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걸윤이 술을 마시는 연천의 얼굴을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주! 혹시, 가주는… 걸화가 여인으로 좋은 것이오?”
걸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천과 걸화는 서로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사내와 여인으로서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마음은 발전하기 마련이었다.
걸화가 완전한 여인의 모습을 한 지금은 그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오라비로서 알아야지 둘을 붙여주든, 떼어놓든 할 것 아니겠는가.
“…….”
연천이 걸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걸화가… 아니, 배걸아가 좋았다.
더럽고 제멋대로인 배걸아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고, 재밌고, 좋았다.
여인인 걸화는……? 여전히 아꼈다.
‘이게 여인으로 좋아하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여인이든 아니든, 그 아이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소. 그냥 같이 있으면 재미있고, 그 아이가 잘살았으면 좋겠소.”
연천은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흐음…….”
침음을 흘린 걸윤이 잔을 비웠다.
연천이 스승님의 억울함을 풀고 보은상회 가주로 살아간다면, 자신이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줄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천마가 되려고 한다면 안 될 일이었다.
그건 걸화의 오라비로서 용인할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아침 해가 뜬지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다.
“일어나세요. 가주! 일어나세요!”
걸화가 사발이 든 쟁반을 들고 소리쳤다.
연천과 걸윤은 한 침상에 뒤엉켜 곯아떨어져 있었다.
큰 연천의 방은 술 냄새가 진동했다.
걸화가 침상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제 하다 하다 걸윤이까지?’
걸화는 한 침상에서 잠든 연천과 걸윤을 보고 불쾌함이 솟구쳤다.
‘에잇!’
걸화가 한쪽 발을 들어 걸윤의 등짝을 향해 날렸다.
“으으음…….”
걸윤은 신음만 내뱉을 뿐 깨어나지 못했다.
‘씨이…….’
걸화는 연천의 전각 내에 창이라는 창은 다 열어젖혔다.
“일어나라고오오!!”
걸화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연천과 걸윤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겨우 눈을 뜬 걸윤은 눈앞의 걸화를 보고 상황이 파악되었다.
“어휴… 머리야! 너는 오라비를 이런 식으로 깨워야 되겠냐? 거기다 가주께는 이 무슨 무례냐?”
걸윤이 걸화에게 야단을 쳤다.
“가주께? 와… 언제부터 가주인데? 맨날 그 작자, 그놈이라고 부르더니?”
걸화가 걸윤에게 대들었다.
“음!! 무슨 일이냐?”
연천이 둘의 대화를 자르며 물었다.
“스승님께서 가주께 드리라는 약이에요. 어제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스승님께서 맥은 잘 짚으시는지 모르겠으나 상황은 잘못 짚으시나 봅니다. 놀란 약이 아니라 술 깨는 약을 지어 와야 했을 텐데.”
걸화가 비아냥댔다.
“흐음…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연천의 말에도 걸화가 나가지 않고 연천과 걸윤을 번갈아 가며 쏘아보았다.
“안 가고 뭐 하는 게냐?”
자리에 앉은 연천이 묵직하게 소리쳤다.
“지금 보은장 안이 난리도 아닙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늦은 밤에 도망갔고, 뒤따라 무당과 소림도 새벽녘에 보은장을 나갔다고 합니다.”
깜짝 놀랄 줄 알았던 연천은 의외로 덤덤했다.
“도망갔겠지……. 그리 살아보라지. 온 세상의 질타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연천이 허공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걸윤이 고개를 끄덕였고, 걸화는 두 사람을 흘겨보고는 땅을 깨부술 듯 쿵쿵거리며 연천의 방을 나갔다.
“거… 내가 미안하오. 그리고 참 부끄럽소. 누이가 저 모양이라.”
걸윤이 연천에게 말했다.
“내가 저 아이의 성질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게 어디 대협 마음대로 되겠소?”
연천이 답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걸화의 성질과 행동을 이해한다는 연천의 대답에 걸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웃…하하하허.”
답을 해놓고 보니 우스웠던지 연천도 걸윤을 따라 웃었다.
“허허허허.”
형란이 들어와 두벌의 옷을 내려놓았다.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든 걸윤과 연천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물을 받아 왔습니다. 씻으시지요.”
형란을 따라온, 시녀들이 따뜻한 물이 담긴 두 개의 대야를 내려놓고 나갔다.
걸윤은 얼굴을 대충 닦고 잔뜩 구겨진 옷을 훌훌 벗었다. 연천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연천을 보고 걸윤이 놀렸다.
“사내끼리 내외라도 하는 것이오? 뭐가 부끄러워 얼굴까지 돌리시오? 가주도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지요.”
“음음!”
연천도 마지못해 몸을 돌리고 옷을 벗었다.
금세 옷을 갈아입은 걸윤이, 옷을 벗고 있는 연천 앞으로 휙 다가갔다.
“이야… 비실비실한 줄만 알았더니 가주 몸 좋소이다. 체력에도 신경을 쓴 모양이오?”
걸윤의 얼굴에 장난기가 걸려있었다.
“거… 참… 거…….”
연천이 못마땅해하면서 새 옷을 집어 들었다.
“응? 이거 무어요?”
