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날의 진실】
허성이 금월대사의 무덤에 절을 올리는 모습에 연천의 가슴속에 파문이 일었다.
그의 눈에 허성은 허성이 아닌 오래전 자신이었다.
원수와 그의 제자를 향해 복받치는 안타까움을 지워보려,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를 세게 깨물어도 속에서 일렁이는 것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는 감정이 불편하고 스승님께 죄스러웠다.
살던 곳 인근에 스승을 묻고 연천을 따라온 허성은 묵묵히 보은장의 허드렛일을 해댔다.
눈치 빠르고 손도 빨라, 시키지 않아도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으흠…….”
금월대사가 죽기 전에 말했던 대로 허성이 밥도 잘하고, 빨래도 잘하며 다른 잡일도 잘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으며 연천은 한숨을 내뱉었다.
금월대사가 죽기 전에 허성을 부탁하긴 했지만, 연천이 그것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데다가 외로움과 슬픔으로 뒤범벅되어있는 그를 도저히 혼자 두고 올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보은장의 허드렛일을 시킬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천은 허성에게 이는 완전히 다른 양가의 감정을 당분간은 덮어두기로 했다.
연천에게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금월대사를 찾아서 스승님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살인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승님이 살인멸구 했다고 소문이 나 있는, 그 마을을 없앤 것은 상관량과 그에게 속은 영웅삼존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연천이 보은장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림에서는 폐관 수련에 든 금월대사가 열반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것으로 보아, 소림에서도 금월대사의 행적을 쫓아 그가 어찌 되었는지 알아낸 모양이었다.
정과 도를 따른다는 정파에서 거짓에 거짓을 덧대어가며, 자신의 문파를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영웅의 문파라는 그 이름 하나를 지키기 위해, 파계한 금월대사의 존재를 끝까지 붙잡고 버티다 그의 죽음마저 은폐하고 있었다.
신의와 모충일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손에 들어온 한 가닥의 희망을 자신의 실수로 놓쳐버렸다는 자괴감이 명치를 아프게 눌러 내렸다.
실수를 만회해야겠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수일검 운호를 잡아다가 주둥이를 찢든, 주리를 틀든… 어떻게 해서든 그날의 일을 실토하게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이리 무작정 기다린다고 뭘 어찌 알아내겠습니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자는 스승님을 해한 것을 크나큰 자랑으로 여기는 자입니다. 실수로라도 그날의 진실을 발설할 놈이 아닙니다.”
연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화산을 탈탈 다 헤집어도 운호의 뱃속에 꽁꽁 숨겨진 진짜 그날의 일을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운호는 그날 홀로 혈영천마를 베었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자기가 꾸민 이야기에 도취되어 사는 인간이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도 스스로 만들어 놓은 거짓이 사실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무작정 기다리는 지금의 방법으로는 뭘 알아내기 어려웠다.
뭔가 적극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연천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운호가 금월대사처럼 죽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다.
모충일은 꼭 그날의 진실이 아니라도 운호의 허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연천은 아니었다.
그놈 뼛속 깊이 숨겨 놓은 그것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자신들의 죄를 스승님에게 뒤집어씌운 그 일에 대해서 말이다.
“…….”
모충일은 생각에 잠겼다.
연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화산 같은 문파에는 첩자를 넣는 것도 쉽지 않았고 겨우 들어가도 화산의 중심에 있는 운호에게 다가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간 알아낸 것이 운호의 고약한 술버릇과 그가 만든 허풍으로 똘똘 뭉친 영웅담이 고작이었다.
“그자를 잡아다 고신을 합시다. 주리를 틀고 살을 찢어발기어 사실을 토해내도록 합시다.”
연천이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연천이 본 운호는 그렇게 하지 않은 이상, 사실을 말할 놈이 아니었다.
“으흠… 그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모충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세월 동안 모충일은 이 방법, 저 방법 고민하고 알아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연천이 말하는 모충일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약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첩자들을 잡아 고신할 때 사용하는 약이라는데 먹이면 몽롱한 상태에서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하더군요.”
모충일이 무겁게 말했다.
“…….”
연천이 모충일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약을 시험을 해보았사온데, 워낙 독하고 불안정하여 먹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이들도 있었고, 제대로 무슨 답을 하기도 전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열에 하나 정도 성공하였사온데, 그마저도 약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정도였습니다.”
모충일이 씁쓸하게 말했다.
“으흠… 혹여… 신의께서 그 약을 좀 더 연구하여 보충할 수는 없습니까?”
연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의는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었다.
그에게 그런 약을 연구하고 보충해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연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승님의 오명을 벗기고 싶었다.
좀 전부터 생각에 빠져있던 신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비슷한 약이 있는 듯합니다.”
연천과 모충일이 동시에 신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신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
연천과 모충일은 그런 신의의 얼굴만 보며 기다렸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고민하던 신의가 느릿하게 말을 했다.
