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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42화 (142/230)

142화

【그것은 찾아와야겠습니다】

“부르셨습니까요?”

허성이 연천의 방에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흠…….”

연천은 허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원수의 제자다’, ‘어쩔 수 없어서 잠시 떠맡은 것이다’ 생각하려고 애를 썼지만,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슬프고 외로웠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씩씩하게 보은장의 잡일을 찾아서 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

허성은 연천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보은장에서는 지낼 만하느냐?”

연천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요.”

허성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싹싹하게 답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은 없느냐?”

연천은 허성이 시종처럼 잡일이나 하고 있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돈을 쥐여 주어 독립을 시키든, 상회에 한자리를 주어 내보내든 좀 더 자립해서 살았으면 싶었다.

“지금도 좋습니다만, 혹여 가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가주님을 뫼시고 싶습니다.”

허성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나를? 나를 모시고 싶은 연유가 무엇이냐?”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가주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물론 보은장에 있는 것이 가주님을 따르는 일이지만, 할 수만 있으면 가까이서 뫼시고 싶습니다.”

“허허…….”

‘저런 답답한…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연천은 허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허성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연천의 답을 기다렸다.

연천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는 지금처럼 보은장의 잡일이나 하며 살 것이다.

“스승께 무엇을 배웠느냐?”

금월대사의 제자였다.

무공 실력이 나쁘지 않다면 곽림에게 맡겨 호위로 쓸 수도 있고, 보은상회에 표사로 보낼 수도 있었다.

“어… 뭐… 마당 쓰는 거하고, 나무하는 법이랑, 장작 패는 방법… 쌀을 씻는 거, 물고기 잡는 법…….”

“그런 것 말고 스승께 배운 것이 없느냐?”

“다른 거요? 어… 저는 술 같은 거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허성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음! 무공을 배우지 않았느냐?”

“무공요? 아이참… 가주님도. 저희 스승님 못 보셨습니까? 어디서 무공을 배우겠습니까?”

“으흠…….”

‘금월대사가 정녕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 밥하고 청소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말인가… 저 아이는 자신의 스승이 금월대사인 것은 알고나 있는 겐가?’

당연히 무공을 배웠을 거라고 생각했던 연천은 당황스러웠다.

“…….”

허성은 여전히 고개를 조아리고 연천의 답을 기다렸다.

“무공을 배운 바는 전혀 없다고…? 으흠…….”

연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금월대사는 어찌 살았던 것인지…….’

연천이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허성은 조심스럽게 연천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니다. 혹여… 스승을 해한 자들이 누구인지 짐작 가는 바는 없느냐?”

이미 모충일이 마교의 상층부에서 금월대사를 해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연천은 허성에게 물었다.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술만 마시면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니… 가만두지 않겠다는 자들이 많았습죠… 저는 옆 마을에 두꺼비파 황가하고, 저잣거리 왕적… 그리고 아랫땀 객잔 거리의 도박꾼 곽가놈도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으흠…….”

허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천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

말을 끝낸 허성은 조용히 연천의 처분을 기다렸다.

연천은 고개 숙인 허성을 바라보았다.

대책 없는 술주정뱅이 스승의 유지를 지키려고 자신을 가까이서 모시겠다는 답답하고 우직한 그를 말이다.

“내일부터 형란이 대신에 네가 내 시중을 들도록 해라.”

연천이 내려앉은 목소리로 명했다.

“네! 감사합니다.”

허성이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그만 쉬거라.”

연천의 말에 허성은 고개를 조아리며 연천의 전각을 빠져나갔다.

연천은 눈을 내리감았다.

자신의 향해 웃음 짓는 스승님의 얼굴과 자신을 기다렸다며 웃어 재끼던 금월대사의 모습이 뒤얽혔다.

* * *

모충일과 신의는 옆에 앉은 걸윤을 보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믿을 만하여, 함께해도 된다 하였습니다.”

연천의 말에도 모충일과 신의는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걸윤도 혈영천마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 대표라 할 수 있는 자들 중에 신의가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워낙 대놓고 경계를 하는 통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연천이 모충일과 신의를 돌아보며 물었다.

모충일이 걸윤을 한 번 보고, 다시 연천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수일검이 지금 화산에 숨어 있는 상황에서 그를 잡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화산에 있는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장문인이 화산 깊은 곳 모처로 운호를 내쫓기는 했으나, 화산 밖으로 내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다.

운호는 장문인에게 싹싹 빌었다.

자신이 양민 마을을 없앤 데 일조한 것은 잘못이지만 자신은 결단코 몰랐다고.

정말 악마들인 줄 알았다고 말이다.

혈영천마와 악마들을 없앤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고 그 모든 것이 다 화산을 위한 일이었다고 호소했다.

마음 약한 장문인은 운호를 내쫓는 시늉만 했을 뿐, 사실은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다른 문파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화산의 깊숙한 곳으로 그를 내보내서 말이다.

