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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33화 (133/230)

133화

“너는 신의의 제자가 되었다면서 어찌 변한 게 없냐?”

걸윤 딴은 오랜만에 보는 누이를 배려해서 속에서 치미는 말을 아주 순화해서 내뱉었다.

“내가 왜 변한 게 없어? 나 이제 남장도 하지 않고, 잘 씻고 다닌다고. 그리고 약재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이 아는데. 내가 진짜 의원이 되면 걸부 형 영단부터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도 했어.”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걸부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걸화가 걸부를 쳐다보며 물었다.

“좋아서, 네가 영단을 만들어준다니 생각만 해도 좋아서 웃었다.”

걸부가 걸화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전에 비해서 확실히 차분해져 있었다.

철없던 누이가 조금은 성장한 것 같아, 기특했다.

“히… 그치?”

걸화가 걸부를 향해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다음 날 아침.

“이렇게 금방 가는 거야? 겨우 하룻밤 밖에 안자고?”

걸화가 걸부와 걸윤을 보고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만간 다시 올 거야.”

걸윤이 말했다.

“치! 너는 안 와도 돼. 아버지가 너 대신 오면 안 돼?”

“어휴… 저거…….”

걸윤이 걸화를 흘겨보았다.

“너는 가서 가주께 인사를 드리고 오거라.”

걸부가 걸윤에게 말했다.

“형님은 안 들어갈 겁니까?”

“가주가 초대한 사람은 너다. 나는 걸화를 보러 온 것이야. 인사하고 오너라.”

걸부가 말했다.

“네.”

걸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걸화는 보은장 입구에서 걸윤과 걸부를 배웅했다.

“진짜 또 와야 된다.”

걸화가 걸부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래, 몸 건강히 잘 있거라. 신의 말씀도 잘 듣고.”

걸부가 걸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형! 조심히 가… 걸윤아! 너도 잘 가.”

“그래, 건강해라. 조만간 또 오마.”

걸윤이 말했다.

“응… 꼭 와야 돼. 약속한 거다.”

걸화가 콧물을 훌쩍였다.

걸윤이 걸화의 등을 토닥였다.

걸부와 걸윤은 말에 훌쩍 올라타고는 먼지를 날리며 사라졌다.

걸화는 훌쩍이며, 그들이 사라진 곳을 지켜보았다.

* * *

걸윤과 걸부는 개방에 도착하자마자 보은장에서 있었던 일을 천상과 의논했다.

워낙 조심스럽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라, 염문강도 장로들도 두지 않고 세 부자만 있었다.

“어허… 어찌 그런 일을…….”

천상이 걸윤의 이야기를 들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위험하지는 않겠느냐?”

걸부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새로운 정보를 우선적으로 알아낼 만한 자리이기는 했지만, 걸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저야 그저 영웅에게 호기심 어린 질문이나 몇 가지만 하면 되는 것이니 위험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걸윤이 답했다.

“정파의 제자들이 마교의 천마를 없앤 일에 새로운 진실이 있을 것이 무엇이냐? 음… 그자는 믿을 만한 것이냐?”

천상이 물었다.

천상의 말에 걸윤은 백연천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다, 천천히 말했다.

“…아는 것 없고 능력에 비해 협의가 과했으나… 정도를 지키고, 옳은 일을 따르는 자였습니다. 어려운 자를 성심껏 돕고 자신의 이익은 챙길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자였지요…….”

걸부가 걸윤을 쳐다보았다.

‘아는 것 없고’, ‘바보 같은’과 같은 단어가 쓰이긴 했지만, 걸윤이 말하는 백연천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어찌 혈영천마의 제자가 된 것인지….”

무림 살인귀의 제자와는 간극이 너무 컸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그자의 스승이 혈영천마라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그자의 형편없는 무공이나 물러터진 성품을 생각하면 말이죠.”

걸윤의 말에 걸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쩌면 연천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번 일로 개방에서 새로운 뭔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고, 그게 아니라도 걸화를 그리 정성으로 돌보았다는 그자의 진짜 스승이 누구인지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하여 천마척결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여라. 그자의 스승이라는 자가 그 일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가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천상도 연천의 스승이 혈영천마는 아니라는 데에 무게가 실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에는 걸부와 함께 가거라.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걸화도 데려오도록 하고.”

천상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했다.

“네.”

걸부와 걸윤이 동시에 대답했다.

* * *

걸화는 의약당으로 들이닥치는 수레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하는지 얼굴도 볼 수 없었던 신의가 돌아오고 며칠째 약재를 가득 채운 수레가 의약당 앞에 짐을 부렸다.

“에효…….”

걸화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약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약당 뿐이 아니었다.

전각마다 새로운 침구며, 가구와 식료품을 실은 수레들이 줄을 이었다.

시종과 시녀들은 들어오는 짐을 옮기고 청소를 하느라 바쁘게 몸을 움직여댔다.

보은장의 활짝 열린 문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혁이었다.

시종이 제갈혁을 알아보고 싹싹하게 인사하며, 그에게 배정된 전각으로 안내했다.

제갈혁은 여식인 제갈련과 백연천의 혼담을 넣었다가 거절당했다.

