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보은장에 온 손님들은 그 후로 이틀을 더 묵었다.
다들 보은장에 객으로 있었지만, 그들도 바빴다.
우선, 수일검의 일을 자신들의 문파에 전해야 했다.
데리고 다니는 제자나 호위를 보내는 이도 있었고, 전서구를 날리는 이들도 있었다.
새로운 영웅이 될 기회였다.
오랫동안, 전 중원을 기만한 사기꾼에, 마교와 손을 잡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인멸구한 놈을 잡아서 말이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다른 곳보다 앞서려면 서둘러야 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돌아가지도 못했다.
보은장에 있는 문파들이 뭔가를 도모하는데 자신들만 빠지거나, 그 소식을 늦게 아는 건 싫었으니.
서로 눈치를 보던 문파의 대표들은 다 같이 보은장을 떠나기로 했다.
“가주! 가주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시어 그 간악한 수일검의 악행을 밝히게 되었소.”
모용환이 그리 말하고 연천에게 포권지례를 했다.
“혹여 이번 일로 화산에서 보은상회에 앙심을 품기라도 한다면 우리 문파는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가주께서는 걱정 놓으시오.”
공엽방의 말이었다.
그 외에 다른 문파에서도 연천을 걱정하기도 하고, 이번에 사건의 전모가 알려진 것이 연천 덕분이라며 그의 공을 치하했다.
연천은 그들에게 예를 다했다.
“며칠 더 묵고 싶소만 서둘러 우리 가문에 당도하여 이번 일에 대해 의논을 해야 하오. 조만간 다시 올 터이니 가주는 몸 건강히 있으시오”
제갈혁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떼며 연천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가 떠난 보은장은 썰물을 맞은 파도처럼 황량했다.
* * *
“형님! 형님 혼자 개방으로 가시오. 나는 보은장에 좀 더 있겠소.”
걸윤이 걸부에게 말했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걸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얼빵한 작자가 또 뭔 일을 벌이려고 해서, 내가 영 불안해서 못 가겠소.”
“가주를 말하느냐?”
걸부가 웃으며 물었다.
“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자가 어찌 자꾸 일을 치려는지…….”
걸윤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가주가 걱정되느냐?”
“에이… 누가 가주가 걱정되어서 그러오? 가주가 잘못되면 걸화가 또 죽네 사네 할 것이고 그럼 내가 걸화 찾으러 다녀야 하니 귀찮아서 그러지요.”
걸윤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네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리해라. 하지만 내게는 가주보다 너와 걸화가 중요하다. 난 영친왕의 성에서 한 너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다.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된다 해도 네가 옳은 판단을 하기를 바란다. 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얼빵한 작자와 다르지 않느냐.”
“낄낄낄낄… 그거 가주 얘기하는 것 맞죠?”
걸윤이 낄낄거리고 웃자, 걸부도 따라 웃었다.
“몸조심하고 걸화를 잘 보살피거라. 너를 믿으마.”
“걱정 마시오.”
걸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 * *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연천은 같은 시간에 일어나 연무장으로 나갔다.
익숙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베고,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같은 시각, 연무장으로 나온 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천에게 다가갔다.
“언제까지 그 똑같은 기본 초식을 반복할 셈이오?”
걸윤의 목소리에 연천은 하던 것을 멈추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
걸윤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시간에 자신의 연무장에 나타난 것은 의외였다.
“가주…….”
걸윤이 연천을 불렀다.
“말씀하시오.”
연천이 대꾸했다.
걸윤은 연천을 불러놓고 쉬이 말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었다.
혹시, 자신의 말에 연천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걸윤도 오래 생각해서 이야기를 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꺼내기 힘든 말을 쉽게 해 보려고 연천이 수련하는 시각까지 맞추어서 연무장으로 나왔다.
꼭 이야기해야 했다. 도저히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무공은 언제부터 배웠소?”
한참 만에 입을 연 걸윤의 물음이었다.
“…일곱 살쯤부터 배웠소. 그건 왜 묻소?”
연천은 전혀 생각지 못한 장소에 나타나,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하는 걸윤을 쳐다보았다.
“아니! 일곱 살부터 배웠으면… 지금 나이가 몇이오?”
“스물둘이오.”
“나랑 똑같네… 그럼 자그마치 15년을 수련했는데 아직도 처음 배운 그 기본 초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단 말이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걸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학은 기본이 중요한 것 아니겠소?”
연천은 걸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기본이 중요해도 그건 너무 한 것 아니오? 가주가 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제일 처음 무공을 배울 때의 초식이오. 그것만 15년 동안 해왔다는 것은 해도 너무했소.”
걸윤은 정말 연천이 답답했다.
15년 동안 삼재검법만 휘두르면서, 마교의 천마가 되겠다니…….
마교는 힘이 곧 서열이었다.
이건 스승의 억울함을 푸는 것과는 달랐다. 옆에서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연천이 최소한의 무공은 갖추어야 했다.
이제 저 징글징글한 기본 초식을 내려놓고, 뭔가 더 힘이 될 만한 것을 배워야 했다.
“그러는 대협은 언제부터 무공을 배웠소?”
