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걸윤이 다시 자리에 앉아 딱딱하게 말했다.
“이번 한 번뿐이오.”
연천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연천이 좋아하는 차 향기도 그의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혀주지 못했다.
배걸윤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다시 찾기 어려웠다.
구파일방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연천이 혈영천마의 제자인 것을 알고도 그 비밀을 지켜주는 사람.
연천은 꼭 걸윤에게 이번 일을 부탁해야 했다.
연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거지였소. 어쩌다 그리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소. 기억에 있는 것은 구걸해서 겨우 먹고살았고, 그나마도 힘 있고 덩치 큰 녀석들에게 빼앗기고 두들겨 맞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것이오.”
“…….”
걸윤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하는 연천을 쳐다보았다.
“여섯 살이었는지 일곱 살이었는지 그쯤이었소. 며칠을 굶고 두들겨 맞아 구걸할 힘도 없었소. 아프도록 추운 날이었지. 그저 빨리 죽어서 더 이상 배가 고프지도, 아프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소. 그리고 곧 그리될 거라는 걸 어린 나이에도 직감할 수 있었지요.”
“…….”
걸윤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런데 죽지 않았더군. 눈을 뜨니 따뜻한 이불 속이었소. 스승님이 나를 주워 살린 모양이었소. 아주 깊은 산 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그리 둘이 살았소. 나는 그분을 부모처럼 여겼고, 그분은 나를 자식으로 여기며 서로 의지하고 살았소.”
“그런 이야기를 왜 내게 하는 것이오?”
걸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힘든 부탁을 하려니 서론이 길어졌소.”
“…….”
걸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이야기를 마저 하라는 표시였다.
“그분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발작을 일으키셨소. 본인의 과거를 이야기한 적은 없으나 발작을 일으키면 늘 누군가를 크게 꾸짖었소.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오두막에 혼자 있는 것도 적적했고 스승님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 중원으로 나왔소. 그리고 걸화를 만난 것이오.”
“…….”
걸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연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중원에 나와서 스승님에 대해 알게 되었소. 그분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계셨소. 누명을 벗길 방법이 있는데, 대협이 도와주었으면 하오.”
“…….”
걸윤은 대답 없이 연천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연천도 걸윤을 보며, 그가 뭔가 대꾸하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연천을 보던 걸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주길 바라오?”
“스승님을 해하고 그분께 누명을 씌운 자를 찾았소. 얼마 전에 만났지. 사람들은 그자가 떠들어대는 거짓을 믿고 있소. 그자의 입으로 사실을 말하게 할 작정이오. 그걸 대협께서 해주시오.”
“거짓을 떠든다더니, 어찌 사실을 말하게 할 작정이오?”
“진실을 말하게 하는 환단이 있소. 그것을 그자에게 먹일 작정이오.”
“하아…….”
걸윤이 놀라 탄식을 내뱉었다.
“…….”
“사악한 약이 아니오?”
“그저 일시적으로 선천지기를 순하게 만들어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뿐이오. 몸에 해는 없다고 하오.”
“으흠… 그자는 어떤 자요?”
“그자는…….”
연천이 말을 끊고 목울대가 울렁이게 침을 삼켰다.
“그자가 수일검 운호요.”
“으흐흠…….”
걸윤이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
연천의 이야기를 들으며 설마설마했다.
한데, 수일검의 이름을 들은 이상 확실해졌다.
연천이 혈영천마의 제자가 맞았다.
걸윤이 연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림의 살인귀가 말년에 어찌 저런 제자를 들였는지…….’
혈영천마는 고금 제일검이라 불리는 자였다.
연천은… 지난 2년 동안 신수가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지금 있는 상회 가주 자리가 더 어울렸다.
거기다 혈영천마는 희대의 살인귀였다.
연천의 유순한 얼굴과 답답하도록 바른 성격은 그것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어쩌다…’라는 생각만 걸윤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운호 그자는… 치졸한 사기꾼이오.”
연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혈영천마의 억울함을 풀겠다고 수일검을 해하겠다는 것이오? 그것을 내게 도와 달라?”
걸윤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저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오. 대협은 그에게 영웅담을 들려달라고, 그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만 하면 되오.”
연천이 절박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무림을 떠도는 혈영천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뭐… 다른 진실 같은 것은 없다면… 그러면 대협은 어찌할 것이오?”
걸윤은 숨겨진 진실 따위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교의 천마는 살인귀고, 수일검은 영웅이었다.
“흠…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구려… 당연히 스승님이 옳다고 믿고 있었으니… 혹시라도, 혹여 수일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잠시 숨을 고른 연천이 말을 이었다.
“그러하면, 나는 내 어리석은 믿음에 대한 대가로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얻겠지요. 그 심판을 대협이 해주시오.”
금월대사가 한 말도 있으니 절대 수일검의 말이 진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걸윤에게 금월대사에 대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잘 설득해서 그 일을 하도록 하고 싶었다.
