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연천아! 나 들어간다.”
걸윤이 연천의 방으로 불쑥 들어서며, 대충 말했다.
연천은 들어오는 걸윤을 보고 웃었다.
‘저럴 때 보면 참 닮았단 말이야… 개방도들은 다 저리 성질이 급한가……?’
걸윤이 채 앉지도 않고, 말을 먼저 꺼냈다.
“무림맹에서 혈영천마의 팔을 보내라고 했대. 화산에서는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고.”
“아… 드디어…….”
짧은 말을 내뱉는 연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떤 방법으로 운반할지 정해지면 적당한 곳에서 빼앗으면 될 게야.”
“…….”
걸윤의 말에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다리면 되니깐 얼굴 좀 펴고 있어라.”
“내 얼굴이 뭐……?”
“썩었지, 썩었어.”
“…….”
걸윤의 말에 연천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좋은 거 알아 왔는데 술 한잔 안 줄 거냐?”
“너랑 있다가 주정뱅이 되겠다.”
“보은장 술과 안주가 너무 맛있잖아.”
걸윤이 헤헤거리며 웃었다.
“여봐라, 술상을 내어 오너라!”
연천이 밖을 향해서 말했다.
연천도 술상을 앞에 두고 걸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게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 생긴 친우라는 존재가, 그를 알아가고 그와 교분을 쌓아가는 것이 연천의 마음속에 굳어버린 무언가를 녹이고 있었다.
“하암…….”
걸윤은 입을 찢어지게 벌리고 하품을 하며 목을 벅벅 긁어댔다.
어디에 있어도 제집 안방처럼 편안하고 느른하게 허물어져, 옆 사람마저 긴장감이 풀어지게 만들었다.
연천은 걸윤의 무방비하게 늘어진 모양새를 익숙하게 바라보았다.
곧 술상이 들어오고 시중을 들 모양인지 허성이 함께 들어 방 한편에 조용히 섰다.
“어? 이 친구가 그 친구구먼!”
걸윤이 허성을 요상하게 일컬으며 아는 체를 했다.
“…….”
허성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꾸벅였다.
“거기 서서 뭐 해?”
걸윤이 허성에게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가져다 드리려고…….”
허성이 친한 척하며 말을 붙이는 걸윤이 민망하고 쑥스러워 말을 흐렸다.
“필요한 거? 그런 거 없어. 이리 와, 이리 와! 같이 한잔하자.”
걸윤이 손짓을 하며 허성을 재촉했다.
“네에? 저는 일을 해야 해서…….”
허성이 연천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연천이가 너 구박하냐? 왜 그렇게 눈치를 봐?”
“아뇨! 아니요! 그, 그게 아니옵고… 저는 그게…….”
허성은 오랫동안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스승과 둘이 먹고살았다.
돈을 받으며 일하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고, 돈을 지불하는 주인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몸에 배어있었다.
“괜찮다. 이리와 앉거라.”
연천이 허둥대는 허성에게 말했다.
“…….”
허성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연천과 걸윤에게 쭈뼛대며 다가가 탁자의 한쪽 끄트머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탁자도 넓은데 이리 더 가까이 와, 가까이.”
걸윤이 허성을 끌어당겼다.
“네… 네… 갑니다. 제가 가요.”
허성이 엉거주춤 걸윤에게 다가갔다.
“내가 이름을 들었는데 잊어버렸어. 이름이 뭐였지?”
걸윤이 넉살 좋게 물었다.
“허성이라고 합니다.”
“아! 맞다 맞다, 허성! 나이가 올해 스물 맞지?”
“네! 맞습니다.”
“나는 배걸윤이라고 해. 내가 스물둘이니 형님이라고 불러.”
“네에?”
허성은 다시 한번 더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분의 손님을 어찌 형님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안 될 말이었다.
“형님은 좀 그런가? 그럼 편하게 그냥 형이라고 불러! 반갑다. 허성아! 한잔 받아.”
“저기 저…….”
허성은 얼떨떨한 얼굴로 걸윤이 내민 잔을 받았다.
걸윤은 자신과 연천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
걸윤이 잔을 앞으로 내밀자, 연천도 따랐다. 허성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잔을 내밀었다.
“크으… 오늘도 술맛이 좋구나.”
걸윤이 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연천도 조용히 잔을 비웠다.
허성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술잔을 비우곤 진저리를 치며 얼굴을 구겼다.
“술 잘 못하는구나, 억지로 마실 필요 없어. 안주 먹어, 보은장 음식이 예술이지.”
“네에…….”
허성이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튀긴 야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형이라고 부르라니깐.”
걸윤이 허성을 재촉했다.
허성은 조용히 앉아있는 연천의 눈치를 살폈다.
“편히 해라.”
연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걸윤이 씨익 웃었다.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얼른 형이라고 불러봐!’라고.
“…혀, 혀, 혀형님…….”
“크하하하하. 그래! 마시자!”
걸윤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형님’이라는 한마디를 내뱉는 허성을 보고 웃었다.
잠시 후.
“형! 딸꾹! 우리 스승님이 얼마나 성질이 딸꾹! 까다로운지 알아요? 내가 비질만 3년을 배웠어요. 그냥 쓸기만 잘 쓸면 되지. 딸꾹! 뭔 자세가 필요하고 뭐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되는 게 많은지. 딸꾹!”
허성이 혀 꼬인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얘 얼마나 마셨냐?”
