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실내의 연회장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 탁자에 초대된 손님이 딱 알맞게 들어가는 크기였다.
너무 광활해서 수일검을 향한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지만 많은 수의 손님이 모두 앉을 수 있는 맞춤한 규모였다.
길게 쭉 뻗은 탁자에 내로라하는 문파에서 온 손님들이 길게 도열해 앉아 있었다.
운호는 옆 사람에게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보은장의 객들은 하나같이 수일검 운호의 근처에 앉고 싶어 했으나, 주최한 보은상회 측에서 좌석을 이미 결정을 해놓은 터라 목을 빼고 운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 놓인 여러 개의 크고 둥근 탁자는 수행을 위해 따라온 호위나 제자들을 위한 자리였다.
연회장 벽을 따라 죽 늘어선 시녀와 시종들은 손님들을 위해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방 안에는 운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모두의 자리에서 잘 보이고, 잘 들리게 단을 높인 상석에 자리한 운호의 얼굴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가주님 나오십니다.”
곽림이 먼저 들어와서 말했다.
그 말에 큰 방을 채운 손님들이 모두 일어섰다.
운호도 하던 말을 끊고 일어났다.
연천이 미소를 띠며 천천히 걸어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섰다.
운호가 잘 보이긴 하지만, 그와는 적당한 거리가 있는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곽림의 말에 연천을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연천은 익숙하게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보은상회의 가주 백연천입니다. 오늘 이렇게 저희 상회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저희 보은상회를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모두 연천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서로의 친분을 다지기 위해, 여러분을 모셨으니 그저 즐겁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아주 귀한 분이 오셨습니다. 바로 영웅삼존 중의 일인이신 수일검이십니다.”
연천이 웃으며 운호를 바라보았다.
연천의 말에, 운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일검 운호입니다.”
운호가 포권을 하며 좌중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이었다.
“노부를 영웅이라 칭하여 주니 그저 기쁠 따름이오. 현재 마교는 조용하다고 하나 언제 또 악독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고, 마교와 같은 무리가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요. 모든 문파는 천마를 척결했던 노부의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야 할 것이오. 오늘 이곳에 온 여러분들에게 천마를 어찌 벌하였는지 낱낱이 알려줄 터이니 새겨듣기 바라겠소.”
운호가 배를 내밀며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천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가 이내 미소 띤 얼굴로 돌아왔다.
“수일검님의 좋은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그럼 오늘 오신 모든 분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연천이 말을 끝냈다.
그와 동시에 시녀와 시종들이 음식을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다.
넓은 탁자에는 화려하고 진귀한 음식과 술이 빽빽이 놓였다.
각 가문에서 온 객들은 옆자리에 앉은 이들과 인사를 하고 술잔을 나누며 무림을 떠도는 소문과 보은상회 가주의 도량, 수일검이 했던 영웅담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술이 몇 순배 오갔다.
많은 이들이 운호에게 술을 따르며, 그의 영웅됨을 치하했다.
운호의 붉은 얼굴이 번들거렸다.
운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연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형란이 쟁반에 용무늬가 화려하게 양각된 작은 호리병을 들고 그를 따랐다.
“영웅이신 수일검께서 저희 상회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이것은 서역에서 가지고 온 진귀한 술입니다. 수일검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연천의 말에 운호가 입을 크게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 자들이 많으니 노부가 이리 기분이 좋을 수가 없소. 하하하하!”
연천이 어두운 붉은 색을 띠는 홍주를 운호의 잔에 따랐다.
운호는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귀한 술이고 비싼 술이고 간에, 운호는 이미 술맛을 음미하는 단계를 지나 입속에 들이붓고 있었다.
걸윤은 술을 들이켜는 운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천천히 즐기십시오.”
연천이 말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운호의 바로 앞자리에 앉은, 걸윤은 옆 사람에게 침을 튀겨 가며 이야기하는 운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운호는 연신 허허허 거리며 웃었다.
지금까지도 계속 웃어 재꼈지만, 걸윤은 그의 웃음이 지금까지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감지했다.
연천이 미리 알려준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뭐랄까? 이제까지의 웃음이 세상에 닳고 닳은 노인의 웃음이라면, 지금의 것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순수한 데가 있었다.
운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표정이었다.
걸윤이 큰 소리로 운호를 불렀다.
“수일검님! 영웅께 여쭙고 싶습니다. 혈영천마는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자였습니다. 어찌 그런 자를 그리 단숨에 제압하였소이까? 그날 혈영천마를 없앤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걸윤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큰 방의 이목이 단번에 걸윤과 운호에게 집중되었다.
지금껏 화산 밖을 나온 일이 거의 없어, 운호에게 직접 그날 일을 들은 이는 없었다.
보은장에 와서 자신을 치켜세우는 이들에게 그날 일을 떠들어 대긴 했다.
