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아악! 아악! 살려주세요!! 으아아!!”
산 위쪽에서 여인의 날카롭게 갈라지는 비명이 퍼졌다.
주진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황궁이 제대로 서지 못하니, 세상이 어수선했다.
빚쟁이에 쫓기고 관리들의 닦달에 못 이겨, 먹고 살 방법을 찾아 산으로 드는 이들이 많았다.
산속인들 먹고 살기가 호락호락하겠는가.
사람 잡아먹는 맹수가 우글거리고, 오갈 곳 없는 자들이 모여 산적 떼가 되었다.
산에서 퍼지는 살려달라는 비명이 생소하지도 않았다.
주진관은 소리 나는 방향을 향해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진원지에 다가선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키 큰 나무가 우후죽순으로 나 있는 산 한 가운데, 새파란 잎사귀가 곱게 자라난 작은 들판이 있었다.
주진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매년 오르던 산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그 한 가운데 눈이 부시게 새하얀 피부를 가진, 가녀린 여인이 반 나신의 몸으로 쓰러져있었다.
음심이 절로 생기도록 아름답고도 색기가 흐르는 여인이었다.
“괜찮으시오?”
주진관이 다가가 그녀를 일으켰다.
서늘하고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이 손에 닿았다.
“흑…흑흑……. ”
여인이 이슬처럼 깨끗한 눈물을 똑똑 떨구었다.
자그마한 얼굴의 큰 눈동자에서 보석같이 반짝이는 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지독하게 향이 강한 꽃가루를 흡입한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아랫배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여린 여인을 확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혈영천마 주진관의 얼굴이 굳었다.
“이리 깊은 숲속에 어찌 여인 혼자 있으시오?”
주진관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는 아랫마을에 어미와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짐승 옷을 걸친 자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제 또래의 여인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날은 워낙 경황이 없어 기억이 나지도 않는데 깨어보니 깊은 산중의 오두막이었습니다.”
여인은 말을 멈추고 이슬 같은 눈물방울을 흘렸다.
“…….”
주진관은 여인의 말이 끝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저를 범하고 술에 취해 있는 틈을 타 도망을 치긴 했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막막하여… 흑…흑…….”
여인이 옷자락 끝으로 곱게 눈물을 찍어냈다.
“어멋…….”
서 있던 여인이 비틀거리며 주진관의 품을 향해 쓰러졌다.
그 순간, 주진관은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며, 여인의 뒷목을 잡은 채 끌어올렸다.
“누구냐? 누가 시킨 것이더냐?”
낮게 깔린 주진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거 놓으십시오.”
여인이 당황해 버둥거렸다.
“…….”
주진관의 표정은 권태로웠다.
무림행 중에 공격을 받는 일은 종종 있었다.
어쩌겠는가?
마교 교주를 죽이겠다는 자들이 있는 것을.
무작정 덤비는 놈부터 음식에 약을 타 놓고 기다리는 것들, 함정을 파놓는 놈들까지…….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이번엔 너무 뻔했다.
도망친 여인이 맨발에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았는데, 상처는 고사하고 흙이나 먼지 한 올 묻어있지 않았다.
거기다 잡스러운 음약에 산공분까지…….
“…어찌 이러십니까?”
여인이 고운 목소리로 흐느끼며 말했다.
잠시 주진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여인의 눈빛이 표독하게 변했다.
“후우….”
주진관이 입으로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손에 힘을 주자, 그녀는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뭇 남성들을 유혹하여 채음보양술로 젊음을 유지하던 환락궁 궁주로서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더군다나 진법으로 더 강하게 환술이 펼쳐진 상태에서 말이다.
여인의 팔다리가 축 늘어져 버리자, 주진관은 고개를 돌려 풀숲 뒤를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다들 이제 나오시게.”
주진관의 조용한 목소리에 우거진 수풀이 들썩이더니, 검은 복면을 한 무리가 나타났다.
그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어찌 아셨소이까?”
“어찌 모르겠는가? 나에 대한 대접이 너무하지 않은가?”
사내를 응시하며 말하던 주진관은 정말로 너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매복을 들켰음에도 복면 속 사내의 얼굴은 여유만만했다.
“고금제일의 무공을 가졌다는 혈영천마를 그리 소홀히 대접하겠소? 걱정 마시오. 자그마치 10년을 공을 들였으니 섭섭지는 않을 것이오.”
사내는 주진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신호인 듯 옆과 반대편, 뒤쪽 숲에서도 복면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주진관을 빙 둘러 에워쌌다.
주위를 둘러본 주진관이 씨익 웃었다.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서 오시게, 갈 길이 바쁘니.”
“…이익, 쳐라!”
사내가 소리쳤다.
복면을 한 사내들이 주진관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한 식경 뒤, 홀로 서 있는 주진관 주위로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시체가 밭을 이루고 있었다.
“후하아… 이거 이거…….”
한차례 깊은숨을 들이킨 주진관은 생각보다 강한 산공분의 위력에 놀라고 있었다.
산공분을 막는 데 소모된 공력이 컸다.
보통 산공분 따위가 자신의 내공에 영향을 줄 리가 없었다.
복면한 사내의 입에서 나온, 10년을 공을 들였다는 말이 불편하게 와닿았다.
산등성이 너머에서 다시금 한 무리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산등을 바라보던 주진관이 중얼거렸다.
“…후, 이거 또 아우를 기다리게 만들겠구먼…….”