걸윤이 연천의 가슴 한가운데에 있는 문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문신도 아니고, 화상 자국도 아니었다.
회색빛의 기이한 무늬가 가슴 한중간에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게 나 있었다.
“거! 참!”
연천이 서둘러 옷을 걸쳤다.
걸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연천의 앞섶을 확 열어젖혔다.
“아니! 왜 이러시는 게요!”
연천이 소리쳤다.
“잠깐만 있어 보시오. 잠깐만.”
걸윤이 연천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걸화가 찢어진 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쏘아보았다.
연천이 걸윤의 손아귀에 있던 자신의 옷자락을 빼내어 옷을 여미며, 걸화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연천의 물음에 걸화는 답이 없었다.
눈꼬리를 한껏 올리며 걸어 들어와, 탁자에 두 개의 약사발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걸화의 콧구멍이 커지며 숨이 들락날락하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걸윤의 속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지금까지 걸화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뭔가 사달을 내었다는 걸, 걸윤은 알고 있었기에.
“스승님께서 숙취에 도움이 될 거라 주신 탕약입니다.”
걸화가 냉랭하게 말하고, 걸윤을 뚫어버릴 듯 노려보았다.
걸윤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걸화는 걸윤을 한껏 흘겨보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우와… 어찌하였기에 저 아이가 저리 순순히 따르는 것이오?”
걸윤이 정말 놀랍다는 얼굴로 물었다.
연천은 어이가 없었다.
보은상회 가주의 방에 들어와 저렇게 불손한 얼굴을 하는 이는 없었다.
한데, 그것을 순순히 따른다고 표현하는 걸윤도 웃겼고,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우스웠다.
“이거나 드시오.”
연천이 의자에 앉아 약사발을 가리키며 말하자, 걸윤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사발을 비웠다.
“아! 가슴의 그것은 무엇이오?”
걸윤이 물었다.
“모르겠소. 어릴 때부터 있었소.”
연천이 덤덤히 말하고 탕약을 들이켰다.
걸윤이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그것을 어디서 봤는데…….”
혼자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어딘지 기억의 꼬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답답한 걸윤이었다.
* * *
“가주! 어찌하시겠습니까?”
남궁세가의 대표로 온 남궁현섭이 물었다.
문파의 대표들이 연천의 전각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수일검, 그자야말로 무림의 살인귀이고 사기꾼이요. 절대 가만히 두어서는 아니 되오. 그자를 잡아다가 벌을 해야지요. 이 무림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종남의 대표로 온 공엽방이 소리 높여 말했다.
종남과 화산은 표면적으로는 정파 소속으로 서로 예의를 지켰으나, 속을 뒤집어 보면 원수도 그런 원수지간이 없었다.
종남은 화산과 같이 섬서에 있는 문파였다.
같은 섬서에 굵직한 두 개의 문파가 같이 있다 보니, 이런저런 다툼이 끊임없이 생겼다.
화산과 종남에 작은 분쟁이라도 있으면, 다른 문파에서는 서둘러 화산에 손을 들어주기 바빴다.
왜? 영웅이 있는 문파니깐.
그간 무림의 영웅이 있는 문파라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는 화산의 꼴이 얼마나 보기 싫었던지.
그동안, 당한 것을 생각하면 당장 화산으로 쳐들어가 수일검을 잡아 오고 싶었다.
종남의 입장에서 화산의 입지를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내가 한낱 장사치에 불과하여 당장 화산으로 달려가 그 파렴치한을 내놓으라고는 못 하겠으나, 모든 문파에서 수일검을 잡을 계획을 마련한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돕겠소.”
수일검을 잡아서 벌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듯, 도화상회의 가주 엄적여가 말했다.
“이미 화산으로 향하였다면, 수일검을 잡기 쉽지 않을 것이오.”
곤륜의 대표 구강경도 앞선 이들의 말에 동의하는 듯 말했다.
“그 말은 맞소이다. 수일검이 화산에 당도한 뒤에는 힘들 것이요. 전쟁을 치를 각오가 아니고서야 쉽지 않을 것이오.”
제갈세가의 대표인 제갈혁이었다.
“화산이 나간 후, 새벽녘에 소림과 무당도 슬그머니 짐을 싼 모양입니다.”
당가의 대표로 온 당은청이 말했다.
연천은 이번 일에 당연히 당가도 초대를 했다.
하지만, 한 가지를 부탁했다.
당상만도 가주도 아닌 다른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고.
특히, 숙부이신 당상만은 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제는 숙부와 마주친다 해도 보은상회 가주의 모습으로 대해야 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뭔가 어색해 보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연천이 불편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수일검을 향해, 숙부의 감정이 터져 나오기라도 한다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지금 성급하게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화산 하나만도 힘든데 소림과 무당까지 있습니다. 화산에서 어찌 나오는지를 보고, 후일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모용세가의 대표 모용환이 말했다.
“그 말이 옳은 듯하오. 화산이 제대로 된 문파라면, 화산에서 마땅히 수일검을 벌하겠지요.”
남궁현섭이 말했다.
“그럼 일단은 화산에서 어찌 나오는지 기다려보는 것으로 합시다.”
백리세가의 대표인 백리진헌의 말에 다른 문파의 대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천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