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한참을 고민하던 교준이 입을 열었다.
“내공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내공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걸화 소저가 내공을 증진하는 환단이라 하여 먹은 적이 있습니다. 향도 맛도 거의 없는 작은 환단인데 그것을 먹고 내공을 쓰기만 하면 배가 요동치는 통에… 하루 종일 뒷간에 있었습니다.”
교준은 혹여 신의가 이 일로 걸화를 쫓아낼까 싶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번 일에 그 약을 쓰는 것만큼 괜찮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쓰려면 걸화가 필요했기에, 쫓아내지 못할 것이리라 생각해서 말을 한 것이다.
“…….”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교준을 쳐다보았다.
이야기를 듣는 신의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났다.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걸화를 쫓아낼지 말지 갈등했다.
걸화 덕에 혈영천마의 억울함을 풀었다.
그리 오랫동안 찾지 못한 해결책을 단숨에 만들어 내어서 말이다.
어찌 되었건 그 아이의 덕을 봐 놓고는, 바로 쫓아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의는 딱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 모른 척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걸화 자신은 모르고 한 일이지만, 혈영천마의 억울함을 풀게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말이다.
신의는 깊게 심호흡하며, 혼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허! 암튼 걔는…….”
걸윤이 혼자서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교준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회의는 이렇게 결론이 난 것 같았다.
당분간 신의와 걸화가 바쁠 듯했다.
* * *
보은상회에 들어와 있는 화산의 무인은 딱 열 명이었다.
총관 화칙은 본점으로 그들 열 명을 모두 불렀다.
이번 표행은 화산의 수치를 해결하는 일이기도 했다.
화산에 맡겨야 했다.
“이번 일이 어떤 일인지는 알고 있겠지요?”
화칙의 물음에 화산의 표사들 중 제일 서열이 높은 청은이 입을 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꼭 이 표행을 완수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비장했다.
화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화산의 제자를 노리는 자들이 많으니 각별히 몸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화산의 제자임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고,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화산에서 온 표사들이 화칙의 말에 답했다.
보은상회의 푸른 깃발이 휘날리는 마차에는 표행 중 먹을 물과 음식만 실려 있었다.
화산으로 가서 혈영천마의 팔을 가지고 무림맹에 전달하는 이번 표행에는, 쟁자수 몇몇과 화산의 제자들로만 이루어졌다.
화산 제자들은 답답한 표정으로 말에 올랐다.
빈 마차 옆으로 화산 제자들이 말을 타고 나아갔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화산의 무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낮, 멀쩡한 길에서 욕을 먹기도 하고 구정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수일검은 중원의 영웅이고, 화산이 자랑이었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중원의 살인마에 파렴치한 인간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을 상황에 마음이 갑갑했다.
아무것도 싣지 않은 마차와 말은 무거운 걸음으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사형, 앞으로 화산은 어찌 됩니까?”
청상이 그의 사형인 청은 옆에서 말을 몰며 물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지만 좋지 만을 않을 것이야.”
청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희는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앞으로 영영 화산의 무복은 입지도 못하는 것입니까?”
청상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 않겠느냐?”
청은이 사제를 타일렀다.
“혈영천마가 죽고 십수 년이 지나도 천하의 악인 꼬리를 떼지 못하였는데, 화산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청상은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쎄다… 장문인과 장로님들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청은이 길게 침음을 흘렸다.
“…….”
청상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바로 장문인과 장로님들이었다.
청상은 당장 화산에서 수일검을 잘라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일검의 그 파렴치한 짓은 화산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를 내쳤다면, 화산의 상황이 지금보다는 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데, 미련하게도 수일검을 화산 내에 칩거하게 도와주고 있었다.
그로 인해, 화산 전체가 마교와 손을 잡고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문파가 되어버렸다.
수일검이라는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못해, 화산 전체가 곪아갔다.
장로들과 장문인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한창때인 2대 제자와 어린 3대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욕을 먹고 있었다.
한때는 화산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어디를 가나, 호의의 눈길이 넘쳐났다.
새하얀 매화가 새겨진 무복을 입고, 중원을 돌아다니는 것이 그리도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데 지금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화산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화산의 무복도 입지 못하는 이 꼴이 말이다.
답답할 뿐이었다.
청은과 청상, 나머지 제자들도 말이 없었다.
앞만 보고 묵묵히 말을 몰 뿐이었다.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저 앞이 깜깜했다.
표행은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다.
섬서, 화산이 자리 잡은 그곳으로 말이다.