그 뒤로도 두 차례 습격이 더 있었지만, 혈영천마는 그 자리에 당당히 서 있었다.
일찌감치 물러나, 여유 있던 복면 사내의 표정이 바뀌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을 보며, 아주 질린다는 얼굴이 되었다.
‘어찌해도 혈영천마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것인가…….’
분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사내는 자그마치 10년 동안 계획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주진관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복면을 벗어 던진 사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흔들림 없이 서 있었지만, 주진관의 내공 소모는 심각했다.
사내의 말대로 10년을 준비한 대단한 산공분이었던 것인지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만독불침인 주진관의 신체가 해독조차 되질 않았다.
멀지 않은 아래쪽 수풀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성인 키만큼 높은 풀 한 뭉텅이가 마구 흔들렸다.
주진관은 높은 풀숲을 헤치며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영이 꿈틀거리는 애벌레 같다고 생각했다.
꿈틀거리는 인영은 곧장 주진관을 향해 다가오더니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영월단주 상관량이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상관량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안도감과 함께 의구심이 들었다.
‘량이는 먼저 교로 보냈는데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일까? 혼자 다니는 내가 걱정되어 명령을 어기고 호위하기 위해 온 것일까? 아니면…?’
그때, 산공분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주진관의 몸이 아주 약간 비틀거렸다.
“주군!”
상관량이 걱정스럽게 주진관을 부르며, 자연스레 다가가 그의 몸을 부축했다.
내공이 모이지 않아, 내심 염려했던 주진관은 마음이 놓였다.
점점 내공이 부족해져 천마신공과 뇌전신공을 사용하지 않고, 거칠게 베어버린 시체와 살점들로 사방이 온통 붉었다.
“쯧쯧…….”
주진관이 씁쓸한 얼굴로 혀를 찼다.
‘조용히 살겠다는데 어찌 이리도 가만두지 않는 것인지…….’
언짢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 순간, 주진관은 단전 한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통증이 전해지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극독이 발려 시커멓고, 뾰족하게 긴 비수가 주진관의 단전 한가운데에 꿰어있었다.
“주군! 아버지께서 그리도 이르지 않았습니까? 꼭 호위를 데리고 다니시라고요. 실력 있는 분을 붙여 줬는데도 어찌 이리도 말을 듣지 않고 혼자 다니십니까?”
뒤로 빠르게 물러서며 외치는 상관량의 커다란 목소리에 주진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주진관은 단전에 틀어박힌 비수 자루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상관량을 쳐다보았다.
상관량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이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게, 허구한 날 이리 밖으로만 돌아다니실 거면서 교주 자리 왜 그리 꼭 쥐고 계셨습니까? 아버지께든 제게든 주셨어야지요!! 교주가 해야 하는 일은 아버지가 다하는데 언제까지 그 이름을 달고 사시려고 하셨습니까?”
상관량이 혈영천마 주진관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네 이놈…….”
주진관의 목소리는 생각만큼 크지 못했다.
“저도 오랫동안 참았습니다. 자그마치 50년을 혼자서 교주를 해 드셨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만날 밖으로 나다니면서 일은 아버지한테 다 맡기고! 양심이 있으면 미안한 줄 알던가, 빨리빨리 죽어라도 주던가. 쯧!”
상관량이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내 교주의 저승길 외로우실까 걱정되어, 곧 아버지도 같이 보내드리리다. 그리도 쉬고 싶다, 쉬고 싶다 하시는데 쉬게 해드리는 게 아들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두 분이서 저승 가셔서 편하게 쉬십시오.”
“…….”
주진관이 상관량을 쏘아보았다.
“제가 교주가 되어 교를 잘 지킬 터이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상관량이 비릿하게 웃었다.
주진관의 머릿속에 시뻘건 얼굴로 자신에게 고함을 치던 상관단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놈은 교를 말아먹을 놈이라고요!
그놈한테 이것저것 맡기지 마시라고요!
마교가 위태로워집니다!
‘내가 잘못했네, 부교주. 자네 말을 듣지 않았어… 자네에게 미안해서 어쩌누…….’
주진관은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가는 것을 느꼈다.
상관량이 올라왔던 방향의 풀들이 다시 흩어지더니 세 사람이 상관량 옆으로 나타났다.
무당의 태청검과 소림의 금월대사, 화산의 수일검이었다.
“뭐요? 벌써 끝난 거요? 에이… 내 검에도 교주 놈 피라도 좀 묻힙시다.”
수일검이 툴툴거렸다.
“마교에서 정보단을 맡고 있다더니 정보 하나는 확실하구먼, 어찌 이리 날까지 딱 맞추었소?”
무당의 태청검이 상관량에게 기특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자그마치 10년 동안 교주를 관찰했소. 다른 때는 몰라도 춘분쯤만 되면 꼭 교를 나가서 이 산을 타더이다. 여기서 뭘 하는 겐지…….”
상관량이 뒷말을 흐렸다.
주진관의 머릿속이 멍하게 울렸다.
‘놈들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구나. 내가 그리 정신 못 차리고 세상 구경을 다니는 동안…….’
“아니, 금월대사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오? 뭐 우환이라도 있소?”
수일검이 표정이 어두운 금월대사에게 물었다.
“아미타불…….”
금월대사는 수 없이 쌓인 시신의 산을 바라보며, 수일검의 말을 못 들은 척 염불을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