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진실… 그 후】
“한데…….”
수일검이 여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추었다.
“…….”
걸윤은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수일검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침없이 묻는 말에 답하고 그 이상의 것을 떠들어 대던 수일검이 처음으로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약효가 두 시진 가까이 유지된다고 했는데… 벌써 다 된 건 아닐 텐데…….’
“…그게 악마들이 아니었어, 상관량이 우리를 속인 것이었지. 처음에는 그저 하나라도 더 없애자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무공을 쓸 줄 아는 이도 없고, 악마는 더욱 아니었지. 그저… 양민들이었어…….”
오랜 세월 수일검의 마음속 깊이 꼭꼭 묻어두었던 이야기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약효로 인해 말이 터져 나오며, 한편으로는 속이 편안해졌다.
그간 속에서 섞고 곪아가던 그것을 영웅이라는 자긍심으로 덮고 감추며 살았던 것이다.
“…….”
걸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수일검을 바라보았다.
“하하하하하하!”
답답한 무언가를 뱉어내 버리고 아주 오랜만에 속이 가벼워진 수일검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 그 마을이 호, 혹시…….”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 걸윤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하하하하…….”
수일검은 정말 기분 좋은 것 같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혹시… 혈영천마가… 없애버렸다는 그… 수월촌?”
걸윤은 겨우 말을 내뱉었다.
“맞네, 상관량과 그에게 속은 우리가 없앤 것이지.”
“흐억…!”
걸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 저런…….”
“허어…….”
연회장 곳곳에서 개탄의 소리가 흘렀다.
“…살아남은 마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던데… 어찌 그리…….”
걸윤이 더듬더듬 질문을 이어나갔다.
“중간쯤에는 양민마을인 것을 알았지만, 어쩌겠나? 거기서 그만두면 우리는 영웅삼존이 아니라 악한삼인이 될 판인데, 증인을 살려둘 수야 없지.”
“어찌…….”
걸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조리 없애버렸지. 일을 끝내고 보니 금월대사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없고, 태청검은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보며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더구만. 쯧쯧… 영웅이 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고!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법칙이야.”
“그럼… 그 마을 사람은…….”
걸윤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웅얼거렸다.
“당시 세 문파의 제자들도 좀 있었다니깐, 그놈들도 앞으로 나섰다면 영웅 소리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쯧쯧… 마음이 그리 약해서 어찌 큰일을 하겠다고… 태청검은 그날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저세상으로 간 모양이더군.”
“…….”
그랬다. 태청검은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영면에 들었다.
“금월대사가 폐관 수련에 들어? 하하하하, 웃기지도 않는 놈들!! 금월대사는 그날 도망갔어. 소림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고!”
“그… 무슨…….”
“이보게, 개방의 젊은 대협! 세상은 그런 것이라네. 내 문파와 내 제자와 나의 앞날을 위해서 때로는 힘든 일도 참고 넘어가야 하는 법이라네. 나라고 그 마을에 애고 노인이고 다 죽이고 싶어 그랬겠나? 다… 모두를 위한 것이었어. 덕분에 화산이 그리 떵떵거리고 산 거 아니겠나, 하하하하!”
“…….”
걸윤은 수일검의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연회장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처럼 작은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 와중에 운호의 제자 청명이 조용히 일어나 그의 스승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그만 쉬시지요.”
“이놈! 스승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딜 나서는 게야!!”
운호가 청명을 나무랐다.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명은 웃고 있는 운호를 일으켰다.
“아니! 이놈이!! 이놈아! 나 아직 할 얘기가 많다니깐! 저기 영웅담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두고 어딜 간다는 말이냐!!”
운호는 연회장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청명은 버티는 운호를 끌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방 안에 들어찬 무서운 적막감은 쉬이 걷히지 않았다.
“허! 어찌… 이런 일이…….”
걸윤의 작은 목소리가 견고하게 내려앉은 정적을 흔들었다.
영웅 수일검을 믿은 걸윤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번개를 맞은 듯 갑자기 밀어닥친 큰일에 눈만 껌뻑이던 이들이 하나둘 웅성대기 시작했다.
연천은 사람들이 어제까지 무림의 영웅이었던 수일검 운호와 화산을 욕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오늘 이야기는 오래지 않아 중원 멀리, 구석구석까지 퍼질 것이다.
연천은 주위를 한번 훑고는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걸윤은 연회장을 나서는 연천을 보고,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걸윤이 연천의 전각에 도착하자, 곽림이 전각 안에 걸윤이 왔음을 알리려고 했다.
걸윤이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고 자신이 연천의 방에 대고 말했다.
“배걸윤이오. 들어가도 되겠소?”
“들어오시오.”
착 깔린 목소리였다.