“시일이 좀 지나 경계가 느슨해지면 제가 가서 상황을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신의가 말했다.

걸윤은 그의 말에, 신의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태연한 척했으나, 속으로는 많이 놀라고 있었다.

신의는 어떤 문파에서건 환영받는 존재고, 함부로 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은 신의가 중립을 지키는 사람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의는 굳이 어딘가에 소속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신의가 한 문파도 아니고, 과거의 천마를 위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니 놀랄 수밖에.

“저는…….”

연천이 입을 열고 뜸을 들였다.

“그대로 두었으면 합니다.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는 법이지요. 세상 모두의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으며 언제 누가 자신을 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도록 내버려 두고 싶습니다.”

어린 연천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스승님이 그랬던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퍼붓는 모욕을 모른 척, 숨어서 살았다.

언제 누가 당산의 진법을 뚫고 들어와 자신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믿었던 이에게 당한 배신감을 끌어안고, 자신의 안일함이 만들어낸 상황을 아파하면서 그리 살았다.

죽는 것보다 그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연천은 알 것 같았다.

“…….”

연천의 말에 모충일과 신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스승님의 팔이 그곳에 있는 것은 싫습니다. 찾아와야겠습니다.”

연천이 묵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만 생각하면 자신의 팔이 잘린 듯 아파 오는 연천이었다.

“화산의 경계가 풀리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시일을 좀 더 두고 생각할 문제입니다.”

신의가 말했다.

“…….”

연천은 잠시도 스승님의 팔을 화산에 두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무고한 이들을 살인멸구한 수일검과 그가 속한 화산에 대해 악의를 품는 자들이 많았다.

화산은 경계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당장 화산으로 쳐들어가서 스승님의 팔을 가지고 올 방법이 없었다.

연천의 가슴 한편이 아프게 일렁거렸다.

신의도, 모충일도 어두운 얼굴로 서로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무거운 적막감이 방안을 눌렀다.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것은 세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걸윤이었다.

“이런 것은 어떻겠습니까?”

연천과 모충일, 신의의 시선이 한꺼번에 걸윤에게 쏠렸다.

걸윤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시작했다.

“음! 혈영천마의 팔이 화산에 있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데 수일검은 비열하고 그가 있는 화산 또한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혈영천마라고는 하나 그 팔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도덕합니다. 하니 그것을 무림맹에서 처리하는 게 옳을 것이라는 말을 퍼트리는 겁니다.”

걸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모충일과 신의의 눈치를 살피며 이어 말했다.

“가만히 있는 무림맹이 무능하다는 비난이 높아지면, 맹에서는 팔을 보내라 할 것입니다. 그때 빼앗아 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걸윤의 말에 연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그것이 가능하겠소?”

모충일이 걸윤에게 물었다.

“개방에서 그 정도 말을 퍼트리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무림맹에서 끝까지 모른 척할 수도 있지만, 해보는 수밖에요.”

걸윤이 대답했다.

“설사 무림맹에서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잃을 것은 없습니다. 해볼 만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모충일이 연천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부탁을 좀 하자.”

연천이 걸윤에게 반말을 했다.

당사자인 연천과 걸윤은 덤덤했으나, 모충일과 신의가 놀란 얼굴로 연천과 걸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걸윤이 씨익 웃었다.

“맹에서 어찌 나올지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자극을 해볼게.”

연이어 걸윤도 연천에게 반말을 사용하자, 더욱 어리둥절한 모충일과 신의였다.

* * *

“야!”

걸윤은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보았다.

걸화가 걸윤의 전각 기둥 옆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왜?”

걸윤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로 대꾸했다.

“너 어제도 백연천이랑 늦게까지 술 마시고 그 방에서 잤지?”

걸화가 눈을 요상하게 뜨고 걸윤을 훑어보았다.

“그게 왜?”

걸윤은 저렇게 시비를 걸어대는 걸화에게 짜증이 났다.

저럴 때면,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씨이! 넌 나한테 미안하다면서 허구한 날 백연천이랑 술 마시고 같이 자야겠냐?”

걸화는 걸화대로 성질이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걸윤이.

“나 피곤해, 저리 비켜…….”

걸윤이 파리라도 쫓는 것처럼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대체 밤새도록 둘이 뭐 해?”

“뭘 하긴, 이야기하지.”

“무슨 이야기? 이야기만 하는 거 맞아?”

“이야기하고 술도 마신다. 왜?”

“밤새도록?”

“어휴… 좀 비켜! 너는 왜 여기까지 와서 나를 괴롭히냐? 대체 너랑 나랑은 전생에 뭔 원수가 졌기에… 아휴우!!”

걸화의 말에 대충 대꾸해주던 걸윤이 결국 짜증을 냈다.

“암만 생각해도 철천지원수였을 게야!”

“내 생각도 그렇다! 제발 우리 아는 척 좀 하지 말자!”

걸윤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전각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씨!”

걸화는 바닥을 부술 듯 쾅쾅 걸으며 의약당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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