도망가는 혈영천마를 단숨에 따라잡을 만큼 자신의 경공이 워낙 뛰어나다는 둥, 자신의 이십사수 매화검법이 만들어낸 검화가 그렇게도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혈영천마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둥… 그날 있었던 일보다는 스스로를 과시하는 이야기들 중심이었다.
운호의 앞자리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걸윤은 그날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연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호가 하는 저 가벼운 자랑들을 진실이라 믿기 힘들었다.
감추어진 뭔가가 있긴 있을 것 같았다.
걸윤의 물음에 운호가 헤실헤실 웃었다.
약효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걸윤은 운호가 입을 여는 그 짧은 순간이 그리도 길게 느껴졌다.
어디서 어떻게 구한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약이 수일검에게 해는 없을지.
그 약이 정말 그날에 있었던 무언가를 밝혀줄지.
그날의 숨겨진 비밀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지.
기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수일검이 대체 어떻게 혈영천마를 제거했는지.
수많은 생각이 두서없이 걸윤의 머릿속을 채웠다.
꼴사납게 웃어대던 운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깐 내가 혈영천마를 없애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그놈 때문이야.”
운호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크게 울렸다.
걸윤이 마른침을 넘겼다.
그 소리마저도 방안에 울려 퍼질 것 같았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앉아 있는 커다란 방안은 조용했다.
모두의 눈과 귀가 운호를 향해 있었다.
“당시 사부가 별 볼 일 없는 사형을 장문인을 시켰지… 그쯤에 그놈이 나를 찾아왔더구먼.”
운호의 이야기에 걸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확실히 달랐다.
“그놈이 누구입니까?”
걸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백귀마제 상관량.”
운호가 헤헤거리며 답했다.
“……!!”
백귀마제 상관량이라면 지금 마교의 교주였다.
혈영천마가 사라진 후 교주가 된 자였다.
“그자가 왜 수일검님을 찾아온 것입니까?”
걸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껏 감추어 두었던 뭔가가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 진실이라는 것이 아주 지독하고 끔찍할 것 같은 예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놈이 아주 귀한 것을 구했다고 나를 찾아왔더구먼….”
“…….”
걸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운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걸윤 뿐이 아니었다.
방 안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바로… 산공분이라네.”
한껏 뜸을 들인, 운호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걸윤은 기운이 쪽 빠지는 것 같았다.
약효고 뭐고 그딴 것은 없고, 또 다른 운호의 자랑 같은 영웅담은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산공분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공력을 흩어지게 해서 내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약 아닌가?
‘중원에 흔하디흔한 그 약을 가지고 또 뭘 했다고 말하려는건지…….’
“그게 보통 산공분이 아니라네, 만독불침이라는 혈영천마 같은 놈에게도 일시적이지만 효과가 있다고 하더구먼. 상관량 그놈이 혈영을 없애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를 했던지… 헤헤헤헤.”
운호의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웃음이 꺼림칙한 걸윤이었다.
한참을 웃던 운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관량 그놈… 마교에서 정보단을 맡고 있다고 하더니, 다른 문파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더구만. 그러니 금월대사와 태청검을 고른 게지… 꼴통에 독불장군들만 잘도 골랐더구먼. 크허허허!”
수일검이 영웅삼존 중, 자신은 쏙 빼놓고 금월대사와 태청검을 흉보았다.
무당과 소림 제자들의 인상이 굳었다.
한편, 구석에 자리 잡은 운호의 제자 청명도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처럼 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을 말려야 할 것 같은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스승의 실체를… 자신도 밝혀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무림맹주가 되겠다는 헛된 꿈을 이루고자, 제자의 손에 무고한 이들의 피를 묻히도록 강요하는 스승의 더러운 실상을 말이다.
혼자서 앓아대던 괴로움을 끊어내고 싶었다.
스승의 입에서는 악취 풍기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으로 화산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운호를 보는 제자 청명의 눈이 서늘했다.
이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 * *
혈영천마 주진관은 제대로 된 길조차 없는 가파르고 험한 대묘산을 가벼운 걸음으로 나아갔다.
나무가 우거지고 키가 다른 풀들이 삐죽삐죽 자라나 있었지만, 그의 걸음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를 걷는 것처럼 편안했다.
항상 맑은 기운이 흐르는 그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밝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2년 만에 의제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한 사람은 마교의 수장이고, 한 사람은 정파인 당가의 가주였다.
둘이 의형제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기도 전에 각자의 문파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난리를 쳐댈 것이다.
상대에게 문파의 중요한 정보를 흘리는 것도 아니고, 흘린들 그걸 어찌 써먹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끌리는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내겠다는 것인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하기 힘들어 매년 춘분 때마다 이리 몰래 만나야 했다.
작년에는 상관단월에게 잡혀 약속을 지키지도 못했다.
아우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