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가주님! 화산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전각 밖, 곽림의 목소리에 연천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화산에서 온 손님이라면 수일검 운호일 것이다.
자신이 꼭 수일검이 왔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강조해서 부탁했으니.
“불편하지 않으시면… 함께 인사드리겠습니까?”
연천이 굳은 얼굴로 걸부와 걸윤에게 말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을 진행하는데, 걸윤이 미리 운호와 안면을 터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몹시 거북하고 괴로워 보였다.
“그리하시지요.”
대답은 걸부가 했다.
모든 무림인이 칭송하는 영웅이지만, 좀처럼 얼굴을 내보이지 않던 수일검이었다.
이렇게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음! 들어오시라 해라.”
연천이 밖을 향해 외쳤다.
걸부와 걸윤은 눈에 띄게 굳은 연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키가 작고 배가 불룩한 장년인이 기름진 얼굴로 웃으며 들어왔다.
“하하하하! 가주, 오랜만이외다.”
그 옆에는 제자 청명이 따랐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연천은 표정 없는 얼굴로 예의를 다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소? 내 가주 덕분에 오랜만에 화산을 벗어나니 이리 기분이 좋은 것을… 하하하하하!”
운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수일검 운호는 천마척결 사건이 있은 이후 화산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이 없기에 그에 대한 소문은 더욱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무림 최고 영웅의 모습으로.
그것은 화산의 장문인이 막은 것이었다.
장문인은 운호의 평소 품행을 잘 알았다.
기껏 만들어진 영웅의 모습에 운호가 먹칠을 하고 다닐 게 뻔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상상 속 수일검의 모습은 꽤나 그럴듯했다.
더불어 화산도 영웅의 문파로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다.
이번 모임에 보은상회 가주가 콕 집어서 수일검이 왔으면 좋겠다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장문인은 운호를 내보내지 않았으리라.
화산에서는 보은상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어 다른 이를 보내려고 했는데, 자신이 초대받은 것을 알게 된 운호가 가겠다고 박박 우겨대는 통에 장문인도 더는 말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운호를 보은장으로 보낸 것이다.
운호는 오랜만에 화산을 벗어나서 한껏 들떠 있었다.
객잔이고 어디고 자신의 이름만 대면 영웅이라며 떠받들어 대는데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암. 그렇고 말고, 내가 무림의 영웅이지.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야.’
그간 화산에 처박혀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산 운호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화산의 제자 청명이 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운호의 제자가 연천에게 인사했다.
“잘 오셨소.”
연천이 짧게 답했다.
걸부가 운호에게 포권지례를 했다.
“개방의 배걸부라고 합니다. 영웅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배걸윤이라고 합니다.”
걸윤도 운호에게 포권하며 인사를 했다.
“청명이라고 합니다.”
청명이 걸부와 걸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소, 뭐 영웅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저 정파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요. 아하하하하… 세상 사람들이 그리 나를 영웅이라 부르니 내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하하하하하!”
운호가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
연천은 운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
“…….”
걸부와 걸윤은 예상과 너무 다른 운호의 모습에 당황했다.
“지금 이곳에서도 내게 인사를 하겠다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피곤할 지경이외다. 허허허.”
운호는 다른 이들의 표정이 어떻건 자기 할 말을 해대기 바빴다.
“…….”
“어찌 사람들이 이리도 나를 가만두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소. 영웅이라고 불리는 삶은 힘든 것이오.”
운호가 힘든 시늉을 하며 말했다.
“…….”
연천은 말없이 운호가 하는 양을 쳐다보았다.
걸부와 걸윤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운호도 딱히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어디 그저 그런 영웅이겠소? 무려 혈영천마를 없앤 영웅 아니겠소? 사람들이 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 저리들 안달하는 것은 이해를 하나, 그래도 사람이 쉴 수 있게 해야 할 것 아니오. 가주 생각은 어떻소?”
운호가 연천의 동조를 원하고 있었다.
“…….”
연천은 굳은 얼굴로 빤히 운호를 바라볼 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운호와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그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가 웃어 재낄 때마다, 스승님의 잘린 팔을 내밀며 자랑스러워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 놈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누르고 있었다.
“수일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영웅의 삶의 그 고단함을 저희같이 평범한 자들이 감히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운호의 말에 답한 것은 걸부였다.
“하하하하, 개방에서 왔다고 하셨소? 맞소, 그대의 말이 맞소.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는다는 것은 외롭고도 피곤한 것이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오. 그저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 하하하!”
운호가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었다.
“그러시겠군요.”