늘 보아오던 산과 강, 점포와 길, 길가의 나무와 냄새마저도 그대로인데, 화산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만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도처에 낯선 무인들이 어슬렁거렸다.
섬서에는 화산과 종남이라는 두 개의 큰 문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화산이나 종남의 제자들이 아니라도 낯선 무인들이 지나는 일은 많았다.
그저 하루쯤 묵고 지나가는 무인들이거나, 화산 아니면 종남에 볼 일이 있는 자들이었다.
조용히 제 갈 길을 가거나, 호의를 가지고 화산이나 종남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처럼 날카로운 눈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것은 화산이나 종남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섬서에 있는 이들은 잔뜩 날이 선 눈을 하고 있어서, 잘못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피를 볼 것처럼 섬뜩했다.
화산의 처지가 이러하니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종남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을 법도 하건만 모른 척 묵인하고 있었다.
그동안 꼴 보기 싫었던 화산이 몰락해가는 것을 관망하며, 섬서를 돌아다니는 무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무인들이 이리 많습니까?”
섬서로 들어선 청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지각색의 무기를 든 무인들이 살기를 뿌리며, 섬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흐음…….”
청은이 침음을 흘렸다.
청은도 출발 전에 섬서의 상황에 대해 듣기는 했다.
수일검을 베어 이름을 알려보겠다는 무인들이 섬서로 모여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목도한 광경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화산이라는 이름 앞에 고개도 못 들던 것들이 섬서를 제멋대로 나다니고 있다니…….’
감히 낭인 나부랭이들이 화산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활보하는 꼬락서니를 보며 참고 있자니, 울분이 치밀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껏 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낭인들을 노려보는 청은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청은뿐이 아니었다.
표행 중인 모든 화산 제자들은 울컥울컥 올라오는 울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청은은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청상을 바라보았다.
당장 표행을 걷어 차버리고, 누구에게든 달려들 것 같았다.
“으흠…….”
청은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을 앞세워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지금은 표행이 우선이었다.
무사히 혈영천마의 팔을 무림맹에 넘겨, 수일검이 그러쥐고 있던 그 치부를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이 표행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진정하거라.”
청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청은의 말에 조금 나아진 듯 보였지만, 청상은 여전히 분노에 찬 얼굴로 길거리 무인들을 쏘아보았다.
청은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몰았다.
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자신은 무슨 수를 쓰든 이 표행을 완수해야 했으니.
무인들이 북적거리는 섬서는 묘한 활기를 띠었다.
객잔에도 다점에도 대장간에도 무인들이 들어 수선스러웠다.
그 가운데 문이 닫힌 점포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정을 누르고 있는 청은의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었다.
화산의 소속이었던 점포들이 하나같이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꾸역꾸역 말을 몰아, 약속한 포목점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포목점 앞에는 낭인 몇이 아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청은과 화산의 제자들은 그들을 모른 척, 점포의 문을 열었다.
“…뉘슈?”
포목점 앞에 껄렁하게 앉아있던 낭인 중 하나가 물었다.
그의 표정과 말투는 불손했다.
청은은 기가 찼다.
남의 가게 앞에서 가게 주인에게 누구냐니, 세상에 이런 법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치미는 분노를 눌러 삼키려니, 목구멍으로 돌멩이를 넘기는 것처럼 불편하고 아팠다.
청은은 길게 숨을 내뱉고, 준비했던 말을 침착하게 꺼냈다.
“보은상회에서 왔소. 이곳에 팔지 못하게 된 포목은 보은상회에서 가지고 갈 것이오. 후원에 대한 대가로 표사를 지원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가져가는 것이니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보은상회라는 말에 낭인들은 물러났다.
마차에 새겨진 보은상회의 깃발을 봤기에 그나마 예를 갖추어 물어본 것이리라.
청은과 제자들은 우울한 얼굴로 포목을 마차에 실었다.
청은은 가게 구석진 자리에 비단 천으로 쌓인 나무 상자를 발견하곤, 포목과 함께 마차로 옮겼다.
열 명의 화산 제자들은 포목점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은 씁쓸한 얼굴로 섬서를 빠져나왔다.
섬서에 오래 있어봤자 못 볼 꼴만 볼뿐더러, 혹여 그들의 얼굴을 아는 자라도 만나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 * *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뒤를 따르는 쟁자수들만 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걸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쉬지 않았고,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말을 몰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무거운 얼굴로 그저 앞으로만 나아갔다.
해가 저물어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다 곧 깜깜해졌다.
더 이상 표행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청은이 짧게 말했다.
눈치를 보던 쟁자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풀어 천막을 치고, 금세 불을 피우고 솥을 꺼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