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지금 어디 있느냐?”
연천이 묵직한 목소리로 곽림에게 물었다.
“보은장 입구에 있습니다.”
곽림이 반듯하게 대꾸했다.
“흐음… 알았다. 내 채비를 하고 부르겠다.”
연천의 말에 곽림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기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겠지.”
걸윤이 말하곤, 고기 한 점을 입에 쑤셔 넣었다.
“그래, 그것이 좋겠다.”
개방도가 이리 늦은 시간에 보은장에 있는 것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걸윤이 술이든 병을 들고 일어났다.
“그건 왜?”
연천이 걸윤의 손에 든 술병을 보고 물었다.
“안주는 있는데 술이 없으면 심심하잖아. 저기서 구경한다.”
가볍게 말하고는, 연천의 방 뒤편에 화려한 자수가 놓인 천 뒤로 걸어갔다.
“술상을 치우거라!”
연천이 소리치자, 곧 시녀들이 들어와 상을 가지고 나갔다.
“손님을 들라 해라.”
연천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반듯하게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잿빛 무복을 입은 사내 둘이 연천의 방으로 들어왔다.
화산의 제자라면 으레 매화가 그려진 새하얀 무복을 입는다.
연천은 잿빛 무복을 입은 사내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중 한 사내가 눈에 익었다.
운호의 제자라고 했던 청명이었다.
“앉으시오.”
걸윤과 술자리를 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감춘 연천이 보은상회 가주의 모습으로 말했다.
연천의 말에 두 사내는 연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이리 찾아와 송구합니다.”
청명의 옆에 있는 사내가 말했다.
“괜찮소.”
연천이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화산의 제자 운천이라 합니다.”
운천이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청명입니다.”
청명도 따라서 자신을 소개했다.
“소협은 낯이 익네.”
연천이 청명에게 말했다.
그날 화산에서 온 수일검 운호와 그의 제자 청명의 모습은 연천의 가슴 깊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많은 문파에서, 많은 객이 왔다 해도 그 두 사람의 모습만은 눈에 선했다.
“네… 저희가 화산의 무복을 입지 못하고 오게 되었습니다. 혹여 가주께서 저희가 화산에서 온 것을 믿지 않으실까 하여 이 아이와 함께 왔습니다.”
운천이 청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천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화산의 사정이 말이 아닙니다. 화산의 무복을 입고 중원을 돌아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부끄럽지만 이런 복장으로 가주를 뵙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는 운천은 정말 수치스러운 얼굴이었다.
한순간에 영웅의 문파에서 사기꾼에 살인마의 집단이 되어버렸다.
화산의 무복조차 떳떳하게 입지 못하고, 화산의 제자라는 이름을 달고서는 낯을 들고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이해합니다. 수일검께서는 어찌 지내십니까?”
운천에게 말을 하는 연천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수많은 장로와 화산의 제자들이 그를 내치라고 권하였지만, 마음이 약한 장문인께서 차마 내치지 못하시고 화산 깊은 산 속의 움막에 홀로 기거하도록 하였습니다.”
말을 하는 운천의 얼굴에는 불만의 빛이 내비치었다.
“으음… 화산에서 걱정이 많으셨겠소.”
연천의 표정은 운천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화산 소속의 점포를 봐주던 상회에서는 불똥이 튈까 염려되어 더 이상 점포를 봐주지 않으니 매달 들어오던 돈도 끊기고, 화산의 무관들은 모두 간판을 내렸습니다. 문하생들이 대거 나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위협까지 받으니 버틸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연천의 너그러운 얼굴 때문인지, 운천은 담아놓았던 말을 쏟아냈다.
굳이 운천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것들이기는 했다.
“당장 마을에 내려만 가도, 화산의 무복을 보고는 돌팔매질을 해댑니다. 그러니 이리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운천의 얼굴은 어두웠다.
“고생이 많으셨소. 한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시었소?”
“…저희가 보은상회에 어려운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운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연천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든지 들어줄 터이니, 말을 해보라는 얼굴이었다.
“아시다시피 화산에 혈영천마의 팔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관하는 것 자체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가 무림맹에도 들어간 모양입니다. 맹에서 직접 처분하겠다고 보내라고 하는군요.”
혈영천마의 팔이라는 말에, 무언가가 연천의 가슴을 움켜쥐는 것처럼 옥죄어왔다.
“그렇군요.”
연천은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운천의 말에 그저 맞장구쳤다.
“혈영천마의 팔을… 그 표물을 운반해 주십시오. 화산이 운반하려 했다가는 무림맹까지 도착은커녕 섬서 밖으로 나가기도 어렵습니다.”
운천의 얼굴은 어두웠고, 목소리는 낮았다.
보은상회마저 이 일을 거절하면, 부탁할 만한 곳이 없었다.
“허허… 보은상회에서 화산으로 가서 표물을 가지고 나오면 어차피 결과가 같을 텐데요.”