걸부가 운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다니깐. 개방의 손님들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나, 내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이들이 하도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그만 일어나야겠소. 남은 이야기는 모든 문파들이 모였을 때 하겠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오.”
“기대하겠습니다.”
이번에도 걸부가 대꾸했다.
“가주! 나를 찾는 이들이 워낙 많아 그만 일어나야 하는 내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허허허허.”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호는 청명과 함께 전각을 빠져나갔다.
요란하게 떠들던 운호가 나간 연천의 방은 고요했다.
“…수일검이 저런 사람이었다니…….”
걸윤이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거늘, 겸양이라고는 조금도 없구나.”
걸부도 말했다.
걸윤은 굳은 연천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리 불편한 얼굴을 해서야 되겠소?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고 싶거든 가주도 마음을 숨길 줄 알아야지요.”
“…….”
연천은 그제야 잔뜩 힘을 주고 있어서 뻣뻣하던 몸에 긴장을 풀었다.
“그것은 걸윤이의 말이 맞소. 수일검이야 가주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소만, 여러 문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수일검을 향해 그런 얼굴을 해보았자 득이 되는 것이 없소. 굳이, 걸윤이를 불러 이리 큰일을 도모하시면서 가주의 낯빛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어찌하겠소? 가주의 마음은 알겠으나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걸부도 거들었다.
하나도 틀린 것이 없는 말이었다.
연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누군가가 저리 어른스러운 말로 자신을 타이르는 것이.
자신의 행동을 지적하며 바른말을 하는데 듣기 싫지가 않았다.
연천은 걸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걸윤과 걸화는 얼굴이 꽤나 닮아있었는데, 걸부는 두 사람과 다르게 생겼다.
두 사람은 오목조목한 얼굴인데, 걸부는 천상의 외모를 닮아 풍채 좋은 대장부의 모습이었다.
“맞는 말씀이오.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이리도 어렵소. 내 더 애를 써 보겠소.”
연천이 걸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힘이 드시겠지만 가주의 사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날만은 조심해야 할 것이오.”
걸부가 말했다.
연천은 희대의 악인과 그 제자를 걱정하고 있는 개방의 후계자 배걸부라는 사내를 보며,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운호가 그리도 오만한 것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기는 했다.
수일검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자신의 전각에서 짐을 풀던 타 문파의 사람들이 하나, 둘 운호의 전각으로 모여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 영웅담이라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치켜세워댔다.
한껏 흥이 오른 운호는,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침을 튀겨 가며 열을 올렸다.
혈영천마를 없앤 천마척결 사건의 영웅으로 꼽히는 영웅삼존은 화산의 수일검 운호 외에도 무당의 태청검과 소림의 금월대사가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운호 혼자였다.
화산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수일검을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운호를 보기 위해 그의 전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보은장에서 내어준 수일검의 전각이 결코 작지는 않았지만, 워낙 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 보니 복작복작했다.
보은장에 와있는 많은 문파의 손님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모였으니 말이다.
각각 손님의 전각으로 배정받았던 시종과 시녀들은 모조리 수일검의 전각으로 몰려와 시중을 들고 있었다.
손들의 다과를 챙기며 자리를 정리하고, 주변의 다른 전각으로 안내하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을 가져다주느라 분주했다.
소림의 도원대사는 큰 소리로 껄껄 웃어대는 수일검을 보며, 금월대사가 떠올랐다.
‘그도 살아 있었다면 수일검 못지않게 칭송받았을 텐데… 답답한 인사 같으니라고…….’
씁쓸한 얼굴로 금월대사를 생각하는 도원대사의 눈에 유난히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빠르게 움직여 손이 엎지른 차를 닦아내고, 탁자를 정리하고, 저 멀리 누군가의 부름에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젊은 시종이었다.
보은장에서 일하는 시종이고 전에 얼굴도 본 바가 없었지만, 그의 움직임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발을 움직여 걷고, 손을 움직여 정리하고… 허리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눈 속에 박혔다.
익숙하고 낯익은 젊은 시종의 몸동작들이 도원대사의 마음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원대사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보은장의 젊은 시종을 쫓고 있었다.
연회 날보다 일찍 도착한 보은장의 객들은 매일같이 운호의 전각에 몰려들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운호와 가까운 자리를 차지해서, 자신이 어느 문파의 누구인지를 운호에게 각인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보은상회 가주가 중원 대부분의 문파와 가문, 상회를 초대한 연회의 그 날이 되었다.
보은장의 숙수와 식솔들은 연회장을 꾸미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천은 아무도 들이지 않고 조용히 명상에 들어 스스로를 다독이며 운호를 향해 치솟는 살의를 눌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