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휴신각에 누운 걸화를 내려다보던 신의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걸화를 다시 내치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치솟았다.
손끝이 섬세하고, 감각이 예민해야 하는 의원이 이리 술을 마셨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흠…….”
신의가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걸화를 치료해 제정신이 돌아오게 해야 했다.
과묵하고 예의 바른 교준이 따박따박 속에 담긴 말을 하게 만든, 그 영단의 조제 방법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배걸화 하나밖에 없었으니.
보은장의 휴신각에서 눈을 뜬 걸화 앞에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신의가 있었다.
걸화는 휘청거리며 침상으로 내려가 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치지만 말아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걸화가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말했다.
“으흠…….”
신의는 결코 자신이 한번 내뱉은 말을 뒤집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의가 데려와 가르치다가 쫓아낸 아이는 걸화 말고도 몇이 있었다.
아무리 애원하고 매달려도 절대 다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데 걸화는 술독에 빠진 몰골로 업혀 왔다.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번은 신의도 어쩔 수 없었다.
걸화의 영단을 확인해야 했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뱉은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다. 그것은 의원으로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신의는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 특별히 너에게만 딱!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신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스승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걸화가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레 뒤, 걸화가 침상에서 일어났고 신의는 바빴다.
걸화의 비법으로 만든 영단을 가지고, 교준과 함께 살수대로 향했다.
깜깜했던 지난 세월을 깨고, 아주 작은 빛 한줄기가 들이치는 것 같았다.
* * *
신의가 다시 보은장으로 돌아온 것은, 달포가 넘어서였다.
여장도 풀지 않고 서둘러 연천의 방으로 들었다.
모충일도 신의가 왔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연천의 방으로 들었다.
“이 환단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선천지기를 지나치게 깨끗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기분 좋게 웃으며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답을 하더군요.”
신의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하아…….”
연천이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뭔가가… 그리도 바랐던 뭔가가 성큼 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가까워진 그것에 조심스러워졌다.
이럴 때일수록 신중을 기해야 했다.
연천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모충일도 같은 생각인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증인이 필요합니다.”
모충일의 말에 연천도 신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주께서 직접 수일검에게 질문하지 마시옵소서. 가주의 말에 의해 혈영천마님께서 누명을 벗는다고 하더라도, 후에 가주께서 천마의 자리에 오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믿을만한 문파를 내세워야 합니다.”
“믿을 만한 문파라…….”
연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중원에서도, 우리도 믿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충일의 말에 연천은 자신에게 혼담을 넣었던, 제갈세가를 떠올렸다가 이내 머리를 저었다.
보은상회 가주 백연천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도울 것이다.
제갈세가 아니라도 돕겠다는 가문이 줄을 설 게다.
하지만, 혈영천마의 제자인 백연천의 부탁을 들어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중원에서 믿을만한 가문에다, 자신이 혈영천마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고도 등을 돌리지 않을 사람이라…….’
당가의 태상가주인 숙부가 떠올랐다.
당연히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당가가 정파로 분류되기는 하였으나 사파보다 더 악독하다 하여 정파에서 반기는 문파는 아니었다.
무림 전체로 보았을 때 그리 신뢰받는 곳이라 보기 어려웠다.
연천이 턱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혈영천마의 제자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것을 알고도 발설하지 않은 사람.’
연천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라면… 내 부탁을 거절하면 하였지, 그것을 이용해 내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연천이 입을 열었다.
“개방은 어떻습니까?”
“개방 말씀입니까? 개방이야 구파일방 중의 하나이니 힘도 있고 중원의 다른 문파에서도 믿을만하지만, 개방에 어찌 이 일을 맡기겠습니까?”
모충일이 염려되는 얼굴로 물었다.
정파 쪽에 보은상회 가주가 혈영천마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들키는 날에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
“개방에 배걸윤이라는 자와 인연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자라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침방울을 뛰기며, 악을 쓰던 걸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걸윤은 연천이 혈영천마의 제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연천이 영친왕의 성에서 헤어질 때 얘기했으니.
걸윤이 그 사실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벌써 소문이 돌고도 남을 일이었다.
연천이 혈영천마의 제자인 것을 알고도 함구하고 있었다.
그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의 제자인 걸아가 개방 방주의 여식이니 해볼 만합니다.”
신의도 연천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럼 배걸윤이라는 자에게 부탁을 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모충일이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마나 믿을 만한 자인지는 모르나, 그자의 말 한마디이면 보은상회가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다.
그에 딸린, 무명촌 식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충일은 긴장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이번 일은 꼭 해내야 했다.