걸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연천은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걸윤이 연천의 앞자리에 앉자, 연천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오늘… 고맙소…….”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연천의 목소리였다.
“그리도 바라던 일이 아니었소? 어찌 이리 힘이 없으시오?”
걸윤은 연천의 쓸쓸한 얼굴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모르겠소.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소.”
“…….”
“…….”
“내가 일이 끝나면 위로주 한잔 드리겠다고 했는데, 지금 해도 되겠소?”
걸윤의 말에 연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천의 눈에 위로주가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걸윤 같아 보였다.
믿었던 수일검의 실체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술상 좀 봐오너라.”
연천이 밖을 향해 말했다.
잠시 후, 화려한 음식들이 담긴 술상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이야… 매일 이리 드시고 사시오? 거, 팔자 한번 부럽소.”
걸윤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도 기력이 없었다.
연천이 씁쓸하게 웃었다.
“스승님과 산에 살 때는, 어쩌다가 한 번씩 저자에 내려와 사 먹는 국수가 그리도 맛있을 수가 없었소. 그전에는 남이 버린 것이라도 그저 배만 부르면 감사했고… 지금 여기 있는 백연천은 누구인지 모르겠소.”
“으흠… 한잔 받으시오.”
걸윤이 술병을 들어 연천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잔을 비우고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내가 가주를 믿지 않았소. 미안하오. 오늘 수일검이 그런 말을 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하였소.”
걸윤은 힘없는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
연천은 걸윤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도 단호한 얼굴로 수일검을 믿는다던 걸윤의 사과를 받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오? 수일검을 벌할 것이오?”
“글쎄… 수일검을 어찌할지 생각해보지 않았구려. 스승님의 억울함을 풀고, 복수하겠다 다짐했었는데 그런 것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니…….”
연천의 낮은 목소리는 쓸쓸했다.
“이젠, 누가 악인이고 영웅인지도 모르겠소. 철석같이 영웅이라 믿었는데 그리 치졸한 살인자였다니…….”
걸윤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
걸윤 말에 연천이 그를 위로한다는 뜻으로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혈영천마께서는 어떤 분이셨소?”
걸윤은 악인, 살인귀라고 부르던 혈영천마에 대해 물었다.
“으흠… 부모가 없어 모르겠으나, 혈육이 있다 해도 그분보다 내게 잘하지 못하였을 것이오. 어린 시절 쉬이 잠들지 못했소. 저녁이면 늘 나를 재우느라 하나밖에 없는 팔로 오랫동안 내 등을 쓰다듬어주셨지요.”
연천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좋은 분이었나 보오. 덕분에 가주가 잘 자라 스승님의 억울함도 풀어드린 것 아니오. 스승님도 기뻐하실 게요.”
“아니오. 나는 그리 살뜰한 보살핌 속에서도 잘 자라지 못했나 보오.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승님의 억울함이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소. 이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벗어버리고 그저 별 볼 일 없는 백연천으로 세상을 떠돌고 싶소. 걸화와 함께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다니던 그때가 그립소. 내가… 이리도 배은망덕한 놈이오.”
연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제 끝난 것 아니오? 혈영천마의 억울함을 풀었으니… 혹여 수일검을 벌하겠다면 개방도 돕겠소. 그럼 그때 세상을 돌아보시오.”
걸윤이 시원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 같았다.
“수일검… 그보다 상관량이라는 자를 용서할 수가 없소. 내… 천마가 되어야겠소.”
연천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연천은 모충일이 그리 말해도 천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스승님의 원수만 갚으면, 아니 스승님의 오명만 벗기고 나면 조용히 보은장을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한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자 원흉, 스승님을 배신한 상관량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실력에 비해 욕심이 넘쳐났던 수일검은 상관량의 꾐에 넘어가 스승님을 없애는데 한발을 얹고, 영웅의 이름을 얻은 자였다.
찌질하고, 한심하며 딱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중원에서 제대로 숨 쉬고 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상관량은 달랐다.
교주 자리가 탐이나 오랫동안 스승님을 없앨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배신자였다.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에? 천마는 마교도 중에서도 무공이 뛰어난 자가 되는 것 아니오? 가주의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아니겠소?”
걸윤의 놀람이 섞인 말에 연천이 피식 웃었다.
“천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스승님을 해하고 천마 자리에 오른 그자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소.”
말을 마친 연천이 술을 들이켰다.
“…….”
걸윤도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이전부터 그랬지만, 일 만드는 데는 백연천 만한 자가 없었다.
‘이제 하다 하다 천마가 되겠다니…….’
연천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걱정부터 앞서는 걸윤이었다.
“…….”
연천은 씁쓸한 얼굴로 잔을 비웠다.
‘오늘 같은 날 어찌 술이 달지 않고 이리도 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