걸윤이 연천에게 물었다.
“석 잔.”
연천이 짧게 답했다.
“술 석 잔에 사람이 이렇게 될 수도 있냐?”
“되는 사람도 있네.”
연천이 어이없는 얼굴로 허성을 바라보다, 자신의 잔을 비웠다.
“거! 형님! 거! 술 좀 더 주쇼…….”
허성이 술잔을 들고 걸윤에게 말했다.
“허허! 이놈 웃긴다.”
걸윤이 허성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가주님! 아니… 형님! 딸꾹! 형님네 스승님은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면서요? 딸꾹!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 스승님 보셨죠? 딸꾹! 내가 스승님을 보고 저얼대 딸꾹! 술은 입에도 안 대겠다고 혼자서 맹세했는데… 딸꾹!”
“술 더 줘?”
걸윤이 잔을 비우는 허성에게 물었다.
“더! 더! 더 줘요. 아하… 맛 좋다! 딸꾹!”
허성이 잔을 비웠다.
“계속 줘도 되겠어?”
연천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더 달라잖아.”
걸윤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한잔을 더 마신 허성은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
“…….”
“얘 자나?”
걸윤이 허성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으흐흐흑…흑…….”
허성은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으흠…….”
연천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수울! 술!”
눈물이 그렁그렁한 허성이 걸윤에게 빈 술잔을 들이밀었다.
걸윤이 찝찌름한 표정으로 술을 채워주었다.
“내가 괜히 술을 먹였나……?”
“으흑… 내가 어릴 때는 우리 스승님이 흑… 만날 나 업고 장에 가고, 산에도 가고 흑… 밥도 잘해주고… 으흐흐흑… 그랬는데 흑… 이놈의 술! 흑… 네놈 때문에 스승님이 그렇게 된 거야… 으흐흐흐흐흑…….”
허성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울먹였다.
“하…….”
걸윤은 허성이 하는 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허성은 바닥에 널브러져서 중얼거렸다.
“…흑… 스승님… 보고 싶어요… 으으흥…….”
연천이 불편한 얼굴로 허성을 바라보았다.
* * *
며칠 뒤, 걸윤은 익숙하게 연천의 방으로 들었다.
방의 한편에 서 있던 허성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뭘 놀라? 몸은 괜찮냐?”
“네…….”
허성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혀…형님…….”
“그렇지. 오늘도 한잔할 건데 같이 할래?”
“아뇨! 아뇨! 절대 안 합니다.”
허성이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같이 해도 괜찮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연천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허성은 며칠 전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럼 그만 들어가서 쉬거라.”
“네! 가주님!”
허성이 답했다.
“엥? 왜 호칭이 그렇게 바뀌었어?”
걸윤이 놀리듯 말했다.
“제, 제가 호칭을 뭘……?”
허성이 말을 더듬거렸다.
“연천이한테도 형님이라고 잘만 그러더니 갑자기 또 왜 가주님이야?”
“저는 가주님이 편합니다.”
허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한번 형님은 계속 형님이지. 그치? 연천아!”
걸윤이 연천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연천의 대답에 허성은 사색이 되었다.
“내 말이 맞잖아. 연천이한테도 불러봐, 형님이라고.”
걸윤의 말에 허성은 울상이 되었다.
“어서!”
걸윤이 허성을 재촉했다.
“그래, 불러보아라.”
연천까지 나서자 허성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혀, 혀엉…니임…….”
“잘했다. 오늘은 쉬고 담에 또 한잔하자!”
걸윤이 전각을 나서는 허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허성은 고개를 꾸벅이고 조심스럽게 전각을 빠져나갔다.
맑은 액체가 작은 잔으로 꼴꼴꼴 흘러 들어갔다.
연천은 걸윤에게 받은 잔을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걸윤의 잔을 채웠다.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술잔을 비웠다.
“화산에서 어지간히 방법을 물색 중인가 봐. 그렇겠지, 이 상황에서 누가 화산을 도우려고 하겠어? 자신들이 직접 옮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화산은 모두의 표적이라 쉽지 않을 게야.”
걸윤의 말에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의 정보력이 대단하긴 하구나. 걸화가 나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보라면 하오문이라고 하면서 하오문으로 데려간 게 생각이 나네.”
연천이 피식 웃었다.
“걔가 그랬어?”
“응…….”
연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튼 걔는 이상해. 내가 너의 친우로서 하는 말인데 어지간하면 걔랑 가까이 지내지 마. 너 걔랑 같이 있는 거 그거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다.”
연천에게 형님 소리를 하기 싫어서 걸화를 책임져라, 어째라 하던 걸윤은 딴말을 하고 있었다.
연천과 가까워질수록 이리 멀쩡한 사람이 왜 배걸화 같은 애를 그리 챙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걸윤의 말에 연천은 그저 웃으며 잔을 비웠다.
걸윤이 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연천의 반응은 저랬다.
답 없이 그저 웃었다.
“가주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거라.”
연천의 답에, 호위대장 곽림이 들어와 조용히 연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연천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했다.
“뭐라?”
곽림의 이야기에, 연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
걸윤은 놀란 연천을 보며, 술을 홀짝였다.
“화산에서… 사람이 왔어.”
천천히 입을 여는 연천의 얼굴은 비장했다.
“뭐? 켁…컥…컥…….”
걸윤은 술이 목에 걸려 기침을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