여식이 못나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지금은 혼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제갈혁은 보은상회 가주에게 미련이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여식인 제갈련이 백연천이라는 사내에게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어찌 여식의 혼사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꺼내어볼까 싶어, 남들보다 일찍 온 것이었다.

“하하하, 가주! 그동안 잘 계시었소?”

연천의 전각으로 든, 제갈혁이 밝게 웃으며 연천에게 물었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연천도 기분 좋게 대꾸했다.

“뭐 고생이랄 것이 있겠소?”

“앉으시지요.”

연천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이어, 형란이 차를 내어왔다.

길고 가는 손으로 예쁜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른, 형란이 제갈혁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연천에게도 잔을 내밀었다.

연천이 형란의 손에서 찻잔을 받아 들었다.

“드시지요.”

연천이 제갈혁을 보고 말했다.

제갈혁은 색색의 정과가 담긴 작은 접시를 내려놓는 형란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접시를 다 내려놓은 후에도 형란은 나가지 않고 연천 옆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가까이서 즉시 시중을 들기 위해서였다.

중요한 손님이 들거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눈치껏 나갔으나, 지금은 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혹, 불편하면 연천이 나가 있으라고 할 것이다.

제갈혁은 미간을 좁히며 형란을 훑어보았다.

검고 반질반질한 머리카락은 보기 좋게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투명하게 새하얀 피부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맑고 환했다.

유난히도 붉은 입술에는 묘한 색기가 흘렀다.

제갈혁은 미색이 고운 여인이 연천 옆에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여 저 여인 때문에 혼담을 거절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저는 시녀는 아닌 것 같소만 어찌 이곳에 계시오?”

제갈혁이 형란에게 물었다.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형란이 고개를 들어 제갈혁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해하던, 형란은 이내 침착하게 미소 지었다.

“가주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가주께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자 이곳에 있습니다.”

형란이 다소곳이 대답했다.

“허허허, 가주께서 생명을 구하였다고 보답을 해달라는 소인배는 아닐 터인데 어찌 그리하시오?”

제갈혁이 애써 웃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의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가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저 소녀의 뜻입니다.”

형란이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허허…….”

제갈혁의 입에서는 그나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불편한 얼굴로 연천과 형란을 번갈아 보았다.

연천은 모른 척 천천히 차를 들었다.

다음날부터 보은장에 손님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첨성파, 아미파, 곤륜, 남궁세가… 중원의 굵직한 문파부터 그저 그런 중소문파까지 보은상회가 손을 뻗을 수 있는 모든 문파들을 초대했고, 대부분은 그에 응했다.

연천은 그들을 반가이 맞이했고, 시종들은 손님들을 준비된 전각으로 안내했다.

“가주님! 개방에서 오셨습니다.”

“모시거라.”

전각 밖, 곽림의 목소리에 연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에 걸부와 걸윤이 들어오고 있었다.

연천은 걸부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걸화가 안기어 가슴에 얼굴을 비비던 사내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개방 사람이었던가?’

연천의 생각을 모르는 걸부가 포권하며 인사를 하였다.

“개방의 배걸부라고 합니다.”

‘…배걸부?’

연천은 묘하게 비슷한 이름을 들으며, 미간이 좁아졌다.

“오랜만이오.”

걸윤이 인사를 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한데… 이분은 누구신지…?”

연천이 걸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제 형님이십니다.”

“아! 그러면 걸화의 큰 오라버니?”

“네.”

걸부의 대답에 연천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아…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어서 앉으시지요. 차를 내어오너라.”

연천이 서둘러 걸부와 걸윤을 자리로 안내했다.

이상하게 입에서 자꾸 헛웃음이 나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어쩐지 이번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형란이 차를 가지고 와 세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나가 있거라.”

연천의 말에 형란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연천이 걸윤에게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소.”

“가주께서 말하지 않았소? 내가 빚이 있다고.”

걸윤의 표정은 삐딱했다.

“그리 생각하지 않소. 그저… 대협이 꼭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하여 그리 말하였소. 혹여, 기분 나빴다면 용서해주시오.”

연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음! 걱정되지 않으시오?”

걸윤은 연천이 사과하는 것을 못 들은 척하고, 다른 말을 했다.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용서하고… 걸윤은 그런 것이 낯 뜨겁고 쑥스러웠다.

“걱정되오. 내가 운호 그자에게 검을 뽑을까 걱정이 되오.”

연천은 가장 우려가 되는 점을 걸윤에게 말했다.

“흐음…….”

걸윤이 침음을 흘렸다.

걸윤은 연천의 스승이 혈영천마가 아니거나, 혹시 혈영천마가 맞다 해도 연천이 생각하는 다른 진실 같은 것이 없으면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물었던 것인데… 연천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내 할 수 있는 데까지 돕겠소. 하지만 가주께서도 스스로 수일검을 향해 검을 뽑지 않도록 힘을 쓰셔야 할 것이오.”

걸윤은 이왕 장단을 맞춰주기로 한 것, 수일검에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낼 셈이었다.

그러려면 저 얼뜨기 같은 가주가 어설프게 수일검에게 검을 뽑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어쭙잖게 검을 뽑아 들었다가 연천이 다치거나 최악의 경우 죽기라도 하면 아주 골치가 아플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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