“…….”
걸윤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
연천도 재촉하지 않았다.
혈영천마의 제자를 돕는 일에 가담하겠다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만히 걸윤의 답을 기다렸다.
“어찌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그대가 혈영천마의 제자라고 욕하고 다닐 수도 있소.”
걸윤이 물었다.
이런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부탁을 자신에게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연천을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미 2년 전부터 내가 혈영천마의 제자인 것을 알고 있지 않았소? 한데도 함구한 것 아니오?”
연천이 묵직하게 물었다.
걸윤에게 부탁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자신이 혈영천마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도 발설하지 않은 것.
“…함구한 것이 아니고 믿지 못한 것이오.”
걸윤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연천같이 덜떨어진 놈이 혈영천마의 제자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모자란 놈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
연천은 걸윤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껏 걸윤이 자신의 비밀을 지켜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연천의 표정이 멍해졌다.
“…….”
“…….”
“…해보겠소.”
걸윤이 당황한 연천의 얼굴을 슬그머니 쳐다보더니 가볍게 말했다.
걸윤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 일을 하고 싶었다.
연천의 말대로 혈영천마가 누명을 쓴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아니라도 뭔가 나올 게 많았다.
거기다 무림의 영웅인 그 수일검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
개방도가 이런 일을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든 한구석에 끼어들어 뭐라도 알아내야 할 일이었다.
“…고, 고맙소.”
연천이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하나, 나는 수일검을 믿고 있소.”
걸윤이 연천을 똑바로 쳐다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영웅과 영웅을 음해하려는 자들이 모이는 자리이니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그것이 연천이 말한 혈영천마의 누명 같은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
연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파에서 교육받고 자란 자에게 혈영천마가 살인귀이고, 수일검이 영웅인 것은 당연했다.
어쩌다 만난 연천의 말을 믿어 달라할 수 없었다.
그저, 연천의 부탁을 들어주고, 세상에 그의 존재를 소문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수일검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크게 상심하지 않기를 바라오. 스승의 과거가 그대의 앞날을 막아서야 되겠소?”
걸윤이 연천을 걱정해서, 미리 훈계까지 하고 있었다.
연천이 씁쓸하게 웃었다.
“고맙소. 그 말… 새겨 두겠소.”
스승님은 살인귀가 아니었다. 금월대사가 그것을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걸윤에게 그것을 설명한들 믿을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이번 일이 잘되어서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
걸윤은 무슨 말을 더 꺼낼 듯하였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보은상회 가주로 좋은 옷을 입고 수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걸윤의 눈에 연천은 여전히 덜떨어진 놈으로 보였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술 한잔하시겠소?”
연천이 걸윤을 그냥 보내기가 미안해서 제안했다.
“오늘은 걸화와 같이 있겠소. 내 지금 들은 것을 아버지와 형님께 말씀드려도 되겠소?”
걸윤은 연천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자신이 믿는 이들에게 해도 되는지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걸윤의 말에 연천이 씩 웃었다.
겉으로 무심한 듯하지만, 세심한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대협의 귀에 들어간 이야기이니 대협의 입에서 나가는 것은 그대 마음이지요.”
“일이 끝난 후에, 위로주 한잔 드리리다.”
걸윤은 수일검의 말이 맞을 것이라고, 혈영천마가 누명을 쓴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연천이 상심할 것이니, 자신이 위로주를 주겠다고 말이다.
걸윤의 말에, 연천이 씁쓸하게 웃었다.
* * *
“그래서 무슨 얘기 했는데? 뭐라고 하던데? 응응?”
걸화가 걸윤의 턱 밑에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별 이야기 안 했어.”
걸윤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에이… 별 이야기도 아닌데 니가 여기까지 왔겠어? 중요한 얘기 했지? 나도 좀 알자. 뭔데? 으응?”
걸화가 걸윤의 한쪽 팔을 잡고 늘어졌다.
“너는 오랜만에 오라비를 만나서 안부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냐?”
“알았어, 잘 지냈지? 그래서 무슨 얘기 했어?”
“어휴… 내가 너랑 뭔 얘기를…….”
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 얘기를 하기는! 무슨 얘기 했냐니깐!”
계속 걸윤을 졸라대던 걸화가 짜증을 냈다.
“우리도 무인 보내고 지원받기로 했다! 됐냐?”
걸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거? 겨우?”
걸화는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겨우라니? 보은상회에서 지원하는 게 얼마나 큰데? 그리고 중원의 대부분의 문파가 보은상회와 손을 잡는 이 시국에 개방만 빠져서야 되겠냐?”
“알았어! 뭘 그런 얘기를 그리 뜸을 들여!”
걸화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너는! 어휴우…….”
걸윤은 ‘아직도 성격이 그 모양이냐’라거나, ‘그러니 신의께 쫓겨났지!’라는 말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