연천이 곤란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당연히 이 부탁을 승낙할 것이지만, 단박에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화산으로는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섬서에 저희 점포가 몇 개 있습니다. 지금은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나 보은상회에서 한번 보러 오는 것이라면 괜찮을 것입니다. 언제 오실지 연통을 주시면 저희가 팔을 가지고 점포로 가겠습니다.”
운천의 목소리는 사정 조로 바뀌어 있었다.
“점포까지 표물을 가지고 나올 수도 있고, 보은상회까지 오신 두 분이서 조용히 운반해도 되는 것 아니겠소?”
연천이 이번 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한 낌새를 풍겼다.
“저희가 화산을 빠져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혹여 수일검이 화산에서 파문되어 쫓겨나면 그를 해할 생각으로 화산 인근에 무인들이 깔려 있습니다. 화산의 문 앞에까지 와서 살기를 품어대는 자들도 있습니다.”
운천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희도 식품을 배달 온 수레에 숨어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화산에 배달하는 것도 꺼리고 있습니다. 다음번에 또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한데 어찌 무림맹까지 운반을 하겠습니까? 부탁입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연천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이런 횡재가 있나.
스승님의 팔을 어떻게 되찾아올지 그리 고민하고 있었는데 알아서 가지고 와 바치겠다니.
하지만, 연천은 고민에 빠진 척 쉽게 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연천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보은상회에서 화산의 일을 도왔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보은상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화산의 문 앞까지 지키는 이들이 있다면 표물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훔치려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겁니다.”
“저희가 부탁드릴 곳은 이제 보은상회뿐입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운천이 포권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미 여러 곳에 부탁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보은상회마저 거절하면 정말 방법이 없었다.
“으흠…….”
연천은 크게 숨을 내뱉고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이미 여러 표국과 문파에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을 당한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아쉬운 곳은 화산이었다.
“…알겠소. 시일과 방법을 정하여 연락을 드리리다.”
연천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운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운천과 청명의 얼굴이 밝아졌다.
“밤도 늦었는데 쉬었다 가시오.”
연천이 느긋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혹여 저희를 알아보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기에 밤에 움직여야 합니다. 가주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운천은 보은상회에서 도와주겠다고 하니 일단은 한시름이 놓였다.
하지만, 다시 화산으로 돌아가는 일도 앞으로의 상황도 막막했다.
“내 걱정까지 해주시니 고맙소.”
연천이 답을 하며 웃었다.
운천과 청명은 연천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보은상회를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연천의 전각을 빠져나가고 잠시 뒤, 걸윤이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뭔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나타났다.
“이야― 이런 일도 있네, 잘 됐다.”
걸윤이 웃으며 말했다.
걸윤을 보고 연천도 웃었다.
일이 잘 풀려서 기분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도 스승님을 욕하고 자신을 싫어하던 걸윤이 옆에서 저리 말해 주는데 새삼 웃음이 나왔다.
‘사람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구나…….’
“가지고 올 생각만 하면 되겠구나.”
연천의 목소리는 아련했다.
“뭐, 이제 거의 해결된 거 아니야? 보은상회에 들어온 표물을 가지고 오는 것이야 힘든 일도 아니잖아.”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돼.”
연천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걸윤은 손에든 술병을 들어 술을 넘겼다.
“크으…….”
* * *
모충일과 신의, 화칙과 걸윤이 연천의 방에 모여 앉았다.
표물을 훔칠 때 살수대를 이용할 생각이었기에, 살수대의 대주를 대신해 교준과 곽림도 함께 했다.
“도적 떼를 만난 것처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걸윤이 말했다.
“이름 없는 도적 떼가 보은상회의 표물을? 그것도 혈영천마의 팔이 든 것을? 그건 이상하네.”
화칙이 답했다.
“음… 그럼 마교에서 가져간 걸로 하는 건 어떨까요?”
걸윤이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그건 괜찮군. 표물은 화산에서 온 표사들이 옮기도록 해야 해.”
연천이 답했다.
“화산의 표사들로만 배치를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나, 그들은 표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싸울 겁니다. 인명피해는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곽림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것이 싫다면 우리가 믿을 만한 표사를 넣어 표물을 도둑맞은 척해야겠지요. 자연스럽지도 않을 것이고 화산에서 온 표사들이 그 일에서 배제가 된 상태에서 표물을 도둑맞았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화칙이 말했다.
“으음… 애먼 사람들을 다치게 할 필요는 없는 일인데…….”
연천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표물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사들이 다치지 않도록 가지고 오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표사들의 음식에 약을 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걸윤이 말했다.
“들키지 않게 약을 탄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수면제를 쓴다면 증인이 없습니다. 화산 표사들의 눈으로 마교가 표물을 훔치는 것을 보게 해야 합니다.”
모충일이 말했다.
“그럼 내공을 못 쓰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교준이 말했다.
“젊은 무인들 모두의 내공을 상하게 하는 게 옳은 일은 아닌 듯싶네만…….”
신의가 교준에게 대꾸했다.
신의의 말에 그의 눈치를 보던 교준은 쉬이 말을 꺼내지 않고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