“환단이 있습니다. 속내를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약이 있는 것을 내가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모충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충일이야말로 지난 세월 동안 그날의 일을 알아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찾아보았었다.
음침하고 더러운 흑촌부터, 사람을 짓갈겨 입을 열게 하는 자들까지 알아보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 약이 있었다면 모충일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신의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신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걸아가 얼마 전에 만든 것입니다. 물론 영단이라고 만든 약의 부작용이기는 하지만…….”
신의가 말끝을 흐렸다.
환단을 먹은 교준의 상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
연천은 의아한 눈으로 신의를 쳐다보았다.
‘뭐? 걸아? 걸화가 아니고? 환단? 영단의 부작용?’
“조금만 시일을 주십시오. 확인해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에 잠긴 신의가 느릿하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연천은 여전히 신의의 말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를 믿었기에 그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신의는 연천에게 인사를 하고, 의약당으로 향했다.
“교준아!”
신의의 다급한 부름에 교준이 얼른 다가갔다.
“걸아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물어보면서도 신의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했던 일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쫓아냈고 더 이상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리 다시 찾아야 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을 객잔에… 있습니다.”
교준은 신의 몰래 잠깐씩 마을로 내려가 걸화를 보고 오곤 했다.
“개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을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이냐?”
쫓아낸 지 달포가 넘었다.
연고도 없는 마을 객잔에서 뭘 한단 말인가.
“그것이…….”
교준이 신의의 눈치를 보며 답을 하지 못했다.
“어허! 어서 말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무어? 달포 동안?”
신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네….”
교준이 겸연쩍은 얼굴로 답했다.
하긴, 개방으로 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술도 한잔하고, 마음 정리를 하고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당장 가서 걸아를 데리고 오너라.”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서 다녀오거라.”
“…네…….”
기뻐서 뛰어가도 모자라건만, 교준이 불안한 얼굴로 답했다.
교준은 자신이 처음 걸화를 데려다 놓은 객잔으로 들었다.
“그… 술… 많이 마시는 소저는 지금 어디 계시오?”
교준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 물었다.
“아! 쓸모없는 소저 말씀입니까?”
점소이가 태연하게 물었다.
교준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준은 걸화가 객잔에서 저리 불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종 가서 밀린 술값과 방값도 계산하고, 걸화가 어찌 지내는지도 보았기에.
걸화는 밤이고 낮이고 술을 퍼마시다가, 술에 취하면 아무나 잡고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라고.
그리 달포를 같은 객잔에서 머물다 보니, 객잔 사람들은 걸화를 ‘쓸모없는 소저’라고 불렀다.
“그 소저야 밤새 퍼마시고, 겨우 방에 누웠습죠.”
점소이가 일상인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고맙소.”
교준이 대꾸하고 2층 걸화의 방으로 올라갔다.
무명촌 사람들이 다른 마을에 비해 서로 돈독하고, 주변을 더 보살피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여린 여인이 혼자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아무 데서나 드러누워 잤다.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걸화가 신의의 제자였고, 보은장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종종 교준이 돌보아주러 오기까지 했기에 마을 사람들은 걸화가 제정신이 아니어도 조심히 다루었다.
덕분에, 자신이 들이붓는 술과 속에서 치미는 자괴감 말고는, 무엇도 걸화를 괴롭히지 못했다.
“어후우…….”
걸화의 방문을 연 교준이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그러쥐었다.
지독한 술 냄새가 훅 끼쳐왔다.
교준은 숨을 참고 방으로 들었다.
걸화는 침상에 몸을 절반쯤 내어놓고 잠들어 있었다.
“소저! 걸화 소저!!”
교준이 걸화를 흔들어 깨웠다.
아무리 흔들어도 걸화는 인사불성이었다.
“에효호…….”
교준은 걸화를 위해 이런 모습을 신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힘들듯 싶었다.
달포가 넘도록 술만 마시고 산, 걸화가 단숨에 술에서 깨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약을 챙겨 먹이고, 몸을 추스르지 않는 이상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어려울듯싶었다.
걸화는 치료가 필요했다.
교준은 이왕 이리된 거, 한시라도 빨리 신의께 보이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해, 걸화의 바랑을 어깨에 메고 그녀를 들쳐 업었다.
걸화를 업고 보은장으로 들어온 교준은 앞마당에 있는 연천에게 인사했다.
연천은 종종, 마당이고 후원이고 나무와 꽃을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연천이 교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등에 매달린 걸화를 바라보았다.
걸화는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달포가 넘게 술 말고는 제대로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은 그녀의 몰골은 딱, 술독에 빠진 주정뱅이였다.
연천이 낮게 숨을 내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준은 그 작은 몸짓을 ‘수고했다’는 말로 이해했다.
교준에게 걸화를 돌보게 한 것은 연천이었다.
연천이 걸화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이를 시켜, 지켜보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교준은 연천에게 인사를 하고 의약당으로 향했다.