에게 달려들었다.
청은도 검을 빼어 들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적을 앞에 두고 긴장을 한 탓일까, 단전의 내공이 평소보다 강하게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청은이 복면 사내의 검을 가볍게 밀어내며, 사내를 향해 베어 들어갔다.
“읏차, 생각보다 제법이구나.”
복면한 사내가 몸을 비틀어 피하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복면 무리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청은의 공격에도 복면 사내는 줄곧 막고 피하기만 했다.
얼핏 보아도 화산의 제자들이 고전하고 있었다.
청은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얼른 눈앞의 적을 처리하고 사제들을 도우러 가야 하는데 이 자리에 묶여 있으니 말이다.
“어이! 집중!”
그 순간,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복면의 사내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려 청은의 백회를 향해 내리쳤다.
검을 둘러싼 기운은 크고 묵직했다.
“큭!!”
다급하게 복면 사내의 공격을 검으로 받아냈으나, 청은에게 사내의 기운은 감당하기에 버거우리만큼 강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공을 떠올리며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청은의 내공이 혈도를 세차게 내달렸다.
그 가운데 묘한 이질감이 드는 기운을 느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낯선 기운이 단전 아래쪽으로 내리꽂혔다.
잠시 후, 상황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이질감 있는 물질이 빠르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헉!! 뿌직.”
그의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컹한 것이 바지를 적시며, 찝찝한 감촉이 아랫도리를 휘감았다.
“흡!!”
생각지 못한 악취에 복면의 사내가 복면 위로 코를 그러쥐었다.
더러운 냄새가 청은에게서 풍겼다.
당황한 청은이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엉덩이에서 나온 물컹한 것이 다리를 타고 발까지 흘러내렸다.
어디로라도 숨어버리고 싶었지만, 저놈들을 막아야 했다.
청은은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은 감정과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엉덩이, 눈앞의 적을 두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였다.
“뿌직…….”
“어? 헙…!! 뿌지직…….”
“아…안 돼! 뿌직!! 뿌지직!”
“하아… 뿌지지지직…….”
여기저기서 기묘한 소리와 함께, 통탄에 잠긴 울부짖음이 들렸다.
코를 거머쥔 사내가 청은을 피해 마차로 향했다.
청은은 바지를 움켜쥐고 어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쫓았다.
짧은 거리지만, 경공을 쓰는 사내의 걸음은 빨랐다.
청은도 경공을 쓰며, 사내를 쫓다 걸음을 멈추었다.
단전 아래로부터 이질감 드는 물질이 한 번 더 다리 아래로 흘렀다.
청은이 미간을 확 구겼다.
내공을 사용할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사내는 벌써 마차를 뒤지고 있었다.
청은은 경공을 쓰지 않고 사내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나타난 다른 복면의 사내가 청은의 앞을 막았다.
사내가 복면을 했음에도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청은을 향해 더러운 것을 본다는 듯한 눈빛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바위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청은은 짧게 숨을 내쉬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공을 쓸 수 없었지만, 평소 외공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힘으로 검을 찔렀다.
사내가 가볍게 피하며, 검에 내공을 실어 청은의 검을 쳐냈다.
청은이 다시 달려들었다.
사내는 청은의 검을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싸우기보다 피하는 수를 쓰며, 청은과 가까이 붙지 않으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을 구긴 청은이 검을 가까이 잡고 사내의 몸통을 똑바로 찔러 들어갔다.
사내가 뒷걸음질 치며 피했다.
휘이익―
마차가 있는 곳에서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신호인 듯, 복면을 한 사내들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청은과 그의 사제들이 사내들의 뒤를 쫓았지만, 경공을 펼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자신들이 길게 쫓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표물을 도둑맞은 청은은 기운이 쭉 빠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제들의 엉덩이가 하나같이 묵직한 게, 누런 액체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일부는 흐느끼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풍겨 나오는 지독한 냄새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표물을 되찾으러 갈 의지보다 엉덩이를 씻고 싶었다.
사내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청은은 쟁자수들이 그릇을 씻었던 작은 냇가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오늘 하루를 도려내고 싶었다.
* * *
화칙을 마주한 청은과 화산의 제자들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표행에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그날 일이 떠올라 괴로웠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고개 숙인 청은의 작은 목소리였다.
“으흠… 표행을 하다 보면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 게지요. 고생들 많았습니다. 화산에는 내가 이야기할 터이니 그만 쉬시지요.”
화칙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이미 이번 표행이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
화산의 제자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 * *
연천의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
상자 속의 물건을 바라보며, 아프게 죄어오는 목울대를 꾹 눌렀다.
“으흐흐흐허… 제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신의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걸윤이 신의의 몸을 잡아, 머리 찧는 것을 말렸다.
“…….”
모충일의 얼굴에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옆에 있어야 했다고, 자신이 없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충일이었다.
신의는 의원이었지만, 자신은 혈영천마의 호위였으니.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그분이 그리되었다는 생각이 항상 가슴 한편에 박혀 있었다.
모충일은 소리 없이 아픔을 흘렸고, 신의는 소리 내어 오열했다.
연천은 가만히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모충일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걸윤은 신의를 부축해, 의약당으로 향했다.
“스승님!”
걸화가 놀라 뛰어나왔다.
“왜 이런 거야?”
걸윤을 보고 물었다.
“좀 충격받은 일이 있었어. 안으로 옮기자.”
걸윤의 말에 걸화가 뛰어 들어가 신의의 침상에 이불을 걷었다.
걸윤이 신의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걸윤과 걸화는 신의가 쉴 수 있도록 밖으로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모르는 일이 있지? 너는 알지?”
걸화가 걸윤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몰라…….”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신의를 본 걸윤의 마음도 먹먹한 것이 편치 않았다.
“거짓말 마! 나한테는 왜 얘기 안 하는 건데? 얘기해줘! 나도 알고 싶어! 너랑 백연천 사이를 인정해 줄 테니깐 얘기해줘. 응?”
“하휴… 나 지금은 진짜 쉬고 싶어. 나중에 얘기해.”
걸윤이 힘없이 말하고 몸을 돌렸다.
“진짜다!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 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걸화가 멀어져가는 걸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연천은 침상 옆에 상자를 놓고 밤새 손으로 쓰다듬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