연천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나는 개방도요. 나야 걸음마 떼면서부터 무공을 배웠지. 지금 가주가 하는 그 기본 초식은 내가 예닐곱 살에 벌써 뗀 것이오. 가주와 내가 나이는 같지만, 무공에 대해서는 내게 좀 배워보는 게 어떻겠소?”
걸윤은 나름대로 연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스승님께 무공을 배웠소.”
연천이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것도 그렇소. 고금제일검이라 불리는 혈영천마의 제자이면서 정녕 배운 무공이 그것밖에 없으시오? 뭐… 사람들 눈이 무서워 수련을 못 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오?”
이것은 걸윤이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 혈영천마의 제자가 돼서 무공이 고작…….’
“여가 내 집 안인데, 무서울 눈이 어디 있겠소?”
연천은 여유롭게 걸윤을 쳐다보았다.
“허허… 가주! 천마가 되고 싶다 하지 않았소? 가주가 잘 모르나 본데, 마교는 기본적으로 힘으로 그 서열이 정해지는 곳이오. 아무리 가주의 스승이 뛰어났다 해도 가주가 그만한 능력이 없다면 어렵다는 것이오.”
걸윤은 자신을 보고 빙그레 웃는 연천을 향해 말을 이었다.
“자존심 같은 것 버리고 스승이 될 만한 무인을 찾아보시든가 그것이 부끄러우면 내게라도 배우시오. 내 아무에게도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가르쳐 주리다.”
걸윤이 새벽에 연무장에 나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제발 이제 그 삼재검법 따위는 그만두고, 누구에게든 새로운 무공을 배우라고 말이다.
혹시, 체면 때문에 누군가를 부르기 어렵다면 자신이 가르쳐 줄 마음도 있었다.
“하하하하, 대협의 실력이 궁금하구먼…….”
걸윤 딴엔 심각하게 얘기를 하는데, 연천은 크게 웃었다.
“아버지나 형님도 계시고… 내가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 할 수는 없지만, 가주 한 사람 가르쳐 줄 정도는 되오.”
삼재검법 다음에 배울 무공 정도는, 걸윤이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었다.
“내 대협의 마음은 감사히 받겠소. 하나 나를 가르치려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야 하지 않겠소?”
연천이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허허… 그 말은 지금 가주께서 내 무공보다 위라는 말씀이오? 하하하하.”
걸윤은 기가 차서 웃었다.
연천은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백면서생 그 자체였다.
변한 것이라고는 실실거리며 웃지 않는 것과 화려해진 의복뿐 이었다.
“…….”
걸윤의 말에 연천이 대답 없이 씨익 웃었다.
“좋소. 우리 내기합니다. 나는 방어만 하겠소. 가주께서 3초식 안에 내게 작은 상처라도 입힌다면 내가 가주를 형님이라 부르겠소. 단, 그것이 아니라면 내게 무공을 배우시오.”
걸윤은 어찌해서든 연천이 자존심을 버리고 무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걸윤의 말에 연천의 미소가 깊어졌다.
“나와 나이가 같다고 하더니, 형님이라 부를 수 있겠소?”
“하하하하, 정말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대협께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고… 바닥에 쓰러트리는 것은 어떻겠소?”
잠시 생각하던 연천이 말했다.
“가주! 나는 걸음을 뗄 때부터 무공을 배웠소. 내가 쓰러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오?”
“그건 해봐야 아는 것이고, 정녕 형님이라 부를 수 있겠소?”
“좋소! 대신 3초식 안에 나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내게 무공을 배워야 하오.”
“좋소.”
연천이 씨익 웃고는 검을 빼 들었다.
연천은 중단을 잡고 걸윤을 응시했다.
그의 입매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
연천은 검을 잡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거! 검은 기본적으로 거리 유지가 필요하오. 자꾸 그리 뒤로 가면 어찌 공격하려고 그러시오!”
걸윤이 계속 뒷걸음질만 치는 연천에게 소리쳤다.
연천은 미소를 머금은 채, 멈추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걸윤과의 거리가 2장쯤 멀어졌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가주! 가까이 오시오!”
걸윤이 연천에게 소리쳤다.
“…….”
연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연천이 검을 머리 위로 드는 것을 보고, 걸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연천과 걸윤 사이에는 2장의 거리가 존재했다.
연천이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쓱 베었다.
매일 아침 하던 것처럼 흔들림 없이 간결하고 깔끔하게.
멀리서 답답하게 연천을 보던 걸윤은 마른하늘에 번개가 쳐 자신의 백회 한가운데서부터 몸 중앙을 훑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뇌전의 기운에 몸을 바들바들 떨다, 쭈욱 미끄러지듯 바닥과 조우했다.
빛이 번쩍이며 떨리는 눈동자 너머, 연천이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야가 허옇게 변하더니 이내 모든 것이 까맣게 사라졌다.
걸윤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연천이 쓰러진 걸윤에게 다가갔다.
걸윤은 아직도 뇌전의 기운이 남아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
연천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수련하는 겉모습만 보고 늘 기본자세로 검을 휘두른다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연천은 그런 걸윤이 고마웠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걸화와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윤이 몸을 떨어대는 것이 점차 잦아들었다.
연천은 걸윤을 양팔로 안아 들고, 의약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