이 일이 잘만 되면, 오랫동안 염원하던 그것이 해결될지도 몰랐다.
그분의 누명을 벗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눈부시게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봄날이었다.
만개한 꽃을 향해 날아드는 나비의 춤사위가 아름다웠다.
연천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개방을 믿어보겠다고 했으나, 걸윤이 자신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믿을 만한 문파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다.
개방에 서찰을 보낸 지 보름이 넘어가는데도 답신이 없자 초조했다.
연천은 보은장 내를 걸었다.
나비가 팔랑팔랑 이 꽃 저 꽃을 향해 날아들었다.
볕을 받은 새하얀 목련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샛노란 개나리가 화사하게 흐드러졌다.
알싸한 꽃향기가 정처 없는 연천의 발길을 끌어당겼다.
연천은 의약당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추었다.
‘하… 여긴 왜 온 것인가…….’
연천이 걸음을 돌리는데, 의약당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반갑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연천의 입꼬리 올라갔다.
다시 의약당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데, 걸화가 웬 사내의 품에 안겨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고 있는 것 아닌가.
“형! 내가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사내도 걸화를 꼭 끌어안았다.
연천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걸화와 사내를 쏘아보던 연천은 장포 자락이 휘날리게 몸을 돌렸다.
‘저 아이는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아무 사내에게나 형님이라며 안기는 게야! 나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던 아이가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이야!’
배신감과 화가 치밀었다.
연천이 다녀간 것을 모르는 걸화는, 오랜만에 본 걸부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근데 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
“걸윤이 이곳 가주께 볼일이 있다더구나. 마침 너도 이곳에 있다 하여, 네 얼굴이 보고 싶어 같이 왔다.”
걸부가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는?”
“아버지야 개방에 계시지, 우리 중 한 명은 개방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걸윤이 보고 있으라고 하고, 아버지랑 둘이 오지…….”
걸화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걸부가 껄껄 웃었다.
“걸윤이 이곳에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맞다 그랬지. 그래서 걸윤이는 어디 갔어?”
“바로 가주를 뵈러 갔다. 일이 끝나면 너를 보러 올 게야.”
“칫! 누가 걸윤이 보고 싶댔나?”
걸화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래, 신의의 제자가 되었다고? 지낼 만은 하느냐?”
걸부는 걸화가 쫓겨났던 것에 대해서는 모른 척 묻지 않았다.
“응, 재밌어. 내가 정식 의원만 되면 형 영단부터 만들어줄 테니깐 조금만 기다려.”
걸화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가 영단을 만든다고? 내가 겁나서 그걸 어찌 먹겠어?”
“뭐가 겁나? 나 지금도 완전 실력 좋아.”
의원 흉내를 내어 약을 지었다가 쫓겨나기까지 해놓고도, 걸부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허허허허허. 그래, 내 기대해보마.”
개방에서 다 죽어가던 누이의 생기 띤 얼굴이 보기 좋은 걸부였다.
* * *
연천은 치미는 불쾌한 감정을 밀어내려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걸화가 화날 때 그랬던 것처럼, 쾅쾅 소리가 나게 걸어 자신의 전각으로 들었다.
“가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연천의 호위대장인 곽림이 그의 전각 앞에서 연천에게 말했다.
“누구시냐?”
연천이 표정을 바꾸고 물었다.
“개방에서 오신 배걸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디 계시냐?”
연천의 마음이 바빠졌다.
보름이 넘게 목이 빠져라 그의 서찰을 기다렸는데, 이리 바로 직접 올 줄이야.
“안으로 모셨습니다.”
“알았다.”
연천이 성큼성큼 걸어 자신의 방으로 들었다.
연천이 들어가자, 차를 내어온 형란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연천은 마른침을 삼키고, 걸윤에게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 길을 와 주시어 고맙소.”
연천이 예를 다해 인사했음에도, 그를 보는 걸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뭐요? 나는 보은상회의 가주를 보러왔소!”
걸윤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내가… 보은상회의 가주요.”
“하! 그만 가보겠소!”
걸윤이 벌떡 일어섰다.
“걸윤 대협께 부탁이 있어 보자고 하였소.”
연천이 다급하게 말했다.
“거절하겠소.”
걸윤은 연천의 부탁을 듣지도 않고 거절하고 있었다.
“들어볼 수는 있지 않겠소?”
연천이 자리에서 선, 걸윤을 보고 말했다.
“들을 필요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소.”
걸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
“대협은 내게 빚이 있소. 대협이 내게 빚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걸윤이 영친왕의 성에서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그것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걸윤이 몸을 돌려 연천을 노려보았다.
연천은 묵묵히 걸윤의 눈빛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